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영혼을 얻는다는 것(At erhverve sin Sjel).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의 영혼(Sjel)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까? 그리고 사람에게 자신의 영혼으로 온 세상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사용하여 자기 영혼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이것이 참된 구원의 길잡이(Anviisning til Salighed)가 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벌거벗은 채 태어나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들(Betingelserne for Livet)이 모든 것을 준비해 둔 다정한 모습으로 사람 앞에 나타나든, 아니면 사람이 그것들을 힘겹게 스스로 찾아내야 하든,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의 조건들을 얻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어떤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어 모든 일에 무능하게 한다고 해도, 더 현명한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압니다. 곧 삶은 얻어야 하는 것이며, 인내(Taalmodighed)로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내하라고 권합니다. 인내는 사람이 삶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누구에게나 필요한 영혼의 힘(Sjelens Styrke)이기 때문입니다.

먼 목적지를 향해 가는 나그네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서두르지 않습니다. 저녁이 다가올 때마다 인내하며 쉬고, 다음 날 다시 길을 계속 갑니다.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은 처음부터 무리하여 자신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짐을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아 쉬다가, 그것을 다시 질 힘을 얻습니다.

자기 땅을 인내하며 경작하는 사람은 추수 때가 올 때까지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기다립니다. 장사로 생계를 얻는 사람은 상품 곁에 앉아 구매자가 찾아오기를, 또 그가 값을 치르기를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새를 잡으려고 그물을 펼쳐 놓은 사람은 온종일 저녁이 되기를 기다리고, 저녁이 되면 새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그물 곁에 인내하며 앉아 있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은 긴 하루 동안 낚싯줄을 드리우고 인내하며 앉아 있습니다.

자녀에게서 기쁨을 얻으려는 어머니는 아이가 빨리 자라기를 요구하지 않고, 잠 못 이루는 밤과 걱정스러운 낮을 보내며 인내로 기다립니다. 사람들의 호의를 얻으려는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며, 조급함(Utaalmodighed) 때문에 그 호의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게 보이는 것에 관해 말하려는 사람도 처음부터 너무 서두르다가 나중에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며 인내로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원래 일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일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좋고 유익하다고 여기며,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형성되도록 내맡깁니다. 삶을 바라볼 때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혼란과 손해만 초래하는 거칠고 억제되지 않는 격정적 분출보다 이러한 태도를 더 낫게 여깁니다.

그들이 말하는 조건(Betingelsen)은 인간의 바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조건은 인내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엄밀히 말해 인내 자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갈망하던 것(Det Attraaede)을 얻습니다.

이처럼 조건에는 참으로 많고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혼도 이와 같은 하나의 조건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사람이 세상에 벌거벗은 채 와서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영혼조차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생각도 어떤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살아갈 능력마저 잃게 할 수 있었다면, 이 생각은 어떻게 모든 사람을 근본에서부터 조급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삶의 가장 깊은 토대에서 삶의 전제(Forudsætning)가 되는 바로 그것을 평생에 걸쳐 얻어야 한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도대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므로 인내는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도 짧아서 두렵게 느껴지고, 너무도 하찮아 보여 거의 주의를 기울일 가치조차 없어 보였던 그 말씀이, 이제는 그 짧음 속에서 너무나 깊은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말씀은 마치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작품과 철학의 부스러기와 관련성

관련이 있다. 다만 두 저작의 조건(Betingelsen)을 완전히 같은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인내로 자기 영혼을 얻는다는 것」은 이듬해의 『철학의 부스러기(Philosophiske Smuler)』에서 전개될 문제의 구조를 미리 보여 준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다.

「인내로 자기 영혼을 얻는다는 것」은 1843년에 발표되었고, 『철학의 부스러기』는 1844년 6월 13일에 출간되었다. 따라서 전자가 후자의 논의를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후자의 사유를 예비한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의 부스러기』 출판 경위

공통되는 역설

두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역설적 구조가 있다.

인간은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새롭게 얻어야 한다.

「인내로 자기 영혼을 얻는다는 것」에서는 영혼(Sjel)이 인간 삶의 가장 근원적인 전제(Forudsætning)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평생에 걸쳐 얻어야 할 과제(Opgave)가 된다.

보통 사람은 인내를 이용하여 외적인 대상을 얻는다.

  • 농부는 인내하여 수확을 얻는다.
  • 상인은 인내하여 이익을 얻는다.
  • 어머니는 인내하여 자녀에게서 기쁨을 얻는다.

이 경우 인내(Taalmodighed)는 수단이고, 얻고자 하는 대상은 인간 밖에 있다. 그러나 “인내로 자기 영혼을 얻으라”는 말씀에서는 구조가 뒤집힌다. 인간이 얻어야 할 것은 외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든 행위의 주체이자 전제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자신의 영혼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이미 ‘나’가 있어야 하는데,
정작 그 ‘나’를 이루는 영혼을 아직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인간이 영혼을 물건처럼 전혀 소유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영혼을 존재론적으로 받았지만, 아직 그것을 실존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영혼은 동시에 선물(Gave)이자 과제(Opgave)**이다.

『철학의 부스러기』의 조건

『철학의 부스러기』에서도 비슷한 역설이 나타난다. 거기에서 조건(Betingelsen)은 단순한 외적 여건이 아니라, 진리(Sandheden)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내적 능력 또는 가능성이다.

소크라테스적 관점에서는 학습자가 이미 자기 안에 진리를 이해할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는 일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회상하는 것(Erindring)이다.

그러나 『철학의 부스러기』가 제시하는 기독교적 가설에서는 인간이 그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조건을 상실했으며, 이러한 상태를 키르케고르는 죄(Synd)라고 부른다. 따라서 스승은 진리만 가르쳐서는 안 되고, 진리를 이해할 조건까지 주어야 한다.

“스승은 곧 조건을 주고 진리를 주는 신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스승을 구원자(Frelser), 해방자(Forløser), 화해자(Forsoner)라고 부른다. 『철학의 부스러기』 본문

두 저작의 관계와 차이

「인내로 자기 영혼을 얻는다는 것」『철학의 부스러기』
인간은 영혼을 지녔지만 그것을 실존적으로 얻어야 한다인간은 진리를 이해할 조건을 상실했다
영혼은 삶의 전제이면서 삶의 과제이다조건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전제이다
영혼은 인내(Taalmodighed) 가운데 얻어진다조건은 신(Guden)이 결정적 순간(Øieblikket)에 준다
강조점은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지속적 과정이다강조점은 인간이 스스로 줄 수 없는 은총과 새로운 탄생이다
시간적 지속과 인내가 중심이다신과 인간이 만나는 순간과 신앙이 중심이다

그러므로 두 개념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이 설교의 **영혼(Sjel)**을 『철학의 부스러기』의 **조건(Betingelsen)**과 그대로 등치해서는 안 된다. 전자에서 영혼은 얻어야 할 대상이고, 후자에서 조건은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신적 선물이다.

그러나 양자를 관통하는 근본 사유는 같다.

인간은 자기 구원의 근거를 이미 완성된 소유물로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얻으려 하지만, 먼저 자기 자신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얻는 일조차 단순한 자기 생산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내와 믿음 속에서 받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이 대목은 『철학의 부스러기』의 조건 개념을 직접 제시한다기보다, 다음의 역설을 예비한다.

삶의 전제는 인간이 처음부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받아들이고 실현해야 할 과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내로 자기 영혼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참을성을 길러 인격을 완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율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보존하며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운동이다. 이 사유가 『철학의 부스러기』에서는 “인간은 진리를 이해할 조건마저 신에게 받아야 한다”는 더욱 급진적인 형태로 발전한다고 볼 수 있다.

Categories: 작품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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