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티마의 사랑론(『향연』 201d~212c)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 정교한 매개 구조를 세우는데, 이게 핵심입니다.

① 에로스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결핍한 존재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다른 연설자들처럼) 에로스가 아름답고 위대한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오티마는 이걸 뒤집습니다 — 누군가를 욕망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욕망한다면, 에로스 자신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로스의 출생 신화가 이걸 정확히 뒷받침합니다 — 아프로디테의 생일잔치에서 포로스(풍요, 방편)와 페니아(빈곤)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이 부모에게서 에로스는 이중의 성질을 물려받습니다:

  • 어머니 페니아에게서: 결핍(늘 가난하고, 늘 부족함)
  • 아버지 포로스에게서: 수완(부족함을 채울 방편을 끊임없이 궁리함)

그래서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의 중간자(metaxy)입니다 — 완전히 무지하다면 자기 결핍조차 몰라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완전히 지혜롭다면 이미 다 가졌으니 욕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이 중간 지대(가진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결핍을 자각하며 추구하는 상태)가 철학(필로-소피아, 지혜에 대한 사랑) 그 자체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디오티마는 에로스를 철학자의 원형이라 부릅니다.

② 그럼 사랑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 안에서 낳는 것”

여기가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206b). 디오티마는 말합니다 — 사랑이 원하는 건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 안에서 낳고 생산하는 것(tokos en kalo)”입니다.

왜 하필 “낳음”인가 — 인간은 필멸자입니다. 영원히 살 수 없으니, 대신 자기 자신의 대체물을 낳음으로써 불멸을 흉내 냅니다. 몸으로 임신한 사람은 자식을 낳아 자기 존재를 이어가고, 혼으로 임신한 사람(시인, 입법자, 철학자)은 시·법률·지혜 같은 더 오래가는 자손을 낳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필멸자가 불멸을 향해 손을 뻗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왜 이 낳음이 하필 “아름다움 안에서”만 일어나는가 — 디오티마의 답은, 추함은 신적인 것과 불화하지만 아름다움은 신적인 것과 조화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생산(출산)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산실(産室)입니다. 지난번 확인하신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이미지(『테아이테토스』)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다시 나옵니다 — 아름다움을 마주하면 이미 품고 있던 것이 산고 끝에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죠.

③ 그러니 사랑의 진짜 위계는 “아름다움의 종류”가 아니라 “낳는 것의 수준”에 따라 올라갑니다

이게 유명한 “사랑의 사다리(klimax)”(210a~212a)입니다:

  1. 하나의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 → 거기서 아름다운 말(로고스)을 낳음
  2. 한 몸의 아름다움이 다른 몸들의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닮았음을 깨닫고 → 모든 아름다운 몸을 향한 사랑으로 확장
  3. 몸의 아름다움보다 혼의 아름다움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됨 → 젊은이를 더 낫게 만드는 말들을 낳음
  4. 혼의 아름다움에서 관습과 법률의 아름다움으로 → 이것들이 서로 닮았음을 봄
  5. 법률에서 여러 학문(지식)들의 아름다움으로 → “아낌없는 철학 속에서 많은 아름답고 훌륭한 말과 생각들을 낳음”(지난번 확인하신 210d의 바로 그 구절입니다!)
  6. 마침내, 갑자기(exaiphnes) 그 모든 개별 아름다움들이 참여하고 있던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격함

④ 아름다움 자체 — 사다리의 정상에서 발견되는 것

211a~b에서 이 아름다움 자체가 어떤 것인지 정의됩니다 — 어떤 관점에서는 아름답고 다른 관점에서는 추한 것이 아니며, 어떤 때는 아름답고 어떤 때는 아니지 않으며, 이것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답고 저것과의 관계에서는 추하지 않으며, 여기서는 아름답고 저기서는 추하지 않습니다. 이건 몸에도, 지식에도, 어떤 개별자 안에도 있지 않고, 그 자체로, 자기 자신과 더불어, 영원히 하나로 있으면서,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거기 참여(participation)함으로써 아름다워지는 그런 것입니다. (이게 바로 형상 이론, 이데아론의 핵심 예시가 등장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 도달한 사람은 마침내 덕의 그림자가 아니라 참된 덕 자체를 낳게 됩니다 — 지금까지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모상(그림자)을 붙들고 낳아온 것이었는데, 이제는 진짜와 직접 접촉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질문디오티마의 답
사랑은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것인가아니오 — 아름다움 안에서 무언가를 낳으려는 것
그럼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좋음(善)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 = 불멸에 대한 갈망
아름다움의 역할은 무엇인가목적이 아니라 낳음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산실(신적인 것과 조화롭기 때문)
사다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오르는가아름다움의 종류가 아니라 거기서 낳아지는 것의 수준(몸 → 말 → 법 → 지식 → 참된 덕)

그러니 사랑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 아름다움은 사랑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대상(선의 영원한 소유, 불멸)이 아니라, 그 열망이 실제로 산출·생산으로 이어지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조건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지만, 정작 사랑이 하는 일은 아름다움을 붙잡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 안에서 자기보다 오래갈 무언가를 낳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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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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