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Repentance)

무한성의 운동은 회개에서 가장 깊이 표현된다. 회개는 인격적인 신 관계의 출발점이다. 누구도 죄를 지은 자이자 회개하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신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와 그의 여러 가명 저자들은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예컨대 빌헬름 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에 대한 사랑에는 절대적인 특징이 있다. 그 표현이 바로 회개이다. 이에 견주어 볼 때 다른 모든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2부, 222쪽

키르케고르는 『가상적 상황에 관한 세 담론』의 첫 부분인 「결정적 상황에 관한 생각」에서도 누구든 “죄인이 되지 않고서는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한다(25쪽). 또한 일기에서는 “신을 따르는 슬픔은 본질적으로 회개이다”라고 쓴다(IX A 345).

그러나 “인간의 가장 높은 내적 행위가 회개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무한성의 운동으로서 회개는 여전히 “부정적 운동”이다(『인생길의 여러 단계』, 430쪽).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긍정적 운동의 전제가 된다. 그 긍정적 운동이란 곧 “종교적인 것의 역설이 돌파해 나오는 일, 다시 말해 신앙이 응답하는 속죄”이다(IV A 112). 따라서 긍정적 운동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주는 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신이다.

회개는 심미적 영역에서 윤리적·종교적 영역으로 넘어가게 한다. 회개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종교적 영역에 속한다(『후서』, 463쪽 참조). 키르케고르는 여러 곳에서 이러한 이행을 묘사한다. 예컨대 빌헬름 판사는 사람이 자기 존재 전체를 회개함으로써 심미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이것이냐 저것이냐』 제2부, 229쪽). 이러한 회개는 윤리적 관점의 전제가 된다.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회개를 심미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경계로 말한다. 그는 종교적인 것에 이르기 전에 멈추어 서서 악마적인 회개가 되어 버리는 형태의 회개도 언급한다(106쪽 이하).

회개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불안의 개념』에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102쪽 이하). 『인생길의 여러 단계』에서 크비담(Quidam)은 자신이 보편적인 것을 실현하지 못하게 막는 불행이 운명인지 죄책인지 하는 문제와 씨름한다. 키르케고르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던 이것은 여기서 “유죄인가?”와 “무죄인가?”라는 형태로 제시된다(179쪽).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회개가 “변증법적으로 결말에 이르지 못하도록 저지된다”(같은 책, 404쪽).

키르케고르는 회개의 문제를 여러 교훈적 저술에 두루 엮어 넣는다. 특히 『다양한 정신으로 전한 건덕적 담론』 제1부인 『마음의 청결』에서 그는 인간의 고백이 언제나 회개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은 계속해서 “오직 한 가지만을 뜻하는 것”에 실패하므로, 끊임없이 회개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명한다(37쪽 이하, 216쪽 이하).

여기서 유의할 점은 키르케고르가 추상적인 방식의 회개를 경계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는 사람이 어떤 특정한 죄 하나에 낙담한 채 붙들려 있는 것도 경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잘것없는 일반성에 대해 회개한다는 것은 지극히 깊은 열정을 피상적인 것들의 잔치에 내놓는 것과 같은 모순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범죄를 뉘우치는 데 계속 매달리는 것은 신 앞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책임 아래 회개하는 것이며, 우울한 자기애 속에서 자기 정신의 결단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가상적 상황에 관한 세 담론』 중 「결정적 상황에 관한 생각」, 34쪽

그럼에도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언제나 개별적인 죄들을 회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만이 죄란 “죄 자체의 연속성에 관하여 신 앞에서 갖는 이해”임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30쪽). 키르케고르는 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속성”이라고도 부른다(같은 책, 33쪽).

회개에 관한 논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두려움과 떨림』, 『불안의 개념』, 『가상적 상황에 관한 세 담론』, 『인생길의 여러 단계』, 『후서』, 『다양한 정신으로 전한 건덕적 담론』 제1부 『마음의 청결』, 『사랑의 역사』, 『그리스도교 담론』, 『죽음에 이르는 병』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회개와 관련된 키르케고르의 일기

AA:12[IA81]

도덕주의자들(Moralisterne)1이 생각하듯, 심지어 회개(Anger)마저 내던져 버리면서 그렇게 성급히 앞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물질적 세계(den physiske Verden)에서도 안개(Taagen)가 고요한 기도(Bøn)처럼 땅에서 피어올랐다가, 기도가 응답받은 듯 상쾌한 이슬(Dug)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는가?

해설

요지는 회개(Anger)는 당장 선하게 행동하라는 도덕적 명령에 앞서 인간 내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바더(Baader)가 비판하는 도덕주의자들(Moralisterne)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난 잘못을 붙들고 회개하지 말고, 이제부터 곧바로 선한 행동을 하라.”

하지만 바더와 여기의 키르케고르는 그것이 악한 나무에게 뿌리는 그대로 둔 채 당장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양심의 명령(Imperativ)은 “너는 선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를 해결하거나 그를 실제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명령은 오히려 인간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회개(Anger)가 필요하다. 회개는 단순히 과거에 붙잡혀 자책하는 것(Selbstzerknirschung)이 아니다. 자신의 죄와 무능을 인정하고, 악의 뿌리가 제거되어 새로운 선이 생겨나도록 자신을 종교적 변화에 맡기는 과정이다. 바더가 구원을 명령법(Imperativ)이 아니라 ‘여격’(Dativ)에서 찾는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주어지고 인간이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뜻이다.

키르케고르의 안개와 이슬 비유도 같은 의미다.

  • 안개가 땅에서 올라감 → 회개와 기도(Bøn)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향함
  • 이슬이 되어 돌아옴 → 그 기도가 응답되어 은혜와 새로운 생명이 주어짐

따라서 “성급히 앞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은 과거에 끝없이 매달리라는 뜻이 아니다. 회개를 건너뛴 채 곧바로 도덕적인 인간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회개는 버려야 할 정체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은혜를 받아 새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필수적인 매개다.


Not7:1[IIIA85]

우리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할수록
우리는 지옥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이내 우리는 불길처럼 흐르는 물결을 느끼고,
곧 그 속에 빠져 죽고 만다.
그 불길은 우리 몸에서 살을 갉아먹으며,
세월을 보내는 동안 몸은 황폐해진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있다!
세계는 하나님이다!

오, 인간이여, 인간을 놓아 버리지 말라.
네 죄(Sünde)가 아무리 크더라도
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Sehnsucht nach den Sünden)만은 피하라.
그러면 너는 여전히 많은 은혜(Gnade)를 발견할 수 있다.
누가 은혜의 크기를 다 헤아렸겠는가?
인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잊을 수 있다.

《돌로레스 백작부인》(Die Gräfinn Dolores), 제2권, 260쪽.

  1. 왜냐하면 회개(Angeren) 속에도 죄를 향한 갈망(Længsel efter Synden)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가 사람을 일깨우기(opvækkende)보다 관조적으로 마비시키는 것(contemplativt bedøvende)에 가까울 때 그러하다.

Not13:13[IVC19]

그리스 미학(den græske Æsthetik)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Ethiken) 제3권 제2장에서 한 말은 주목할 만하다.

“무지(Uvidenhed)에서 비롯된 행위는 그 자체로는 자발적인 행위(frivillig)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쾌감(Misfornøielse)을 동반하고 나중에 회개(Anger)를 불러일으킬 때에만 완전히 비자발적인 행위(ganske ufrivillig)로 간주될 수 있다.”2

그런데 그 행위가 회개를 불러일으킨다면,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자발적인 행위로 이해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경우에만 그 행위를 비자발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말은 신약성경에서 ‘회개’의 중심어로 쓰이는 단어와는 다르다. 다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뉘우침’ 계열의 단어와는 같은 어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τὸ ἐπίλυπον καὶ ἐν μεταμελείᾳ
“고통을 느끼며 후회·뉘우침(metameleia) 가운데 있는 것”

여기서 사용된 명사는 μεταμέλεια(metameleia)다. 뜻은 대체로 “뒤늦은 유감, 후회, 뉘우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종교적인 회심이 아니라, 행위자가 자신이 한 일을 뒤늦게 괴로워하는 심리적 반응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10b 원문

반면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적 ‘회개’를 나타내는 중심어는 다음과 같다.

  • μετάνοια(metanoia): 회개, 마음과 방향의 전환
  • μετανοέω(metanoeō): 회개하다

예를 들면 “회개하라”(마 3:2; 행 2:38),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막 1:4) 등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단순히 잘못을 후회한다는 의미보다, 하나님을 향해 생각과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뜻한다. 신약의 μετάνοια 용례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μεταμέλεια와 같은 어족인 동사 μεταμέλομαι(metamelomai)도 신약성경에 나온다. 개역개정은 이를 대체로 “뉘우치다” 또는 “후회하다”로 번역한다.

  • 마태복음 21:29: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나”
  • 마태복음 21:32: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 마태복음 27:3: 유다가 “스스로 뉘우쳐
  • 고린도후서 7:8: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따라서 관계를 정리하면 이렇다.

아리스토텔레스신약성경기본 의미
μεταμέλειαμεταμέλομαι와 같은 어족행한 일을 뒤늦게 후회하고 괴로워함
μετάνοια / μετανοέω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전환과 회개

그러므로 해당 구절의 Anger는 “기독교적 회개(metanoia)”보다는 후회·뉘우침(metameleia)으로 번역하는 편이 정확하다.

키르케고르가 흥미롭게 여기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뉘우침은 그 행위가 “비자발적이었다”는 증거다. 즉 “그가 알고서 원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뒤늦게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문제가 생긴다. 내가 그 행위를 ‘나의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회개하겠는가? 회개는 책임을 없애기보다 자신에게 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노트에서 키르케고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회(metameleia) 개념과 기독교적 회개(metanoia) 사이의 간극을 포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회개(Anger)를 비자발성의 증거로 삼는 논리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이렇다.

무지에서 행한 뒤 고통과 후회(metameleia)를 느낀다면, 그 행위는 완전히 비자발적인 것(ἀκούσιον)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는 이것이 거꾸로 보인다.

내가 그 행위를 회개한다는 것은 그것을 단순한 사고나 타인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나의 행위’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회개는 “나는 몰랐으므로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설령 무지했더라도 그것을 행한 존재가 나였다는 사실 앞에 서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책임을 면제하는 표지가 아니라 책임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키르케고르의 문장도 바로 그 역전을 지적한다.

“그 행위가 회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자발적’이라는 말은 “내가 그 결과를 의도적으로 원했다”는 좁은 뜻은 아니다. 그 행위를 나 자신의 실존과 자유에 귀속시킨다는 뜻에 가깝다. 사실관계의 차원에서는 무지 때문에 비자발적일 수 있지만, 회개의 차원에서는 그 행위를 자기 책임으로 인수한다.

그래서 양자의 관점은 이렇게 엇갈린다.

  • 아리스토텔레스: 회개한다 →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 비자발적이다.
  • 키르케고르: 회개한다 → 그것을 나의 행위로 인정한다 → 책임 있는 자유의 행위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비자발적”이라는 용어 하나가 아니라, 회개를 책임 감면의 근거로 해석하는 윤리적 틀이다. 그에게 회개는 변명하지 않고 자기 죄 앞에 단독자로 서는 일이다. 다만 이것은 행위 당시의 고의성을 사후에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 행위의 도덕적 책임을 실존적으로 떠맡는다는 뜻이다.


VI B 173 n.d., 1844-45, 덴마크어 서지사항 없음

회개(Anger)의 불과 고발하는 양심(den anklagende Samvittighed)은 물로도 끌 수 없었던 그리스의 불(græsk Ild)과 같다. 이 불 역시 오직 눈물(Taarer)로만 끌 수 있다.


NB2:90[VIII¹ A 203]

그레고리우스 8세(Gregor VIII)는 말한다.

참회(Bod)란 이미 지은 죄들(de begangne Synder)을 눈물로 슬퍼하고, 그렇게 눈물로 슬퍼한 죄들을 더 이상 짓지 않는 것이다.

NB2:91[VIII¹ A 204]

이 이야기는 매우 뛰어나다.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한 성직자(Geistlig)가 세속인(Verdslig)인 척하고 방탕한 여자(letfærdigt Fruentimmer)를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그녀가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오. 내가 성직자인데, 이 일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소?”

그러자 여자는 그를 여러 곳으로 데리고 다니지만, 사제(Præsten)는 어느 곳도 충분히 안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마침내 여자가 그를 아주 외딴곳으로 데려가 말한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어요. 하나님만 빼고요.”

성직자가 말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여기 있는 우리를 보실 수 있단 말이오? 내가 나를 보지 않기를 가장 바랐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는데!”

아브라함 아 산크타 클라라(Abraham a Sancta Clara), 《전집》(Sämtliche Werke), 린다우, 1845년, 제15권, 54–55쪽.

이 일기에 대한 해설은 다음을 참고하라.


NB7:86[IX A 345], 1849년

세상을 따르는 근심(Sorgen efter Verden)은 그 자체가 죄(Synd)다.3 그런데도 사람은 이 슬픔(Sørgmodighed) 속에서 자주 자신을 대단히 중요한 존재로 여기거나, 그렇게 되어 버린다.

하나님을 따르는 근심(Sorgen efter Gud)은 본질적으로 회개(Angeren)다. 슬픔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면, 그 슬픔을 조금 밀어 내기 위해 회개가 개입해야 한다.

사람이 슬픔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하던 것도, 회개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죄책의 관계(Skyldens Forhold til Gud)를 분명히 드러내면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벌하신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슬픔 속에서 지나치게 조급해지면, 하나님은 그가 이런저런 죄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신다. 이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회개가 개입해야 한다. 이제 그에게는 정말로 눈물 흘려야 할 것이 생긴 것이다.


NB11:207[X¹ A 515]

그리스도교적인 것(Det Christelige)의 모든 것이 얼마나 죽어 있고 외면적이며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는지는, 이를테면 로테(Rothe)의 《교회력에 관하여》(om Kirkeaaret)4 같은 책을 우연히 펼쳐 볼 때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림절(Advent)의 복음서 본문들은 세례 요한(Johannes Døber)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져왔는데, 참된 참회(Bod)를 통해서만 그 큰 축일을 합당하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 어디에서나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이런 글을 마치 무용 교사가 춤추는 방법을 설명한 지침서처럼 읽는다.

한 쌍이 앞으로 나와 동작을 하고, 이어서 모두 줄을 지어 춤춘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6

사람은 대림절 넷째 주일(4de Søndag i Advent)에는 참회하고(bodfærdig), 성탄절 첫날(første Juledag)에는 성탄의 기쁨에 젖는다(juleglad).7 그렇다면 옛날에 ‘고기 주일’(Fleske-Søndag) 또는 ‘기름진 화요일’(fede Tirsdag)이라고 불렀던 날에는 사람은 또 어떤 상태가 되는가?8


NB15:31[X² A 360]

복음은 말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Guds Rige)를 구하라.”

그러나 경험(Erfaring)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렇다. 사람들은 온갖 다른 곳에서 자신의 평안과 기쁨을 찾아본 뒤에야, 마침내 가장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한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일에 성공하려면, 그는 회개하면서(angrende) 시작해야 한다.


※ 마태복음 6장 33절의 개역개정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각주

  1. “도덕주의자들이 …… 생각하듯”(som Moralisterne … mene): 프란츠 폰 바더(Fr. Baader)의 《사변적 교의학 강의》(Vorlesungen über speculative Dogmatik) 제1분책 제15강([41,29]), 제1분책 96쪽을 참조하라.
    “종교(Religion)는 인간 안에 있는 악한 나무의 뿌리를 어떻게 제거하고 그 안에 선한 뿌리를 새로 자라게 할 것인지를 가르친다. 종교가 요구하는 모든 행위는 오직 이 목적을 지향한다. 반면 비종교적인 도덕주의자들(irreligiösen Moralisten)은 선하지 않은 나무에게 지금 당장, 바로 그 상태로 선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실로 기이한 일은, 우리 시대의 이 새로운 도덕철학자들이 어떻게 종교를 도덕, 곧 이른바 도덕적 명령(moralischen Imperativ)으로 대체하여 불필요하게 만들고, 인간의 도덕적 구원(moralische Heil)을 ‘여격’(Dativ), 곧 주어지는 것에서가 아니라 오직 양심의 ‘명령법’(Imperativ)에서만 찾으려는 생각에 이를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마치 이 명령이 채권자의 요구처럼 채무자의 지급 불능과 동시에 나타나 그 무능을 드러낼 뿐, 그것을 제거하지는 못하는 것이 아닌 양 말이다. 유기체에서도 강제(Zwang)나 필연·궁핍(Noth)은 바로 무능(Impotenz)과 동시에 나타난다.”
    여기서는 이를테면 J. G. 피히테(J.G. Fichte)([16,5]) 역시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그의 「‘야코비가 피히테에게’에 관하여」(Zu ‘Jacobi an Fichte’, Hamburg 1799)를 참조하라.
    “마치 세상이 다른 과제와 행동으로 가득하지 않은 것처럼, 한가롭게 우리 존재 전체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총고해(Generalbeichte)를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것(das Göttliche)을 소박하게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복되게 살도록 하자. 그것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따르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는 의로움(Werkheiligkeit)이나 자기 비하와 통회(Selbstzerknirschung)를 통해 그것에서 비롯되지 않은 온갖 것을 억지로 꾸며 내지 말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유고집》(Johann Gottlieb Fichte’s nachgelassene Werke), I. H. 피히테 편, 제1–3권, 본, 1834–35년(키르케고르 장서목록 489–499번 중 일부), 제3권 394쪽. ↩︎
  2. “그리스 …… 회개를 불러일으킨다”(Det er m: H: t: den græske … vækker Anger):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Den nikomachæiske Etik) 제3권 제2장(1110b 18 이하)을 번역하여 인용한 것이다. 출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Die Ethik des Aristoteles) 제2권 9쪽이다.
    여기서 **m: H: t:**는 med Hensyn til, 즉 “~와 관련하여” 또는 “~라는 점에서”라는 뜻이다. ↩︎
  3. “세상을 따르는 근심 …… 하나님을 따르는 근심”(Sorgen efter Verden … Sorgen efter Gud):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근심’(Sorg)을 ‘슬픔·근심’(Bedrøvelse)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고린도후서 7:10, 개역개정
    인용된 덴마크어 본문(NT-1819)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따르는 근심(Bedrøvelsen efter Gud)은 후회하지 않을 구원에 이르는 회심(Omvendelse)을 이루지만, 세상의 근심(Verdens Bedrøvelse)은 죽음을 이룬다.” ↩︎
  4. “로테의 《교회력에 관하여》(Rothes om Kirkeaaret)”: 신학박사 빌헬름 로테(Wilhelm Rothe, 1800–1878)의 《덴마크 교회력과 그 성서 일과—설교자와 교회 출석자를 위한 편람》(Det danske Kirkeaar og dets Pericoper, en Haandbog for Prædikanter og Kirkegjængere)을 가리킨다. 제2판, 코펜하겐, 1843년[초판 1836년], 키르케고르 장서목록(ktl.) 747번. 이하 《덴마크 교회력과 그 성서 일과》(Det danske Kirkeaar og dets Pericoper)로 줄여 표기한다.
    라이첼(Reitzel) 서점의 계산서에 따르면, 키르케고르는 1849년 7월 4일 이 책을 구입했다. 《발견과 연구》(Fund og Forskning), 제8권, 코펜하겐, 1961년, 121쪽을 참조하라. ↩︎
  5.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그 큰 축일을 합당하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Her hedder det … til den store Høitid): 《덴마크 교회력과 그 성서 일과》(Det danske Kirkeaar og dets Pericoper) 90–92쪽의 「대림절 셋째 및 넷째 주일」(3die og 4de Søndag i Advent)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대림절 셋째 주일과 넷째 주일에 지정된 성서 본문은 각각 마태복음 11장 2–10절과 요한복음 1장 19–28절이며, 두 본문 모두 세례 요한(Johannes Døber)을 다룬다. 로테는 이 본문들을 가지고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회심(Omvendelse)과 참회(Bod)를 설교하라고 목회자에게 권한다. 특히 90쪽 이하를 참조하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aandelige Gjenfødelse)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회심(Omvendelsen)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참회 기간(Adventens Bodstid)이 성탄의 기쁨(Juleglæden)에 앞선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마음속에 태어나실 수 있으려면, 그 기간에 회심에 관한 요한의 설교가 먼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울려 퍼져야 한다.”
    “세례 요한”(Joh. d. Døber):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분의 오심을 선포한 요한이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세례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마가복음 1장 4–5절을 참조하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 마가복음 1:4–5, 개역개정
    1819년판 신약성경(NT-1819)에서는 그를 ‘세례 요한’(Johannes den Døber)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마가복음 6장 14절, 24절, 25절을 참조하라. ↩︎
  6. “무용 교사의 지침 …… 이어서 모두 줄을 지어 춤춘다”(en Dandsemesters Forskrifter … og saa Kjede): 발레 교사의 안무 기록을 가리킨다.
    figurerer: 춤을 춘다.
    따라서 해당 부분은 좀 더 정확하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 쌍이 앞으로 나와 춤을 추고, 이어서 연속으로 줄을 지어 춤춘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키르케고르는 교회력에 따라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종교적 감정을 연출하는 모습을, 무용 교사의 지시에 맞추어 순서대로 동작을 수행하는 춤에 빗대어 풍자한다. ↩︎
  7. “사람은 대림절 넷째 주일에는 참회하고, 성탄절 첫날에는 성탄의 기쁨에 젖는다”(Man er bodfærdig 4de Søndag i Advent, juleglad første Juledag): 《덴마크 교회력과 그 성서 일과》(Det danske Kirkeaar og dets Pericoper)에서 설명하는 대림절과 성탄절의 관계를 암시한다.
    91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참회 기간(Adventens Bodstid)이 성탄의 기쁨(Juleglæden)에 앞선다.”
    또한 92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곧 준비의 기간(Beredelsestiden)이 끝나 가면서, 성탄의 기쁨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태어나기 시작한다.”
    키르케고르는 참회와 기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력의 일정에 따라 사람이 정해진 날에는 참회하고 다음 날에는 기뻐하는 식으로 내면의 상태를 형식적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풍자한다. 종교적 실존이 안무된 춤처럼 일정표에 따라 연출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
  8. “‘고기 주일’ 또는 ‘기름진 화요일’(Fleske-Søndag ell. fede Tirsdag)”: 사순절 직전 주일인 사육제 주일(Fastelavns Søndag)과, 재의 수요일 전날인 ‘흰 화요일’(Hvide Tirsdag)을 가리킨다. 재의 수요일(Askeonsdag)부터 사순절(Fasten)이 시작되었다. 《덴마크 교회력과 그 성서 일과》 119쪽 이하를 참조하라.
    “그러나 그 명칭 자체가 이미 보여 주듯이, 사육제 월요일(Fastelavns-Mandag)과 흰 화요일(Hvide-Tirsdag)은 사순절에 포함되지 않았다. 마지막 날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사순절 동안 유제품이 금지되기 전에 이날 우유로 만든 음식을 실컷 먹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명칭은 우리에게만 고유한 표현이다.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 날을 ‘기름진 화요일’(fede Tirsdag)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1553년 찬송가집 앞부분에 실린 오래된 만년력 제1면에서는 사육제 주일을 ‘고기 주일’(Fleske-Søndag)이라고 부른다. 검소한 사순절(magre Faste)이 시작되기 전에 기름진 음식을 실컷 먹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날들은 사람들이 ‘사순절을 준비하도록’ 정해진 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순절을 견딜 힘을 비축하려고 가장 방탕할 정도로 흥겹게 즐기며 음식과 술을 실컷 먹고 마셨다.”
    여기서 키르케고르의 풍자는 한층 더 선명해진다. 교회력의 형식적 논리를 따르면 사람은 대림절 넷째 주일에는 참회하고, 성탄절에는 기뻐하며, 사순절 직전에는 실컷 먹고 마셔야 한다. 종교적 내면성이 달력에 따라 자동으로 바뀌는 일련의 ‘안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름진 화요일에는 어떤 상태가 되는가?”라는 질문은 이러한 형식화의 우스꽝스러운 결말을 드러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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