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키르케고르의 일기 소개합니다. Pap. VIII1 A 39 n.d., 1847

야이로의 딸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그런 일은 기적(miracle)이며,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가끔 의학(medical science)이 놀라운 일을 해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특별한 사례가 때때로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
야이로의 딸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기적이 아닌 것에 호소해야 할까요?

아니요,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과연 누구의 기쁨이
더 아름답고 하나님께 더 기쁘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자신의 소원이 성취된 사람—이 경우의 야이로(Jairus)—가
기적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간구가 거절된 고통을 조용히 감내하면서도,

부드럽게 감동되고 움직여
특별한 기쁨을 받은 이와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의 기쁨입니까?

과연 누구의 기쁨이 더 복된(blessed) 기쁨입니까?

소식(report)을 통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사람의 기쁨입니까,

아니면 그 소식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다시 떠올리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 속에서도 경건하게 세워지며(opbygges),

기적이 자연스러운 자리인
더 완전한 존재(Tilværelse)의 모습을 통해
위로와 형성을 받는 사람의 기쁨입니까?

누가 시인의 노래(poet’s song)를
더 합당하게 듣는 사람입니까?

시인이 노래하는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그러나 진정으로는 박탈된 것이 아닌—

곧 그 시인의 노래가 주는
영감(inspiration)을 누리는 사람입니까?


기적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 야이로의 딸과 존재(Tilværelse)의 계시

우리는 흔히 기적을 사건으로 이해한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낫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적을 둘러싼 논쟁은 언제나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그것을 과거로 밀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일은 옛날에나 있었지,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자연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일을 한다. 둘 다 기적을 제거한다. 하나는 그것을 시간 속에 가두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자연 속에 흡수시킨다. 그렇게 해서 기적은 더 이상 현재의 문제도, 존재의 문제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기적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이 기적은 누구를 드러내는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사건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시선은 그 사건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두 사람을 대비시킨다. 하나는 그 기적을 직접 경험한 야이로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 기적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누구의 기쁨이 더 아름다운가?

이 질문은 우리의 직관을 거스른다. 우리는 당연히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더 복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신의 간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그가 더 복된 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적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전환된다. 기적은 더 이상 “무엇이 일어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의 문제가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존재, 곧 Tilværelse에 도달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세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적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존재이다. 기적은 외적인 사건이지만, 참된 문제는 내적인 형성이다. 질투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가, 상실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이것이 기적보다 더 깊은 문제다.

따라서 기적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기적은 인간을 드러내는 시험이다. 어떤 이는 기적을 보고 기뻐하지만, 어떤 이는 그 앞에서 자신의 결핍과 불안을 드러낸다. 기적은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실존적 판별의 자리다.

이 점에서 계시의 의미도 다시 이해된다. 계시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숨겨져 계신다. 그러나 바로 그 숨김 속에서 인간이 드러난다. 믿는 자와 실족하는 자, 기뻐하는 자와 시기하는 자가 나뉜다.

계시는 하나님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야이로의 딸의 부활은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사건이지만, 키르케고르의 시선에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부활 없이도 서 있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결국 존재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금 이 삶에서 형성된 것이, 결국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기적을 본 사람인가, 아니면 기적 없이도 서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 앞에서 기적은 더 이상 외적인 놀라움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드러내는 거울이며, 나를 시험하는 자리이며, 나를 형성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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