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시험을 위하여》 모토
다음 본문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이해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자리 가운데 하나다.
Herrens Frygt)을 알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얻고자 힘씁니다”(고린도후서 5:11).
그러나 처음부터, 곧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을 얻고자 하는 것(at ville vinde Mennesker), 이것은 어쩌면 경건하지 못한 것(Ugudelighed)일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든 세속성(Verdslighed)이지, 기독교(Christendom)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at frygte Gud)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니, 먼저 당신의 노력(Stræben)이,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드러내게 하십시오.— 이것이 제가 힘써 온 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여, 제가 단 한 사람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제 삶이 (왜냐하면 입의 “장담”(“Forsikkring”)은 기만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얻은 것(Alt vundet)”1임을
제가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반대로, 제가 모든 사람을 얻는다 하더라도—
만일 제 삶이 (왜냐하면 입의 “장담”(“Forsikkring”)은 기만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잃은 것(Alt tabt)”임을
제가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
무엇이 참된 두려움인가
그는 사도 바울의 말, “우리가 주님의 두려움(Herrens Frygt)을 알므로 사람들을 얻고자 한다”(고후 5:11)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곧바로 그 의미를 전복한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전도나 설득의 정당화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정반대로 말한다. 처음부터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at ville vinde Mennesker)—그것은 어쩌면 경건하지 못한 것(Ugudelighed)일 수도 있으며, 최소한 세속성(Verdslighed)이지, 결코 기독교(Christendom)가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하느냐이다. 사람을 얻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출발점이 되는 순간, 이미 방향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향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이 질서의 전도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기독교는 어떤 영향력의 확대나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먼저 요구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상태다. 즉, Stræben(노력)—인간의 전 존재를 건 지향과 노력—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모든 것을 얻기 위한 기도
이렇게 설명을 마친 뒤, 키르케고르는 논증을 이어가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기도로 들어간다. 이 전환은 단순한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진리의 자리 이동을 의미한다. 설명은 인간에게 전달되지만, 진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확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이해가 아니라 판정이다.
기도 속에서 제시되는 기준은 극단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철저하다. 한 사람도 얻지 못했을지라도, 삶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얻은 것(Alt vundet)”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을 얻었다 하더라도, 삶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Alt tabt)”이다. 여기서 모든 인간적 평가 기준은 무효화된다. 성공과 실패, 영향력과 결과, 확장과 성취는 더 이상 결정적 의미, 궁극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 전복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다. 심판의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과를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를 보신다. 인간은 말과 선언, 곧 “장담”(Forsikkring)을 신뢰하지만,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기만적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말은 언제든지 존재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말할 수는 있지만, 신앙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참된 심판은 오직 삶에서만 이루어진다. 삶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이 한 가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가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이해는 오늘날의 종교적 감각과 날카롭게 충돌한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를 사람을 변화시키고, 설득하고, 확장하는 운동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서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일이다. 사람을 얻는 것은 부수적인 결과일 수는 있어도, 결코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목적이 되는 순간, 기독교는 이미 자기 자신을 상실한다.
결국 이 본문은 하나의 결단을 요구한다. 나는 사람을 얻고자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결과를 기준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존재의 진실성으로 살아가는가. 이 질문 앞에서 더 이상 중간지대는 없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에게서 기독교는 언제나 전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체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요약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그것이 있다면, 이미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것을 얻었다 해도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