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 이후의 ‘동일성과 차이’ 문제는 하나의 직선적 계보라기보다 여러 갈래로 전개된다. 가장 큰 변화는 이것이다.

이전 철학이 대체로 “차이들 속에서 동일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물었다면, 현대철학은 점차 “동일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차이와 배제를 통해 구성되는가”를 묻기 시작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전환의 직접적인 창시자라기보다, 헤겔적 총체성에 저항하여 이후의 문제를 미리 드러낸 인물로 볼 수 있다.

1. 키르케고르가 남긴 출발점

헤겔에게 참된 동일성은 차이를 단순히 제거하지 않는다. 자신을 차이화하고, 그 차이와 모순을 통과하여 더 풍부한 자기동일성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헤겔의 동일성은 ‘차이를 포함하는 동일성’이다.

키르케고르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 체계 속에서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 실제로 차이를 살아 내는 것은 다르다.
  • 단독자(Den Enkelte)는 보편자의 한 사례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다.
  • 신과 인간의 절대적 차이(den absolute Forskellighed)는 사유의 매개로 해소되지 않는다.
  •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동등성·닮음(Lighed)을 추구한다.
  • 이 동등성은 존재론적 동일성이 아니라 관계적 동등성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 이후 철학을 읽을 때에는 세 질문을 구분해야 한다.

  1. 존재들은 무엇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가?
  2. 차이는 동일성에 종속되는가, 아니면 동일성을 산출하는가?
  3. 서로 다른 존재들이 동일해지지 않고도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키르케고르는 특히 세 번째 질문을 날카롭게 제기했다.


2. 니체: 동일성은 생성 위에 세워진 허구다

니체에게 현실은 고정된 실체들의 세계라기보다 힘들의 관계와 생성의 세계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와 개념은 끊임없이 달라지는 것들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서로 완전히 동일한 두 잎은 없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잎’이라고 부른다. 개념은 차이를 생략하여 동일성을 만든다. 따라서 동일성은 세계에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구조라기보다, 인간이 세계를 다루기 위해 설정한 단순화다.

또한 ‘나’라는 동일한 주체도 의심받는다. 생각과 욕망의 배후에 변하지 않는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충동과 힘이 서로 경쟁하면서 잠정적인 통일을 이룬다.

키르케고르와 니체는 다음 점에서 유사하다.

  • 체계가 살아 있는 개인을 추상화한다고 본다.
  • 생성과 실존을 고정된 개념보다 중시한다.
  • 개인을 보편적 역사 과정의 수동적인 결과로 보지 않는다.
  • 헤겔적 종합과 진보에 저항한다.

그러나 방향은 매우 다르다. 키르케고르는 단독자를 신 앞에 세우지만, 니체는 초월적 신과 보편적 도덕 자체를 계보학적으로 해체한다. 키르케고르에게 자기는 신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되지만, 니체에게 자기는 힘들의 생성 속에서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한다.


3. 후설: 변화하는 경험 속에서 동일한 대상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후설은 동일성을 단순히 부정하지 않고, 그것이 의식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 분석한다.

나는 탁자의 앞면만 보고도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탁자로 경험한다. 자리를 옮기면 보이는 모습은 계속 달라지지만, 나는 여전히 동일한 탁자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동일한 대상은 감각에 한꺼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모습들이 시간 속에서 종합되면서 하나의 동일한 대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현상학에서 동일성은 차이 이전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서로 다른 나타남들 → 의식의 종합 → 동일한 대상으로 경험됨

여기서 차이는 동일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이 나타나기 위한 조건이 된다. 대상은 언제나 서로 다른 관점과 시간적 국면을 통해서만 동일한 것으로 주어진다.

키르케고르가 “실존하는 주체”를 강조했다면, 후설은 대상의 동일성이 주체의 경험에서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엄밀하게 분석했다. 그러나 후설의 초점은 종교적 차이나 죄가 아니라 의식의 지향성과 경험의 구성이다.


4. 하이데거: 동일성보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가 먼저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이 존재를 어떤 최고의 존재자나 영속하는 실체와 동일시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존재론적 차이다.

  • 존재자: 사람, 나무, 도구, 신처럼 ‘있는 것’
  • 존재: 존재자가 존재자로 드러날 수 있게 하는 ‘있음’

존재는 또 하나의 가장 큰 존재자가 아니다. 따라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잊어버리면 존재를 하나의 궁극적 실체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후기 하이데거는 동일성도 새롭게 이해한다. “A=A”라는 형식적 동일률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과 존재가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Zusammengehörigkeit)이다. 동일성이 먼저 있고 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근원적인 함께 속함에서 동일성과 차이가 비로소 성립한다.

키르케고르와의 공통점은 인간 존재를 객관적 체계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불안, 죽음, 결단, 실존 같은 주제도 이어받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키르케고르의 신학적 범주들을 존재론적으로 변형한다. 신 앞의 단독자보다 존재를 이해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살아가는 현존재가 중심이 된다.


5.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자기는 이미 완성된 동일성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고정된 본질과 일치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사물은 자신과 일치하지만, 의식은 자신과 거리를 둔다. 인간은 현재의 자기 모습만이 아니라 아직 아닌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동일성에는 균열이 있다.

인간은 자신인 그대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아직 아닌 자신을 향해 존재한다.

사람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된 사물처럼 취급하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기기만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은 역할이나 사회적 규정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키르케고르의 ‘자기 자신이 되어 감’과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를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과제와 가능성으로 본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그 과정을 보증하거나 완성하는 신은 없다.


6. 구조주의: 개별 항의 동일성은 차이의 체계에서 나온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현대의 차이 철학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언어의 기호는 그 자체에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 의미를 얻는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접한 다른 단어들과 구별되는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생긴다.

먼저 완성된 항들이 있고 그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가 항들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이 관점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라캉의 정신분석,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등으로 확장된다. 개인의 정체성 역시 독립적으로 완성된 뒤 사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친족·제도·상징적 관계 속에서 특정한 위치를 부여받음으로써 구성된다.

키르케고르의 단독자와는 긴장이 생긴다. 키르케고르는 개인이 군중이나 보편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구조주의는 오히려 개인이 자신보다 앞서 존재하는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7. 레비나스: 타자는 나의 동일성에 흡수될 수 없다

레비나스는 키르케고르와 가장 생산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사상가 가운데 하나다. 그에 따르면 서양철학은 타자를 이해한다는 명목으로 타자를 ‘나의 개념’ 안에 넣어 왔다. 타자를 내가 파악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면, 타자의 낯섦은 동일자의 질서에 흡수된다.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성 또는 동일자의 제국주의라고 비판한다.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존재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먼저 윤리적 책임을 요구한다.

여기서 관계는 종합이나 상호 동일화가 아니다.

타자와 관계를 맺지만, 타자의 타자성은 남는다.

이 점은 키르케고르의 차이와 동등성 문제에 매우 가깝다. 참된 관계는 차이를 없애 상대를 나와 똑같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 키르케고르는 주로 신과 단독자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 레비나스는 구체적인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에서 출발한다.
  • 키르케고르의 역설은 성육신과 믿음에 집중된다.
  • 레비나스의 비대칭성은 윤리학이 존재론보다 먼저라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또한 키르케고르의 동등성(Lighed)이 사랑이 원하는 만남을 강조한다면,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의 관계가 애초에 대칭적 동등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타자에게 지는 책임은 타자의 나에 대한 책임과 계산적으로 같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8. 데리다: 동일성 내부에는 이미 차이와 지연이 있다

데리다는 동일성과 차이를 두 개의 독립된 항으로 놓지 않는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과 완전히 즉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본다.

하나의 기호가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기호와 달라야 한다. 동시에 그 의미는 다른 기호들을 계속 참조하므로 완전히 현재화되지 않고 미뤄진다. 데리다는 이 두 운동, 즉 ‘다름’과 ‘미뤄짐’을 함께 가리키기 위해 차연(différanc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차연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동일성은 차이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것은 다른 것들의 흔적을 포함함으로써 자신이 된다.
  • 완전한 자기현전이나 순수한 자기동일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 의미는 관계망 속에서 생기며 계속 열려 있다.

예컨대 ‘현재’는 순수하게 현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방금 지나간 것의 흔적과 곧 올 것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현재로 경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와 데리다는 최종적인 종합을 경계하고, 결단이 완전한 지식에 의해 보증될 수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 만난다. 데리다는 특히 선물, 용서, 비밀, 결단, 아브라함의 책임을 논하면서 키르케고르를 적극적으로 다시 읽는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역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라는 종교적 중심을 갖는다. 데리다는 그 중심마저 완전히 현전하는 최종 근거로 고정되는 것을 경계한다.


9. 들뢰즈: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먼저다

들뢰즈는 이 문제를 가장 급진적으로 뒤집는다. 전통 철학은 흔히 먼저 동일한 개념을 세운 뒤, 차이를 그 동일성에서 벗어난 편차로 이해했다.

  • 이것과 저것은 모두 인간이다.
  • 그러므로 둘의 차이는 ‘인간이라는 동일성’ 아래의 부차적 차이다.

들뢰즈는 반대로 차이의 생산적 운동에서 개체와 동일성이 생겨난다고 본다.

동일한 것들이 서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과정이 잠정적인 동일성을 만들어 낸다.

그가 말하는 차이 그 자체는 “A는 B가 아니다”라는 부정적 차이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직 고정된 A와 B가 생기기 전부터 새로운 형태와 개체를 산출하는 적극적인 차이다.

반복도 같은 것의 복제가 아니다. 매번 반복될 때 조건과 관계가 달라지며 새로운 것이 생긴다. 계절의 반복, 습관의 반복, 예술적 반복은 원본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와 들뢰즈는 ‘반복’의 사상가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하지만 양자의 반복은 다르다.

  • 키르케고르의 반복(Gjentagelsen)은 단독자가 자유롭게 자기 존재를 다시 받아들이는 실존적 운동이다.
  • 들뢰즈의 반복은 차이가 존재를 생산하는 비인격적·존재론적 운동이다.
  • 키르케고르에게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절정에 이른다.
  • 들뢰즈에게 차이는 초월적 신 없이 내재적인 생성의 원리로 작동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결론을 계승하지 않지만, 헤겔적 매개와 종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반복과 운동을 발견한 사상가로 키르케고르를 높이 평가한다.


10. 푸코: 동일한 주체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진다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영속적인 본질로 답하지 않는다. 광인, 범죄자, 환자, 정상인, 성적 주체 같은 정체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그대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식과 제도와 권력의 실천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때 차이는 단순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합법과 불법을 나누는 분류 체계가 특정한 차이를 생산하고 고정한다.

따라서 푸코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동일한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기준으로 동일성과 차이를 나누는가?

푸코에게 해방은 숨겨진 ‘참된 나’를 발견하는 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하고, 그것과 다르게 존재할 가능성을 실험하는 일이다.

키르케고르 역시 군중과 사회적 동일화에 맞서 단독자가 되는 과제를 강조한다. 그러나 푸코는 그 과제를 신과의 내면적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 권력관계와 자기 형성의 실천에서 분석한다.


11. 현대의 젠더·인종·정체성 논의

현대 정치철학에서 ‘동일성과 차이’는 정체성 정치의 문제로 이어진다.

보편적 평등은 모든 사람을 같은 인간 또는 시민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모두를 똑같이 대우한다’는 원칙이 실제 차이를 무시할 수도 있다. 장애, 젠더, 인종, 식민 경험처럼 서로 다른 조건을 고려하지 않으면 형식적 동일성이 기존의 불평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요구가 충돌한다.

  • 동일성의 요구: 우리는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 차이의 요구: 우리의 서로 다른 경험과 조건을 지워서는 안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일함동등함을 구분하는 일이다.

  • 동일함: 같은 성질이나 정체성을 가짐
  • 동등함: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짐

이 구분은 키르케고르의 동일성과 **동등성·닮음(Lighed)**의 문제와 뜻밖에 깊이 연결된다. 동등해지기 위해 서로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타자를 나와 동일하게 만들려는 요구가 타자의 차이를 억압할 수 있다.

다만 키르케고르의 Lighed는 오늘날의 법적·정치적 평등 개념과 정확히 같지는 않다. 『철학의 부스러기』에서는 우선 신의 사랑이 신과 인간의 불평등을 어떻게 극복하여 사랑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12. 전체 흐름을 압축하면

사상가·흐름동일성과 차이의 관계
키르케고르절대적 차이는 사유로 매개되지 않지만 사랑은 차이를 보존하며 동등성을 추구한다
니체동일성은 생성과 차이를 단순화해서 만든 유용한 허구다
후설서로 다른 나타남들의 종합을 통해 동일한 대상이 구성된다
하이데거존재와 존재자의 차이가 망각되었으며, 동일성은 근원적 공속에서 생긴다
실존주의자기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자신과 거리를 두며 되어 가는 존재다
구조주의항들의 정체성은 차이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레비나스타자는 동일자의 개념 속에 흡수될 수 없으며 윤리적 관계는 차이를 보존한다
데리다모든 동일성 안에는 이미 차이와 지연, 타자의 흔적이 작동한다
들뢰즈차이가 동일성보다 먼저이며 동일성은 차이의 생산물이 된다
푸코주체의 동일성과 사회적 차이는 역사적 지식·권력에 의해 생산된다

가장 큰 철학사적 이동은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헤겔: 동일성은 차이를 자기 안에 매개한다.
키르케고르: 어떤 차이는 체계적으로 매개되지 않으며, 관계는 동일화가 아니라 동등성을 요구한다.
구조주의: 차이의 관계가 각 항의 동일성을 만든다.
데리다: 동일성 내부에는 이미 차이가 작동한다.
들뢰즈: 차이는 동일성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선다.
레비나스: 차이를 동일성에 환원하지 않는 것이 윤리의 출발점이다.

결국 키르케고르 이후 문제는 “동일성과 차이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머물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차이를 없애지 않으면서 관계와 공동성을 어떻게 성립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서 키르케고르의 차이(Forskellighed)와 동등성(Lighed)은 현대철학과 만난다. 키르케고르는 차이를 동일성 속에 회수하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이를 차연과 책임의 문제로,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윤리로, 들뢰즈는 차이의 생산성으로, 현대 정치철학은 차이를 보존하는 평등의 문제로 각각 변형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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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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