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우는 법: 키르케고르의 유머와 탈춤의 해학

키르케고르의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를 번역하다가 탈춤이 떠올랐다. 이 책의 가명 저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고난을 다루는 대목에서 “유머”를 길게 논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서민의 비애를 웃음으로 풀어내는 우리 탈춤의 해학과 놀랍도록 닮은 구조가 보인다. 그러나 끝까지 따라가 보면 닮은 만큼 다른 점도 분명해진다.

클리마쿠스가 말하는 유머

클리마쿠스에 따르면 사람은 고난을 세 가지로 대한다.

첫째는 미적인 태도다. 직접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불운은 바깥에서 우연히 닥치는 사건이다. 그는 그 불운만 사라지면 다시 행복해지리라 믿는다.

둘째는 유머의 태도다. 유머가(Humorist)는 고난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사는 일 자체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고난받는다”는 깊은 것을 파악한다. 클리마쿠스는 유머가를 “종교적인 사람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머가는 거기서 멈춘다. 고난이 삶에 속한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그 고난이 무엇을 뜻하는지 붙들지 않고 농담으로 거둬들인다(철회한다).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쓴다.

앞의 것이 유머적인 것 속의 아픔이고, 뒤의 것이 농담이다. 그래서 그가 말할 때 사람들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는 아픔 속에서 실존의 비밀을 건드리지만, 그러고는 다시 집으로 간다.

그가 드는 예가 재미있다. 크게 불행한 사람 앞에서 유머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고난받는 자입니다. 집주인이 마당에 새 초인종 줄을 달아 주는 날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더없이 행복하겠는데.” 아무도 불운이라 부르지 않을 하찮은 괴로움을 들어서, 행운과 불운의 구별 자체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놀리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특별한 불행을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셋째는 종교적인 태도다. 종교적인 사람은 고난을 거둬들이지 않고 끝까지 붙든다. 그에게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표지다. 유머가는 바로 그 문턱 앞에서 농담으로 막아 낸다. 그래서 클리마쿠스는 유머를 “종교적인 것의 경계 영역”이라 부르고, 자기 자신을 두고 이렇게 고백한다.

나 자신이 본질적으로 유머가이며, 내재 속에 내 삶을 두고서 그리스도교적-종교적인 것을 찾고 있다.

탈춤의 해학은 어디서 닮았나

탈춤에서 가장 먼저 닮은 것은 해학이다. 봉산탈춤의 미얄 과장을 보자. 늙은 할미가 집 나간 영감을 찾아 헤매다 결국 버림받고 죽는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서민 여인의 기막힌 비애다. 그런데 마당에서는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재담으로 펼쳐지고, 관객은 웃으면서 슬퍼한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는 클리마쿠스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더 깊이 닮은 것은 고난을 대하는 자세다. 해학은 비애를 어느 한 사람의 특별한 불운으로 다루지 않는다. “사는 게 다 그렇지” 하고 삶의 기본 조건으로 껴안는다. 이것은 고난을 실존 자체에 속한 것으로 보는 유머가의 시선과 같은 방향이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풍자는 유머가 아니라 아이러니에 가깝다. 탈춤에는 해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반 과장에서 말뚝이는 양반을 조롱하고, 노장 과장은 파계승을 비꼰다. 클리마쿠스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이렇게 구별한다.

아이러니가는 추상적 인간성 위에서 평평하게 고르고, 유머가는 추상적 하나님 관계 위에서 평평하게 고른다.

양반과 종을 같은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말뚝이의 웃음은 “추상적 인간성 위에서 평평하게 고르는” 아이러니다. 누구를 겨누지 않고 삶 전체의 모순을 향하는 웃음만이 유머다. 그러니 탈춤은 아이러니(풍자)와 유머(해학)가 한 마당에 함께 있는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공동체의 웃음과 단독자의 웃음은 다르다. 클리마쿠스에게 유머는 한 개인이 홀로 실존하는 방식이다. 탈춤의 웃음은 마당에서 함께 웃으며 맺힌 것을 풀어내는 공동체의 웃음이다. 클리마쿠스라면 이 “풀어냄”을 조심스럽게 볼 것이다. 그에게 종교적인 것의 핵심은 고난을 풀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카타르시스는 그의 틀에서는 오히려 미적인 것에 가깝다.

슬픔을 희극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흔히 해학을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클리마쿠스의 유머는 슬픔을 희극으로 바꾸지 않는다. 슬픔을 그대로 둔 채, 그것을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시도를 농담으로 거둬들일 뿐이다. 슬픔이 웃음으로 완전히 바뀌면 그것은 위로이고, 미적인 것이다. 슬픔과 웃음이 끝까지 함께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유머다.

이 구분은 탈춤을 보는 데도 쓸모가 있다. 좋은 해학일수록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 비애가 남는다. 미얄할미의 죽음 앞에서 웃던 관객이 집에 돌아가며 문득 먹먹해지는 것, 그것이 해학이 단순한 우스개와 다른 점이다. 클리마쿠스식으로 말하면, 그 먹먹함이 남아 있는 한 해학은 유머의 자리에, 곧 종교적인 것의 문턱에 서 있는 셈이다.


인용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제2부 제2편 제4장 A §2(SKS 7:407–410)를 직접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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