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한 삶의 단편 — A의 서류 / B의 서류(그리고 A에게 보내는 편지들)


1) 왜 이 책이 “가명 저작의 시작”인가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키르케고르가 본격적으로 가명 저작을 시작한 작품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빅토르 에레미타(Victor Eremita)가 편집자로 등장하여, 어떤 서랍에서 발견한 원고 묶음을 “편집해 내놓는다”는 형식을 취합니다. 이 장치 덕분에 독자는 처음부터 ‘저자’를 붙잡고 읽기보다, 문서 자체가 보여주는 삶의 형태를 따라가게 됩니다.

키르케고르는 의도적으로 독자를 ‘작가의 권위’에서 떼어 내고, 독자 스스로가 자기 삶의 자리에 서서 묻게 하십니다. “누가 썼는가”보다 “이 글이 내 삶을 어떻게 드러내는가”가 중심이 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2) “두 권짜리 800쪽”의 충격과 ‘전체 설계’

당대 독자들은 이 작품의 방대한 분량과 파편적인 구성에 당황했습니다. 에세이, 단상, 서사, 희곡 비평, 유혹자의 일기, 편지 형식이 뒤섞여 있어서 “산만하고 길며 정리되지 않은 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이 작품에 대해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계획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각 글은 따로 노는 조각이 아니라, 한 권 전체가 하나의 기획이며 더 크게는 그의 저작 전체 흐름 속에서 한 부분을 이룹니다. 이 책을 ‘단편 모음집’으로만 읽으면 핵심이 빠지고, “전체 속의 부분”으로 읽을 때 의도가 드러납니다.


3) 목적: ‘헤겔 체계’와 ‘시대의 선입견’에서 독자를 끌어내기

키르케고르는 이 책을 통해 당대에 널리 퍼진 헤겔적 체계 사고의 영향에서 독자를 끌어내고자 했습니다. 체계는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지만, 그 과정에서 한 개인의 삶(실존), 결단, 죄책, 책임, 하나님 앞의 단독자성이 희미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계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문서’들—감정, 반성, 유혹, 절망, 선택, 책임—을 독자 앞에 펼쳐 놓고, 독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직접 대면하도록 이끕니다.


4) “Either/Or”가 뜻하는 것: 선택의 문제를 ‘삶의 구조’로 만들기

제목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크게 두 층위를 가집니다.

  1. 체계 철학의 ‘둘 다’(매개·종합)에 대한 도전 헤겔의 변증법은 종종 ‘정반합의 종합’으로 설명되며, 모든 대립이 높은 통일로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삶의 핵심 순간들—사랑, 결혼, 책임, 신앙—이 단순한 “종합”으로 해결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결단을 요구하는 ‘Either/Or’로 다가온다고 봅니다.
  2. 심미적 삶과 윤리적 삶의 대비 이 책은 1부(A의 서류)에서 주로 심미적 삶을, 2부(B의 서류, 판사 빌헬름)에서 윤리적 삶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키르케고르가 최종적으로 말하는 ‘절대적 Either/Or’는 단지 심미/윤리의 선택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훗날 더 근본적으로 인간적 삶(심미+윤리)과 종교적 삶 사이의 선택을 문제 삼습니다. 이 책은 그 큰 흐름의 시작점입니다.

5) 1부(A): 심미적 삶 — “순간, 재현, 회상”의 세계

1부의 A는 단상(디아프살마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분석, 비극론, 우울의 심리학적 스케치, 권태론(윤작),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혹자의 일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심미적 실존’을 보여줍니다.

  • 심미적 삶은 순간의 매혹에 강합니다.
  • 그러나 그 순간은 지속되지 않기에, 삶은 곧 회상(기억)의 미학으로 넘어갑니다.
  • 그래서 A의 세계는 “현재를 살지만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긴장을 품습니다.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심미를 단순한 ‘쾌락주의’로 그리기보다, 굉장히 지적이고 반성적인 형태—세련된 관찰, 냉소, 예술적 감수성, 우울과 권태—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더 쉽게 A에게 “공감”하게 되고, 그만큼 더 깊이 흔들리게 됩니다.


6) 2부(B): 윤리적 삶 — 선택, 책임, 결혼(반복)의 문제

2부에서 판사 빌헬름(B)은 A에게 편지를 쓰며, 심미적 삶의 핵심 결함을 지적합니다. A의 삶은 선택을 미루고, 가능성을 열어 둔 채로 머무르며, 결국 “결정적인 삶”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B에게 중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선택은 단지 취향이 아니라, ‘나 자신을 형성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윤리적 삶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 선택은 나를 하나로 묶어 세웁니다.
  • 선택은 책임을 낳고, 책임은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듭니다.
  • 그 지속의 핵심 개념이 바로 반복(Commitment)입니다.

B가 결혼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혼은 단지 제도가 아니라, 사랑이 시간 속에서 지속되도록 만드는 윤리적 형식입니다. A가 붙드는 회상(recollection)의 사랑이 “지나간 것의 아름다움”이라면, B가 말하는 결혼/반복은 “지금-여기에서 계속되는 사랑”입니다.


7) 마지막 ‘Ultimatum’: 윤리의 끝에서 종교의 문턱으로

2부 끝에는 ‘목사의 설교’로 제시되는 짧은 강화가 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언제나 잘못이 있다(틀리다)”는 사유는 윤리적 보편성의 언어로 말해지지만, 동시에 독자를 윤리 너머—즉 하나님 앞의 관계—로 이끌어 갑니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이 책은 종교성을 본격적으로 다루기보다, 종교적 차원이 불가피하게 호출되는 자리까지 독자를 밀어 붙입니다. 그래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심미 vs 윤리”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그 대립을 통과해 결국 종교적 실존을 예고하는 책입니다.


8) 정리: “권위 없이, 더 내면적으로 읽게 하려는 책”

키르케고르는 훗날 자신의 저작을 “제단 아래”로 이끄는 길로 회고하며, 자신을 진리의 증인이 아니라 “권위 없이” 단지 더 내면적으로 인간 실존의 원문을 다시 읽어 보려 한 시인·사상가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시작점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입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정답을 주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묻게 합니다.

  • 나는 지금 심미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나는 선택을 미루는 방식으로 삶을 ‘연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 나는 윤리적 결단(반복)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려 하고 있습니까?
  • 그리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은 무엇입니까?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이렇게 한 사람의 존재를 흔들어 깨우는 책입니다.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전 저작은 이 “깨움”이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키르케고르 《이것이냐 저것이냐》 초기 육필 원고 설명

1.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초기 초안

이 자료는 키르케고르의 대표적인 가명 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의 초기 구상 단계에서 작성된 육필 초안입니다. 기록의 제목은 Spredte udkast til EE로, 직역하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대한 흩어진 초안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문서는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작품을 집필하기 이전에 남겨진 단편적인 메모와 구상 노트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2. 원고의 물리적 구성

이 초안은 두 장의 폴리오 용지(folio)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개의 잎(8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총 4장
  • 페이지 번호 없음
  • 종이 크기: 약 218 × 266 mm
  • 종이 종류: post-velin 종이

여러 장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글이 쓰여 있지 않고 빈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페이지들은 글이 없는 상태입니다.

  • [1v]
  • [2v]
  • [4v]

이는 이 원고가 완성된 초고가 아니라 단편적 구상 메모였음을 보여줍니다.


3. 원고에 나타나는 초기 제목들

이 초안에는 이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주요 주제로 발전하게 되는 몇 가지 제목이 등장합니다.

① 첫 페이지 제목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Enten – Eller / et Fragment”

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 하나의 단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나중에 책의 부제인 “Et Livs-Fragment”(한 삶의 단편)으로 발전합니다.


② 「유혹자와 유혹당한 자」

다른 페이지에는 다음 제목이 등장합니다.

“Forføreren og den Forførte”(유혹자와 유혹당한 자)

이 주제는 이후 《이것이냐 저것이냐》 1부의 가장 유명한 부분인 〈유혹자의 일기〉(Forførerens Dagbog)와 직접 연결되는 아이디어입니다.


③ 「유혹당한 자의 편지」

또 다른 페이지에는 다음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Brev fra den Forførte”(유혹당한 자의 편지)

이 역시 유혹자의 이야기 구조와 관련된 초기 구상으로 보입니다.


④ 결혼에 대한 문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짧은 문장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Men Ægteskab er umulig uden Fortrolighed.”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친밀함 없이 불가능하다.”

이 문장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2부에서 등장하는 결혼과 윤리적 사랑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는 중요한 단서로 볼 수 있습니다.


4. 수정 흔적과 메모

이 원고에는 여러 추가 기록과 수정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 문장 위나 아래에 추가된 문구
  • 여백에 적힌 메모
  • 연필로 적었다가 지운 표현

등이 발견됩니다.

특히 「Forføreren」이라는 제목이 한 번 연필로 추가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지워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한 페이지에는 펜 테스트와 얼굴 옆모습 스케치도 발견됩니다. 이러한 흔적들은 키르케고르가 이 종이를 생각을 정리하는 작업 노트처럼 사용했음을 보여 줍니다.


5. 원고를 보관한 봉투

이 초안들은 별도의 종이 봉투 안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 봉투는

  • 리브가 있는 종이(ribbet papir)
  • 조개 모양의 워터마크
  • “Holland”이라는 표시

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봉투에는 두 개의 붉은 밀랍 봉인이 있으며, 그 봉인에는 키르케고르의 인장 “SK”가 찍혀 있습니다.


6. 키르케고르가 붙인 제목

봉투 바깥쪽에는 키르케고르 자신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습니다.

“De første Rudimenter til Enten – Eller. den grønne Bog. nogle Enkeltheder som ikke bleve brugte.”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최초의 기초 메모들. ‘초록색 책’. 사용되지 않은 몇 가지 세부 사항.”

이 기록은 키르케고르가 이 원고들을 초기 구상 자료로 보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7.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

이 육필 원고는 단순한 초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자료는 다음 사실을 보여 줍니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처음부터 완성된 구조로 쓰인 것이 아니라
  • 여러 단편적인 아이디어에서 점차 발전한 작품이라는 점

또한 여기에는 이미 다음과 같은 핵심 주제들이 등장합니다.

  • 유혹
  • 사랑
  • 결혼
  • 심미적 삶
  • 윤리적 삶

이 주제들은 이후 키르케고르의 철학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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