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무지는 게으름이 아니라 엄밀함이다 — 알람시계가 알려주는 것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안다. 전날 밤 알람을 맞추면서 스스로에게 다짐도 했다. “내일은 진짜 일어난다.” 그런데 알람이 울리는 순간, 나는 그걸 끄고 다시 잠든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분명히 “5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앎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이건 단순히 의지가 약했던 걸까? 아니면 — 애초에 나는 그것을 몰랐던 걸까?

소크라테스라면 후자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소한 아침의 실패담이, 사실은 “너 자신을 알라”는 저 유명한 명제가 왜 그렇게까지 무겁고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다이달로스의 도망치는 조각상

플라톤의 『메논』에는 이상한 비유가 하나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의견(doxa)과 지식(episteme)을 구별하면서, 전설적인 장인 다이달로스가 만든 조각상 이야기를 꺼낸다. 다이달로스의 조각상은 너무나 생생하게 만들어져서, 묶어두지 않으면 스스로 걸어서 달아나 버린다는 것이다.

“다이달로스의 조각상은 묶어두지 않으면 달아나 버립니다. 참된 의견들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 머물려 하지 않고 달아납니다 — 누군가 그것을 ‘왜 그런지 이유를 대며’ 묶어두기 전까지는요. 그리고 그렇게 묶인 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참된 의견은 우연히 맞을 수 있다. 길을 한 번도 가본 적 없어도 누군가 알려준 대로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 믿음은 묶여 있지 않다.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조금만 유혹이 와도 훌쩍 달아나 버린다.

“나는 5시에 일어나는 사람이다”라는 내 믿음이 정확히 이런 조각상이었다. 전날 밤에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왜 그런지 이유로 단단히 묶여 있지 않았고, 그래서 이불의 온기와 졸음이라는 작은 바람에도 훌쩍 달아나 버렸다.

“알면서도 못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프로타고라스』에서 그는 아예 “의지박약(아크라시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종종 “좋은 걸 알면서도 나쁜 쪽을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이건 틀린 진단이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은 의지의 실패가 아니라 계산의 실패다 — 당장의 쾌락(따뜻한 이불)을 실제보다 크게, 장기적 이익(개운한 아침, 지켜진 약속)을 실제보다 작게 잘못 저울질한 것뿐이다.

그러니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든 순간, 나는 “알고도 안 지킨” 게 아니다. 그 순간 나는 몰랐다. 정확히는, 5시에 일어나는 것이 다시 자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정말로, 흔들림 없이 알고 있지는 않았다. 알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이토록 잔인한 명령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검증할 수 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건 지금 여기서 증명하면 끝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의지를 가진 사람인가”라는 지식은 그렇게 검증되지 않는다. 이건 오직 미래의 실제 시련을 통과해야만 사후적으로 확인되는 지식이다.

어젯밤의 나는 “나는 5시에 일어날 사람이다”라고 참되게 믿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정말 지식이었는지는, 오직 알람이 울리는 그 순간에 가서야 판가름 난다. 그리고 대개는 — 조각상이 달아나 버린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구조적으로 언제나 아직 완결되지 않은 앎이다. 아직 오지 않은 시련들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결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완전히 묶인 지식으로서 말할 수 없다. 내일 새벽에도, 다음 달의 유혹 앞에서도, 그 조각상이 다시 달아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모른다”는 게으른 회의주의가 아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만 안다”는 그 유명한 고백이 완전히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다. 이건 무기력한 회의주의도, 겸손을 가장한 화법도 아니다. 아직 미래의 시련을 다 통과하지 못한 것을, 함부로 이미 완결된 지식이라고 참칭하지 않겠다는 극도로 엄밀한 태도다.

소크라테스가 평생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의가 무엇인지 압니까, 용기가 무엇인지 압니까”라고 캐물었던 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이 손쉽게 “나는 안다”고 말해버리는 그 순간마다, 그 앎이 정말 다이달로스의 조각상처럼 단단히 묶여 있는지, 아니면 그저 아직 달아나 보지 않았을 뿐인 참된 의견에 불과한지를 시험한 것이다.

그리고 거의 매번, 그 시험은 대화 상대를 아포리아 — 막다른 골목 — 로 몰아넣었다. 이건 소크라테스의 방법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예상된 결과였다. 한 번의 대화, 몇 개의 논리적 반례만으로는 조각상을 완전히 묶어둘 수 없다. 묶는 작업은 무수한 시련을 다 통과해야 끝나는데, 대화는 그중 아주 일부만을 제공할 뿐이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이렇게 보면 매일 아침의 그 작은 실패는 철학적으로 사소하지 않다. 알람이 울리고 내가 그것을 끄고 다시 잠드는 매 순간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캐물었던 바로 그 질문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순간이다 — “너는 정말 네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것을 아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답은 정직하게 “아직은 아니다”일 수밖에 없다. 이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직함이야말로, 다음번에는 그 앎을 조금 더 단단히 묶어보려는 시도의 출발점이다. 소크라테스적 무지란 결국, 완결되지 않은 것을 완결된 것처럼 굴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엄밀한 정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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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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