1847년 키르케고르의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저널 NB:160

NB:160, Pap. VIII1 A 49, 1847

아마도 이제는, 모든 것을 줄줄 외울 줄 아는 그 영리한 닭들(아는 체하는 사람들)1에 의해, 나의 기독교 강화2에 대해 이런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곧 그것들이 ‘화해(속죄, Forsoningen)’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5년 동안 나에게서 내가 얼마나 산파술적으로(maieutisk) 전개하는지를 배울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확히 이전과 똑같이 어리석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으며—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먼저 첫 번째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불쌍한 인간들은 내가 방대한 책들 속에서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한 번의 말 속에서 모조리 뒤섞어 떠들어댄다. 나는 각각의 책마다 항상 어떤 ‘가시(Braad)’를 남겨 두는데, 그것이 다음 책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사변가들, 그리고 일부 성직자들의 천박함은 실로 놀라울 정도다.”



해설: “가시로 남겨진 진리”

― 키르케고르 NB:160의 산파술적 저작 방법과 존재의 생성

1. 문제 제기: 왜 그는 “속죄가 없다”는 비판을 예상하는가

Søren Kierkegaard는 NB:160에서 자신의 “기독교 강화(Christelige Taler)”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곧, 그의 글에는 “화해(속죄, Forsoningen)”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표면적으로는 교리적 결핍에 대한 지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반응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자신의 저작 방식 자체에 대한 급진적인 선언이다. 그는 독자들이 “5년 동안 배웠음에도 여전히 똑같이 어리석다”고 말하며, 문제의 핵심이 교리의 부재가 아니라 독서 방식의 오류에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이 일기의 중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왜 독자들은 “속죄”를 요구하는가, 그리고 왜 그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제공하지 않는가?


2. 산파술(maieutisk): 진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방법을 “산파술적(maieutisk)”이라고 규정한다. 이 개념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전통을 계승하지만, 그에게서 그것은 단순한 인식론적 방법이 아니라 실존론적 사건으로 변형된다.

  • 소크라테스: 이미 내재된 진리를 드러냄
  • 키르케고르: 진리는 존재(Tilværelse) 안에서 생성됨

따라서 진리는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전통적 이해키르케고르
교리로 전달됨존재 안에서 생성됨
이해되면 끝남살아내야 비로소 시작됨

이 점에서 “속죄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오히려 정당하다. 그는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명된 속죄는 더 이상 속죄가 아니라, 단지 정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가시(Braad)”의 구조: 미완성으로 남겨진 진리

이 일기의 결정적 구절은 다음이다:

“나는 각각의 책마다 항상 어떤 ‘가시(Braad)’를 남겨 둔다”

여기서 “가시”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의 저작 전체를 조직하는 원리다.

(1) 가시는 무엇인가

가시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 해결되지 않은 문제
  • 완결되지 않은 설명
  • 독자 안에 남는 불편함

즉,

가시는 독자를 끝맺지 않고 남겨두는 장치다


(2) 가시는 왜 필요한가

키르케고르에게 완결된 설명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독자를 다음과 같은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 “이해했다”는 착각
  • 실존적 변화를 멈춘 상태
  • 진리를 소비한 상태

반대로 가시는:

  • 독자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만든다
  • 존재를 움직이게 한다

따라서:

가시는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발생시키는 조건이다


4. 저작 전체의 연속성: 책과 책 사이의 긴장

그는 말한다:

“그것이 다음 책과의 관계이다”

이 말은 그의 저작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일반적인 저작 구조는 다음과 같다:

  • 한 책 = 하나의 완결된 체계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는:

  • 한 책 = 다음 책으로 나아가게 하는 미완의 단계

즉 그의 저작은 다음과 같은 운동을 가진다:

  1. 문제 제기
  2. 부분적 전개
  3. 가시 남김
  4. 독자의 불안
  5. 다음 단계로 이동

이 구조는 단순한 문학적 연속이 아니라,

존재(Tilværelse)의 단계적 생성 운동이다


5. “영리한 닭들(kloge Høns)”의 의미: 왜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키르케고르는 독자들을 “영리한 닭들”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특정한 존재 유형에 대한 규정이다.

이들은:

  • 모든 것을 “한 번에” 이해하려 한다
  • 체계로 묶으려 한다
  • 결론을 빠르게 얻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먼저 첫 번째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것이 있다”

즉, 그들은 과정을 거부한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게 진리는:

  • 단계적으로만 접근 가능하며
  •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 반복(Gjentagelse)을 통해 자기화된다

따라서 “영리함”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


6. 신학적 의미: 가시는 ‘내면의 교회’의 생성 방식이다

이제 이 개념을 교회의 개념과 직접 연결해보자. 내가 강조하는 “내면의 교회(Tilværelsens Kirke)”는 외적 제도가 아니라, 존재 안에서 생성되는 사건이다. 이 관점에서 “가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 내면의 교회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표지
  • 존재가 아직 하나님 앞에 서지 못했다는 찔림
  • 신앙이 아직 현재화되지 않았다는 긴장

즉,

가시는 교회가 형성되는 자리다


7. 결론: 가시는 설명의 결핍이 아니라, 존재의 시작이다

NB:160은 단순한 불평이나 독자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키르케고르 저작 전체의 원리를 드러내는 선언이다.

그에게:

  • 설명은 끝이 아니다
  • 이해는 완성이 아니다
  • 교리는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가시로 남겨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핵심

이 일기에서 “가시(Braad)”란:

존재가 아직 생성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내적 긴장이며, 독자를 다음 실존 단계로 밀어내는 신학적 장치다


주석

  1. kloge Høns (영리한 닭들): 자신의 영리함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kloge Høns”라는 다소 조롱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실존적 이해 없이 지식만 반복하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즉, 이는 단순한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외우는 것”과 “진리를 존재로 살아내는 것”의 차이를 겨냥한 표현입니다. ↩︎
  2. mine christelige Taler(나의 기독교적 강화): ≪고난의 복음 (Lidelsernes Evangelium). 기독교적 강화들 (Christelige Taler)≫,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Opbyggelige Taler i forskjellig Aand)≫의 제3부를 가리킨다. ↩︎

0 Comments

답글 남기기

Avatar placeholder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