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26:14
6월 19일
나 자신에 관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근원적으로 이질적인 존재(Ueensartethed)이며, 또한 육체의 가시(en Pæl i Kjødet)1를 지닌 사람이라고 나 자신을 이해하면서, 커다란 내적 고난 속에서 저술가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해마다 견뎌 왔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닥친 고난인 폭도들의 박해(en Pøbel-Forfølgelse)2에도 불구하고 견뎠다. 나는 나를 위해 이루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께 아무리 감사해도 충분하지 않다.3
그러다가 1848년이 왔다.4 나는 전에는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높은 지점으로 들어 올려졌고, 이제 지나가 버리고 뒤에 남겨진 나의 과거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나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거나 생각했다. 순수한 지적 열정(intellectuel Enthusiasme)으로 그 과제에 온전히 헌신하여 그리스도교(Christendommen)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무조건적으로 규정하지는 않고, 지적 열정으로 이념(Ideen)을 위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나는 나의 과제와 나의 이질성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이 입장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시골로 나가 목사직을 맡으려고 했다.5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의구심(Betænkelighed)이 깨어났고, 뒤이어 여러 의구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생계에 대한 염려(Næringssorg)가 실제로 심각해졌을 때, 내가 너무 강하게 입장을 드러내어 그동안 언제나 가지고 있던 교회 직분을 얻을 가능성6마저 완전히 포기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와 사람들에게 책임 있는 행동일까? 내가 일을 지나치게 밀어붙임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그때 다시 ‘그녀’7에 관한 생각이 강하게 깨어났다. 내가 이처럼 집중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을 완화하고, 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는 규정 아래 두면서 보다 광범위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일을 맡는다면, 그에 상응하여 그녀도 자신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8
여백에서; [a] X4A561
내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한편으로는 보통의 그리스도인 됨보다 높은 위치였지만, 다른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는 오히려 더 낮은 위치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교회 직분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끝내 결심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나를 붙잡아 두었다. 그렇게 물러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불충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물러서려 하지 않는 것이 나의 교만 때문은 아닐까 몹시 불안했다.
그러다가 내가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 원고를 인쇄소에 맡겨야 한다는 방향의 인상이 다시 강하게 깨어났다. 나는 인쇄소에 편지를 보냈고, 인쇄소에서는 원고를 즉시 받을 수 있다고 답했다.9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올센 참사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10 그 소식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하나의 암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이미 행동에 나선 뒤였다. 올센은 며칠 전에 죽었으므로 그 소식을 하루나 이틀 더 일찍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멈추지 않도록 그 소식을 더 일찍 듣지 못하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Styrelse)11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제 결정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출판하겠습니다. 이 긴장 속에서 주께서 나를 훈련해 주십시오.”
시골로 나가 살려던 계획을 포기한 뒤부터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방식의 고난이었다. 삶의 온갖 사소한 일에서 불운과 괴로움을 겪었으며, 경제적 염려(oeconomiske Bekymringer)12가 그것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의 어느 순간 내가 직접 훈련을 구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그 기도를 드린 뒤부터 이런 괴로움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나는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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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1848년에 서 있던 지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 높은 이해 속에서 그 지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나의 이질성(Ueensartethed)을 강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거의 잊고 있었던 사실, 곧 나는 성직을 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1]
[b] 안수례(Ordinationen)는 나의 마음에 거슬린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신학교에서 어떤 직책을 맡는 것이었다. 13그러나 그 경우에도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는 문제가 다시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이질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리스도교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앞으로 내가 겪게 될 고난은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위한 지적 열정’이라는 규정 아래 놓이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교리를 위한 고난’(Lidelse for Læren)이라는 규정 아래 놓인다. 또한 나는 이 고난을 견디는 일에서도 그리스도교에 직접 의지한다.
다시 세워져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뒤따름(Christi Efterfølgelse)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이질성 안에서 지금의 나로 존재해야 한다.
오, 나의 하나님, 오랜 염려의 시간 동안 내가 동질성(Eensartethed)을 향한 행동을 취하지 않도록 나를 지켜 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다. 만일 내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당시의 한 일기에서 내가 두려워하던 일을 강한 표현으로 말했듯이, 태아를 유산시키는 것과 같은 죄를 저질렀을 것이다.14
더 나아가 나는 내 자리가 아닌 곳에 자신을 얽어매고, 나중에는 그곳에서 오직 괴로움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에 도착했을 때 지급을 거절당하는 것처럼 항의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뒤따름’(Efterfølgelsen)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권위 없이’(uden Myndighed) 말하는 것, 이것이 나의 범주이며 앞으로도 그러하다.
이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 『저자로서의 나의 활동에 관하여』(Om min Forfatter-Virksomhed), 『금요일 성찬식에서의 두 강화』(To Taler ved Altergangen om Fredagen)의 서문,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 시험을 위하여』(Til Selvprøvelse)에서 나는 자신을 시인(Digter)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15
곧 은혜(Naaden)가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뒤따름도 다시 세워져야 한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불안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시인’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삶은 단지 시인으로 존재하는 것 이상을 표현해 왔다. 그리고 내가 이질성 안에 머물 때, 나의 삶은 더욱 많은 것을 표현한다.
나의 본성적 규정이며 내 존재와 분리할 수 없는 교활하고도 논쟁적인 것(det underfundig-Polemiske) 역시 여기서 다시 보존된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천 명의 목회자와 교사들이 있다. 교사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일이다. 또한 온 국민이 모두 그리스도인이다.16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역시 ‘시인’이 되는 것보다 더 높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오직 시인일 뿐이다.
오, 나의 하나님, 이제 모든 것이 얼마나 분명하게 내 앞에 놓이는지, 나를 위해 얼마나 무한히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내가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은 이질성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다. 아, 그러나 나는 동질적인 사람이 되는 데서 오는 안전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니다. 나는 이질성 안에 머물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주님 곁에 머문다. 그리고 실로 나는 그것이 주는 복을 알고 있다. 나를 불안하게 했던 유일한 것은 어쩌면 과제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곧 내가 이질성에서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아마도 내가 내 삶의 안정을 보장받고 싶어 했던 소망과도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용기와 기쁨도 느낀다. 물론 1848년처럼 거품이 일 듯 넘치는 용기와 기쁨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생계에 관한 염려가 지금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내가 지금 경제적 부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다시 환호했을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너무도 많은 고난을 겪었고, 이제 나의 과제를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자유롭다 해도 그때와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현재의 경제적 염려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내가 세상에 대해 아는 바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는 소란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평안하고 기쁘다.
어쩌면 1848년보다 더 고요한 신뢰 안에서 더욱 확고하게 서 있는지도 모른다.
[1] 주: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은 내가 직접 어떤 행동도 감히 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일기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는 특히 그런 종류의 직책이 내게 제안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내가 그것을 거절해야 하는지를 더욱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7
나를 특히 괴롭힌 것은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려 하지 않는 것이 나의 교만 때문은 아닐까 하는 문제였다.
[1.a] 나의 미래를 보장해 줄 지위를 얻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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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의 가시
고린도후서 12장 7-9절을 암시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신약성서』 1819년 판(NT-1819)도 “육체의 가시”(en Torn i Kiødet)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크리스티안 6세의 1740년 성경에는 “육체의 말뚝”(en Pæl i Kiødet)이라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은 크리스티안 3세 시대의 1550년 종교개혁 성경 이래 계속 사용되었다.
또한 크리스티안 4세의 1633년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정용·여행용 성경에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성경은 1699년에 처음 출간되어 1802년에 마지막 판이 나왔으며, 가정에 매우 널리 보급되었다.
키르케고르가 사용한 en Pæl i Kjødet은 문자적으로 ‘육체에 박힌 말뚝’이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성서 어휘에 따라 본문에서는 ‘육체의 가시’로 번역할 수 있지만, 원문의 고통스럽고 강렬한 어감을 살리려면 주석에서 ‘육체의 말뚝’이라는 옛 표현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 - 폭도들의 박해
주간지 『코르사르』(Corsaren)가 키르케고르를 공격한 결과, 그가 거리에서 조롱과 괴롭힘을 당하게 된 사건을 가리킨다.
『코르사르』는 키르케고르를 풍자하는 여러 기사와 암시적인 글, 희화화를 게재했다.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SKS) K20권 41-44쪽을 참조하라.
공격은 1846년 1월 2일 제276호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7월 17일 제304호까지 정기적으로 이어졌다. M. A. 골드슈미트(M.A. Goldschmidt)가 1846년 10월 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롱은 계속되었고, 마지막 사례는 1849년 2월 16일 제439호에 실렸다.
여기서 Pøbel-Forfølgelse는 문자적으로 ‘폭도 또는 천박한 군중(Pøbel)에 의한 박해(Forfølgelse)’라는 뜻이다. 잡지의 풍자가 독자들의 집단적 조롱으로 번져 키르케고르가 거리에서도 모욕당한 경험을 나타낸다. ‘군중의 박해’로 옮기면 키르케고르의 군중(Pøbel) 비판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 - 나를 위해 이루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께 아무리 감사해도 충분하지 않다
『저자로서의 나의 활동에 관하여』(Om min Forfatter-Virksomhed)의 「결산」(Regnskabet) 뒤에 별도로 덧붙인 두 쪽과 비교하라. 그 글의 13쪽에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개인적으로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나의 저술 활동 전체보다 더 중요하며 내 마음에 더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아무리 감사해도 충분하지 않은 그것을 가능한 한 진실하고 강하게 표현하고 싶다. 언젠가 나의 저술 활동 전체를 잊게 되더라도, 이것만은 변함없이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Styrelsen)는 내가 지금까지 기대했던 것보다, 기대할 수 있었던 것보다, 감히 기대할 수 있었던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일을 나를 위해 이루어 주셨다.”
『키르케고르 전집』 제2판(SV2) 13권 534쪽을 참조하라. ↩︎ - 1848년. 나는 높은 지점으로 들어 올려졌다
키르케고르는 여러 곳에서 1848년이 특별히 많은 힘을 소모하게 한 해였다고 기록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격변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해가 그의 저술 활동에서 가장 생산적인 해였기 때문이다.
1849년 10월에 작성되었으나 사용되지 않은 「결산」(Regnskabet)의 초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일한 가명 저자의 이름으로 완전히 집필된 두세 편의 소논문이 더 존재한다. 이 글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1848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내 이름으로 완전히 집필된 『나의 저술 활동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글 두 편도 존재한다. 이 글들 역시 1848년이라는 해에서 비롯된 결실이다.
1848년은 내게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그해 나는 이전의 어느 해보다 훨씬 더 많은 작업을 했다.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면, 그 무시무시한 정치적 파국의 도움을 받아 저자로서(qua Forfatter) 나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또한 정치적 파국과 대조되는 방향에서 도움을 받아 내면으로 향하여 종교적인 것(det Religieuse)을 연구하고 그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 글들, 특히 내 이름으로 쓴 글들은 아마 곧바로 출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한 해를 살아 냈다는 것은 외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저술 활동이 받은 가장 커다란 도움이었다. 그것은 내가 기대했던 것을 훨씬,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키르케고르 유고』(Pap.) X 5 B 219, 406쪽 이하.
『그리스도교 강화』(Christelige Taler)는 1848년 4월 25일에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SKS) K10권의 문헌 해제 59쪽과 7쪽을 참조하라. 이 밖에도 키르케고르는 1848년에 다음 저술들을 집필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 1849).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K11권 166쪽의 문헌 해제를 참조하라.
『윤리적·종교적 논문 연작』(En Cyclus ethisk-religieuse Afhandlinger). 『두 편의 윤리적·종교적 소논문』(Tvende ethisk-religieuse Smaa-Afhandlinger, 1849)의 문헌 해제,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K11권 88쪽을 참조하라.
『나의 저술 활동의 관점』(Synspunktet for min Forfatter-Virksomhed). 14쪽 29행을 참조하라.
「결산」. 원래 제목은 「나의 저술 활동에 관한 하나의 주」(Een Note betræffende min Forfatter-Virksomhed)였다. 예를 들어 『키르케고르 유고』 X 5 B 141-143, 343-345쪽을 참조하라.
또한 다음 세 글을 집필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각성과 내면화를 위하여」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성서적 진술과 그리스도교적 개념 규정」
「높은 데서 그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리라—그리스도교적 논의」의 일부. 이 글은 1849년 초에 완성되었다.
이 세 글은 나중에 각각 『그리스도교의 훈련』(Indøvelse i Christendom, 1850)의 제1부, 제2부, 제3부로 출간되었다.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K12권의 『그리스도교의 훈련』 문헌 해제 70쪽, 73쪽 이하, 90-93쪽을 참조하라. ↩︎ - 키르케고르가 1849년에 시골의 목사직에 지원하는 것을 고려했던 일을 가리킨다.
다음 일기 기록들과 비교하라.
1849년 2월의 NB10:16,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SKS) 21권 264쪽
1849년 5월의 NB11:8과 NB11:21
1849년 6월의 NB11:125
1849년 8월의 NB12:110
1849년 11월의 NB14:12
1849년 12월의 NB14:137
마지막 여섯 기록은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22권 12쪽, 19쪽, 75쪽, 205쪽, 350쪽, 422쪽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 - 내가 언제나 가지고 있던 교회 직분을 얻을 가능성
키르케고르 시대의 규정에 따르면, 신학 후보자가 목사직에 지원하고 안수(Ordination)를 받기 위해서는 신학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신학부의 증명서(Testimonium)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후보자는 다음 조건도 충족해야 했다.
목회신학교(Pastoralseminariet)의 수업과 실습을 적어도 한 학기 이수할 것
설교학(Homiletik) 시험에 합격하고 안수 자격 설교(Demisprædiken)를 행할 것
교리문답 교육학(Kateketik) 시험에 합격할 것
키르케고르는 1840년 11월부터 1841년 9월까지 두 학기 동안 목회신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설교학 시험에 합격하고 안수 자격 설교를 행한 것은 1844년 2월 24일이었다. 장소는 코펜하겐의 트리니타티스 교회(Trinitatis Kirke)였다.
반면 키르케고르는 교리문답 교육학 시험에는 한 번도 응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의 ‘교회 직분을 얻을 가능성’은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라, 필요한 교육과 시험을 상당 부분 이수한 키르케고르가 목사직을 얻고 안수받을 수 있었던 현실적인 가능성을 뜻한다. 다만 교리문답 교육학 시험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든 자격 요건을 완전히 충족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레기네 올센(Regine Olsen, 1822-1904)을 가리킨다. 레기네는 말링(Malling) 가문 출신 레기나 프레데리케(Regina Frederikke)와 테르킬 올센(Terkild Olsen)의 막내딸이었다.
레기네와 키르케고르는 1840년 9월 10일에 약혼했으며, 1841년 10월 12일에 최종적으로 파혼했다.
레기네는 이후 1843년 8월 28일에 J. F. 슐레겔(J.F. Schlegel)과 약혼했고, 1847년 11월 3일 크리스티안스하운의 구세주교회(Vor Frelsers Kirke)에서 그와 혼인했다.
키르케고르는 레기네와 자신의 관계를 훗날 회고적으로 「‘그녀’와 나의 관계—1849년 8월 24일—다소 시적인 것」(Mit Forhold til “hende”. d. 24 Aug. 49. noget Digterisk)에서 서술했다. 이 글은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SKS) 19권 431-445쪽의 노트 15에 해당한다. ↩︎ - 그녀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다
키르케고르가 이미 1849년에 자신의 저술 활동 전체를 레기네 슐레겔(Regine Schlegel)에게 헌정하는 것을 고려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앞 주석에서 언급한 노트 15의 제14번 기록과 비교하라. 그곳에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나의 실존은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삶을 강조해야 한다. 나의 저술 활동 역시 그녀의 영예와 찬양을 위한 하나의 기념비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한다.”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SKS) 19권 443쪽 33-36행.
또한 1849년 또는 1850년에 작성된 『저자로서의 나의 활동에 관하여』(Om min Forfatter-Virksomhed)의 원고 자료에 나오는 다음 대목과 비교하라.
“레기네 슐레겔에게 바치는 헌정문은—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러한 헌정이 가능하다면—금요일 강화의 작은 모음집 앞에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나의 저술 활동을 설명하는 글들에 속한다.
내가 처음부터 의도해 온 것이 종교적인 것이라는 성격 안으로 결정적으로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유일하게 중요한 사람이 된다. 나는 그녀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관계(Guds-Forhold)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헌정문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R. S.에게 이 글과 함께, 어느 정도 그녀에게 속하는 하나의 저술 활동을 헌정한다. 그리고 이를 헌정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속한 사람이다.’
또는 『금요일 강화』 모음집에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R. S.에게 이 작은 글을 헌정한다.’”
『키르케고르 유고』(Pap.) X 5 B 263.
원고 자료에는 키르케고르가 『저자로서의 나의 활동에 관하여』에 인쇄하려고 고려했던 여러 헌정문 초안이 남아 있다. 문구는 초안마다 크게 달라진다. 이 책의 본문 대부분은 「결산」(Regnskabet)으로 이루어져 있다. 20쪽 24행을 참조하라.
예를 들어 한 초안은 다음과 같다.
“「결산」에 붙일 헌정문.
헌정문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람,
언젠가 그 이름이 밝혀질 그 사람에게
……을 헌정한다.’”
『키르케고르 유고』 X 5 B 261.
또 다른 초안은 다음과 같다.
“한 동시대인,
아직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야 하지만
역사가—그것이 짧든 길든—
나의 이름을 언급하는 동안에는
함께 그 이름을 말하게 될 그 사람에게,
이 작은 글과 함께
처음부터 그러했던 저술 활동 전체를
헌정한다.”
『키르케고르 유고』 X 5 B 264.
출판된 『저자로서의 나의 활동에 관하여』에는 헌정문이 없다. 그러나 같은 날 출간된 『금요일 성찬식에서의 두 강화』(To Taler ved Altergangen om Fredagen)에는 헌정문이 실렸다.
두 책은 모두 1851년 8월 7일 자 『아드레세아비센』(Adresseavisen) 제184호에서 출간된 것으로 광고되었다.
『금요일 성찬식에서의 두 강화』의 헌정문은 다음과 같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람,
언젠가 그 이름이 밝혀질 그 사람에게,
이 작은 글과 함께
처음부터 그러했던 저술 활동 전체를
헌정한다.”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12권 279쪽.
따라서 “그녀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한다”는 말은 레기네와 다시 혼인한다는 의미라기보다, 키르케고르의 삶과 저술 활동에서 레기네가 지닌 결정적인 의미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저술 활동 전체를 그녀에게 돌려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 - 나는 인쇄소에 편지를 보냈고 … 인쇄소에서는 원고를 즉시 받을 수 있다고 답했다
키르케고르와 인쇄소 사이에 오간 이 서신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의 출판과 관련된 사건들을 일기에 여러 차례 기록했다. 다음 기록들을 참조하라.
1849년 6월 25일의 NB11:192
1849년 7월의 NB12:7 및 NB12:28-30
1849년 9월 또는 10월의 NB12:143
1849년 10월의 NB13:78
1849년 11월의 NB14:12
이 기록들은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SKS) 22권 115쪽 이하, 149쪽, 160쪽 이하, 232쪽 이하, 321쪽, 350쪽 이하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1850년 7월의 NB20:12도 참조하라.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23권 396쪽 이하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NB14:12에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나는 인쇄소에 편지를 보내 식자공들을 준비해 달라고 했고, ‘작업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다. 인쇄소에서는 모든 준비가 끝났으며 원고를 보내도 되는지를 묻는 답장을 보내왔다.
바로 그 일이 이루어진 뒤에 나는 올센 참사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다음 주석 참조.]
그 소식은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내가 인쇄소에 편지를 보내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출판을 연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나는 몹시 긴장해 있었고 잠도 조금 불안하게 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마디가 떠올랐다. 마치 내가 스스로를 파멸 속으로 내던지려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아침이 되자 나는 이 문제를 다시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이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원고인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인쇄소에 보내되, 그 밖의 원고들도 더 인쇄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현실이 나를 시험하게 하려고 했다. 모든 것이 출판될 수도 있었고,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 멈출 수도 있었다.”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22권 350쪽 이하.
『죽음에 이르는 병』의 인쇄용 원고는 1849년 6월 29일 인쇄소에 전달되었다. 7월 27일 인쇄가 완료되었고, 7월 30일 출간되었다.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K11권 121쪽의 문헌 해제를 참조하라.
인쇄소(Bogtrykkeriet): 비앙코 루노 인쇄소(Bianco Lunos Bogtrykkeri)를 가리킨다. 이 인쇄소는 1838년부터 외스테르가데(Østergade)에 있었으며, 기술과 인쇄 디자인의 측면에서 코펜하겐의 다른 인쇄소들보다 앞서 있었다. 지도 2의 C2를 참조하라.
비앙코 루노는 1847년 왕실 인쇄업자로 임명되었다. 루이스 클라인(Louis Klein)의 인쇄소에서 제작된 『두 편의 윤리적·종교적 소논문』(Tvende ethisk-religieuse Smaa-Afhandlinger, 1849)을 제외하면, 키르케고르의 모든 책은 비앙코 루노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 - 바로 그날 저녁 … 올센 참사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기네 올센의 아버지 테르킬 또는 테르켈 올센(Terkild/Terkel Olsen, 1784-1849)을 가리킨다.
그는 재무부 산하 총계정·대조계정국의 책임자였다. 이 부서는 1848년부터 재무성에 속하게 되었다. 올센은 1849년 6월 26일에 사망했다.
1849년 6월 29일 자 『아드레세아비센』(Adresseavisen) 제150호에 실린 부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달 25일과 26일 사이의 밤, 주님께서는 40년 동안 혼인생활을 함께한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며 여섯 자녀의 아버지인 테르킬 올센 참사관, 단네브로 기사단 기사를 불러가셨다.
말링 가문 출신 레기나 올센.”
참사관(Etatsraad): 테르킬 올센은 1840년 6월 28일 ‘실질 참사관’(virkelig Etatsraad)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746년 10월 14일의 품계 규정—1808년 8월 12일의 고시로 일부 개정됨—은 관직을 품계 번호에 따라 모두 아홉 등급으로 구분했다. ‘실질 참사관’은 그 가운데 제3등급 제3위에 해당했다.
『콜레기알 티덴데』(Collegial-Tidende) 1840년 7월 4일 자 제30호 711쪽 이하를 참조하라. ↩︎ - ◄ 섭리
하나님의 섭리(Guds Styrelse)를 뜻한다.
N. E. 발레(N.E. Balle)와 C. B. 바스톨름(C.B. Bastholm)이 덴마크 학교의 교재로 편찬한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 교리서』(Lærebog i den Evangelisk-christelige Religion, indrettet til Brug i de danske Skoler, 코펜하겐, 1824년[초판 1791년])를 참조하라. 이 책은 일반적으로 『발레의 교리서』(Balles Lærebog)라고 불린다. 키르케고르 소장 도서 목록(ktl.) 183번에 해당한다.
제2장 제2절 「성경이 하나님의 섭리와 피조물의 보존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 제3항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세상의 주님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혜와 선으로 다스리신다. 그리하여 선과 악 모두 하나님께서 가장 유익하다고 여기시는 결과에 이르게 하신다.”
23쪽을 참조하라.
제5항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일이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그것은 최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만족할 이유가 있다.”
24쪽 이하를 참조하라.
본문에서 키르케고르는 올센의 사망 소식을 원고를 인쇄소에 보낸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할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 소식을 더 일찍 들었다면 출판을 멈추었을 수도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행동에 나설 때까지 그 소식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닐까 숙고한 것이다. ↩︎ - ◄ 생계에 대한 염려
키르케고르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상당한 재산이 점차 소진되어 가던 상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다음 일기 기록과 주석을 참조하라.
1849년 5월 또는 6월의 NB11:122,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SKS) 22권 68쪽 4행 이하
1850년 5월의 NB18:7,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23권 258쪽 29-31행
키르케고르는 일기에서 자신이 돈을 계속 써서 잃고 있다고 자주 말한다. 이는 그의 저술 활동과 관련하여 발생한 전체 비용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일기 기록들을 참조하라.
1850년 2월의 NB16:59,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23권 135쪽 23행 및 주석
1850년 3월의 NB17:13, 같은 책 172쪽 17행
1850년 7월의 NB20:36, 같은 책 412쪽 5행
프리티오프 브란트(Frithiof Brandt)와 엘세 토르켈린(Else Thorkelin)의 『쇠렌 키르케고르와 돈』(Søren Kierkegaard og pengene), 제2판, 코펜하겐, 1993년[초판 1935년], 23-64쪽도 참조하라. 이하 『쇠렌 키르케고르와 돈』으로 줄여 부른다.
키르케고르는 1848년 채권 가격이 하락하면서 자신이 700리그스달레르의 손실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847년 12월 뉘토르브(Nytorv)에 있던 어린 시절의 집을 매각하고, 그 수입의 일부로 왕실 채권을 매입했다. 18쪽 16행도 참조하라.
반면 매각대금의 나머지로 나중에 매입한 주식에서는 아마 손실을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48년 11월의 일기 NB7:114, 『쇠렌 키르케고르 저작집』 21권 138쪽 29-34행 및 138쪽 주석 2-4행과 『쇠렌 키르케고르와 돈』 86-90쪽을 참조하라. ↩︎ - 신학교의 교수직(en Ansættelse ved et Seminarium): 코펜하겐 왕립 목회신학교(Det kgl. Pastoralseminarium)를 가리킨다. 키르케고르는 한동안 그곳에서 교사로 일할 자리를 지원할 계획을 세웠다. 가령 1849년 3월경의 일기 NB10:89를 보라(SKS 21, 302 이하; [24,33]).
또한 1851년에 작성했으나 사용하지 않은 논쟁적 글의 초고 「뮌스터 주교의 한 발언」(En Yttring af Biskop Mynster)도 참조하라. 키르케고르는 그 글에서 지난 일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쓴다.
“하지만 지난 4~5년 동안 나는 또 다른 생각도 품고 있었다. 내 능력의 특수한 성격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것이 기존 질서(det Bestaaende) 및 뮌스터 주교와 조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서도 목회신학교의 교수직을 원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주교에게 이 일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안 된다는 것이었다!”
(Pap. X 6 B 173, 274쪽 11~16행)
1809년에 설립된 목회신학교(Pastoralseminaret)에서는 장차 목사가 될 이들에게 목회신학을 가르쳤다. 교육과정에는 설교학, 교리문답 교육, 예전학, 교회법, 목회상담이 포함되었다. ↩︎ - 당시의 일기 가운데 하나에서 … 태아를 낙태한 여인처럼 두려워했다(i en af Journalerne fra den Tid … frygtede, at fordrive et Foster): 아마도 1849년 6월 말이나 7월 초에 작성된 일기 NB11:194를 가리킨다. 그곳에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 나 자신이 참으로 역겹고 또 역겹구나! 하나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오래 참으심과 은혜로 나에게, 또 나를 위하여 그 모든 비범한 일(Det Overordentlige)을 행하셨다. 그런데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일을 저버리거나 배신한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내가 평안을 누렸는가? 아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던 내 가장 깊은 내면에는 불안(Angest)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를 강제로라도 움직이실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예컨대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는 법(afdøe fra Verden)과 순종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나를 이성을 잃게 하시거나 다른 방식으로 몰아가실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또는 태아를 낙태한 여인처럼, 이 일로 무거워진 양심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SKS 22, 119, 8~14행)
태아를 낙태하다(fordrive et Foster): 당시 낙태는 법률상 가장 엄한 형벌로 처벌되었다. 크리스티안 5세의 『덴마크 법전』(1683) 제6권 제6장 제7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자신의 태아를 죽인 부정한 여인은 참수형에 처하고, 그 머리를 장대 위에 걸어야 한다.”
(Kong Christian den Femtes Danske Lov af det Iuridiske Fakultet giennemset, J. H. 베렌스 편, 코펜하겐, 1797, 889쪽)
그러나 키르케고르 시대에는 그러한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사면되어, 사형 대신 최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 『나의 저술 활동에 관하여』에서 … 자신을 ‘시인(Digter)’이라고 선언한다(i »om min Forfatter-Virksomhed« … erklærer mig: at være en Digter): 『나의 저술 활동에 관하여』(Om min Forfatter-Virksomhed)의 부록인 「‘크리스텐덤(Christenhed)’ 안에서 종교적 저술가로서 나의 위치와 나의 전술」(Min Position som religieus Forfatter i ‘Christenhed’, og min Taktik) 19쪽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강인한 윤리적·종교적 인격이라면—아, 나는 거의 한낱 시인(Digter)에 지나지 않는데!—따라서 진리를 위하여 더욱 엄격하게 나아갈 자격과 의무가 있다면, 나는 동시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대신 오직 저항만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SV2 13, 541)
『성찬식에서의 두 강화』 서문(Forordet til To Taler ved Altergangen): 『금요일 성찬식에서의 두 강화』(To Taler ved Altergangen om Fredagen)의 「서문」 첫 대목을 가리킨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것이냐—저것이냐』(Enten–Eller)에서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전진해 온 하나의 저술 활동이 이제 여기, 제단 아래에서 자신의 결정적인 안식처를 찾습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불완전함과 죄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결코 자신을 진리의 증인(Sandheds-Vid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독특한 종류의 시인이자 사상가일 뿐입니다. 그는 ‘권위 없이(uden Myndighed)’ 새로운 것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인간적인 실존관계의 원문(Urskrift), 곧 오래되고 익숙하며 선조들로부터 전승된 것을 가능하다면 더욱 내면적인 방식으로 다시 한번 읽으려 했습니다.’(나의 『결론적 비학문적 후서』 후기를 참조하십시오.)”
(SKS 12, 281, 2~9행)
『자기 시험』(Selvprøvelse): 『동시대에 권하는 자기 시험을 위하여』(Til Selvprøvelse Samtiden anbefalet) 제1부 17쪽의 다음 구절을 가리킨다.
“나는 이러한 내면화(Inderliggjørelse)를 향한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힘써 왔습니다. 그러나 ‘권위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스스로 허영에 부풀어 자신을 진리의 증인이라고 내세우고, 다른 사람들도 무모하게 똑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게 만드는 대신, 나는 이상(Idealer)의 도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권위 없는 시인(umyndig Digter)입니다.”
(SV2 12, 359) ↩︎ - 온 국민이 하나같이 그리스도인이다(hele Befolkningen er lutter Christne): 『통계표집』(Statistisk Tabelværk) 제10책(코펜하겐, 1846) XIV쪽에 따르면, 1845년 2월 1일 인구조사 당시 덴마크 왕국의 인구는 1,350,327명이었다. 그 가운데 유대인 3,670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했다. ↩︎
- 당시의 일기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 그런 자리를 제안받는다면 … 나는 거절해야 했다(sees af Journalerne fra den Tid … Saadant skulde blive mig tilbudet … maatte sige nei): 예를 들어 1849년 3월경의 일기 NB10:89를 보라.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며칠 전 나는 뮌스터(Mynster)를 찾아가 신학교의 교수직(Ansættelse ved Seminariet)과 관련된 말을 슬쩍 꺼냈다. 그것은 도움이 된다. 만일 누군가 내게 그 자리를 제안한다 해도, 그것이 나를 유혹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해 본 것은 잘한 일이다. 내가 일자리를 구하기에는 너무 교만했기 때문에 더 중대한 결단 속으로 나 자신을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듯, 내 경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SKS 21, 302 이하)
NB10:89.a에 따르면, 여기서 키르케고르가 염두에 둔 곳은 목회신학교(Pastoralseminariet)였다([24m,2] 참조).
또한 1849년 6월 25일 자 일기 NB11:192도 참조하라(SKS 22, 115 이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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