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가장 위험한 착각
― 키르케고르의 산파술과 한국 교회 ―
키르케고르는 평생 이상한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누구보다 철저하게 설명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소크라테스적 전략이었습니다.
관련 일기는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Journalen NB26(NB26:7, Pap. X4 A 553)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의 지식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모른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인간의 가장 위험한 상태가 무지가 아니라 “부풀려진 지식(opblæst Viden)”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끝까지 “무지한 자(Uvidende)”로 남으려 했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기독교에 적용했다. 오늘날 가장 위험한 것은 “비기독교”가 아니라,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당시 덴마크의 크리스텐덤에서 보았다. 모두가 세례를 받았고, 모두가 교회에 속해 있었고, 모두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작 신약이 말하는:
- 자기 부인(Forsagelse)
- 죽음(Afdøen)
- 고난(Lidelse)
- 박해(Forfølgelse)
는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더 무서운 문제를 발견한다.
산파술의 위험
처음에 키르케고르는 생각했다.
“나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설명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감히 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겠다.”
이것은 매우 경건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심판의 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까 두려워했다.
“너는 감히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느냐?”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반대로 이렇게 물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데 따르는 고난을 피해 버린 것이 아니냐?”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발견한 “산파술의 위험”이다.
즉,
-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교만도 위험하지만,
- 끝없이 뒤로 물러서며 결단을 회피하는 것도 위험하다.
결국 인간은:
- 기독교를 하나의 지식 체계로 설명하면서도,
- 자기 존재는 걸지 않는 상태에 머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깊은 위기는 아마도 여기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 교리도 많고,
- 강의도 많고,
- 콘텐츠도 많고,
- 신학도 많다.
그러나 키르케고르 식으로 말하면, 문제는 이것이다.
“그 모든 것이 과연 존재를 변화시키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너무 쉽게:
- “구원받았다”
- “믿는다”
- “은혜 받았다”
- “사명자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단순한 자기 규정이 아니다.
예수는:
- 자기를 부인하고,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모든 것을 버리고,
- 미움을 받으며,
- 세상 속에서 조롱당하는 길
을 말씀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위험이 아니라 정체성이 되었고, 때로는 사회적 자본이 되었으며, 심지어 성공의 언어가 되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데 위험이 없고 오히려 이익이 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텐덤의 본질이다.
존재 없는 기독교
키르케고르가 두려워했던 것은 “틀린 교리” 이전에 존재 없는 기독교였다.
즉 인간이:
- 기독교를 설명할 수 있고,
- 설교할 수 있고,
- 조직할 수 있고,
- 콘텐츠화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존재는 그리스도의 요구 아래 놓이지 않는 상태이다. 이때 기독교는 더 이상 말씀(Logos)가 아니다. 그것은 정보가 된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말한 것처럼:
“부풀려진 지식”
이 된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를 다시 불러온다. 소크라테스는 “안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거짓 지식을 무너뜨렸다. 키르케고르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쉽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크리스텐덤의 거짓 확신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고백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에 더 어려운 말을 한다. 기독교는 결국: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
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즉 끝없이:
- “나는 아니다”
- “나는 부족하다”
- “나는 아직 아니다”
라는 말 뒤에 숨어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회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참된 문제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의 요구 아래 자기 존재를 내어놓았는가이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개혁 프로그램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 다시 두려워하는 것,
- 다시 떨리는 것,
- 다시 자기 존재를 질문하는 것
이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키르케고르는 이 질문을 평생 붙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위기는 죄가 아니라, 이 질문 자체가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질문이 사라진 곳에서는:
- 회개도,
- 존재의 생성도,
- 성령의 역사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다시 필요한 것은 거대한 확신이 아니라, 어쩌면 소크라테스와 키르케고르가 가졌던 그 떨림일 것이다.
“나는 과연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구독하시면 더 많른 정보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1 Comment
내면성 · 5월 19, 2026 at 5:25 오후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