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배와 군함: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힘을 미리 달라는’ 회피

키르케고르의 『마음의 청결』(원제 『여러 정신의 건덕적 강화』 1부, 1847)에는 “한 가지를 원하는 것”을 가로막는 여러 ‘회피(Udflugt)’를 하나씩 들추는 대목이 있습니다. 회피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댑니다. “나중에 짓밟히면 누가 나를 돕겠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보잘것없다”, “처자식이 있어서 그럴 수 없다.” 그중 하나가 “나는 모든 것을 걸 만한 힘이 없다”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회피에 답하면서 짧은 비유 하나를 꺼냅니다. 깊은 바다로 나가는 군함과 연안을 오가는 작은 짐배입니다.

본문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걸 힘이 없다.” 이것도 회피입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을 빌린 회피입니다. 선은 요구를 그 사람이 가진 힘에 맞추어 셈하고 헤아릴 줄 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가 정직하게 모험하려 한다면, 결단하는 가운데 분명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리한 자는 회피를 빌려 힘을 미리 가지려 합니다. 힘을 헛되이 취하려는 것입니다. 전투에서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훈장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는 병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도 참되지 않습니다. 전투가 힘을 주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신뢰를 가지고 모험할 때 그 신뢰가 초인적인 힘을 준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뢰가 없는 자는 이것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 역시 확실합니다(오, 놀라운 정확성이여!). 보십시오. 큰 군함은 깊은 바다에 나가서야 비로소 자기 사명을 알게 되지만, 짐배는 모든 것을 미리 압니다. 영적으로 이해하면, 모든 것을 하려는 자만이 깊은 바다에 있습니다. 그가 가장 높은 자이든 가장 낮은 자이든 상관없습니다. 짐배는 영리한 자입니다. 그가 가장 높은 자이든 가장 낮은 자이든 상관없습니다.

(SKS 8, 190쪽. 필자 번역)

그림의 배경: 봉인된 명령서

이 비유는 키르케고르가 일기(JJ:369)에 적어 둔 관찰에서 나왔습니다.

“작은 짐배를 모는 선장은 대개 출항할 때 항로 전체를 미리 안다. 그러나 군함의 함장은 바다로 나가고, 깊은 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령을 받는다.”

당시 군함은 봉인된 명령서를 싣고 출항했습니다. 항구에서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모릅니다. 먼바다에 나가서야 명령서를 뜯어 임무를 확인합니다. 반면 연안을 오가는 짐배는 떠나기 전부터 목적지와 항로, 걸리는 시간까지 다 압니다.

짐배: 모든 것을 미리 알아야 움직이는 사람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영리한 자’가 바로 짐배입니다. 그는 목적지와 항로, 위험, 그리고 그 길을 갈 힘까지 전부 미리 확보한 뒤에야 움직이려 합니다. 바로 앞 문장의 병사처럼 훈장부터 받아 놓고 전투에 나가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코 깊은 바다로 나가지 않습니다. 늘 육지가 보이는 연안에만 머뭅니다. 안전하고 계산이 서지만, 정작 명령서가 열리는 자리에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걸 힘이 없다”는 말은 겸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이것은 순서를 뒤집은 요구입니다. 힘이 먼저 주어지면 걸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함: 먼저 출항하는 사람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은 군함입니다. 그는 결과를 모른 채 신뢰 하나로 먼저 출항합니다. 그러면 깊은 바다에서 비로소 사명을 받고, 결단하는 바로 그 순간에 힘을 받습니다. 키르케고르가 앞에서 “결단하는 가운데 힘을 얻는다”고 한 말이 이것입니다.

여기에는 덴마크어 말놀이도 있습니다. 군함이 깊은 바다에서 알게 되는 것은 Bestemmelse인데, 이 단어는 ‘목적지’이면서 동시에 ‘사명, 소명’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소명은 책상 앞에서 계산해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험하고 나간 뒤에야 주어집니다.

높은 자든 낮은 자든

키르케고르는 군함과 짐배를 설명하면서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가장 높은 자이든 가장 낮은 자이든 상관없다.”

군함이 크고 짐배가 작다고 해서, 위대한 사람은 군함이고 평범한 사람은 짐배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천한 사람도 모든 것을 걸면 군함입니다. 높은 사람도 계산만 하면 짐배입니다. 배의 크기가 아니라 출항하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이 말은 곧바로 다음 회피로 넘어가는 다리가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보잘것없다.” 키르케고르는 이 회피에 과부의 두 렙돈으로 답합니다. 선은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오직 ‘전부’를 요구합니다. 가진 것 전부였던 과부의 두 렙돈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모든 금과 같습니다.

“오, 놀라운 정확성이여!”

이 비유 바로 앞에서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신뢰가 초인적인 힘을 준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신뢰가 없는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도 확실하다고 말입니다.

연안의 짐배는 깊은 바다에서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험하지 않으니 모험에서만 주어지는 힘을 한 번도 확인하지 못하고, 그것을 근거로 “그런 힘은 없다”고 말합니다. 회피는 스스로를 증명하는 닫힌 원을 그립니다. 키르케고르가 ‘놀라운 정확성’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빈틈없는 구조입니다. 신뢰는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자기를 보여 줍니다.

맺으며

우리는 대부분 짐배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목적지를 알고, 항로를 확인하고, 연료가 충분한지 계산한 뒤에야 떠나려 합니다. 키르케고르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는 결코 깊은 바다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소명도, 그것을 감당할 힘도 출항한 뒤에야 봉인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번역 메모. 국내 번역본은 Skude를 ‘범선’으로 옮겼습니다. 이후에 개정판 번역이 나오면 이 부분은 정정하겠습니다. 1840년대에는 군함도 돛으로 가는 범선이었으므로, 이렇게 옮기면 두 배의 대비가 흐려집니다. Skude는 연안을 오가는 작은 짐배를 말합니다. 또 번역본의 “이 웃음은 거짓입니다”는 원문 dette Billede er usandt(이 비유는 참되지 않다)를 잘못 옮긴 것입니다. 이후에 번역본에서도 이 부분은 정정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마음의 청결” 168쪽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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