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직접 연결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적어도 키르케고르의 동시대성(Samtidighed)을 음부 강하(descensus ad inferos)나 이레네우스적 총괄갱신(ἀνακεφαλαίωσις, recapitulatio)의 교리적 근거로 삼는 것은 무리입니다. 세 사상이 움직이는 방향과 설명하려는 문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성은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이 오늘의 개인에게 어떻게 현재가 되는가’를 묻습니다. 반면 음부 강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죽은 자들에게 어떻게 미치는가’를, 총괄갱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와 창조 전체가 어떻게 다시 통일되는가’를 설명합니다.

개념중심 문제운동 방향강조점
동시대성(Samtidighed)내가 지금 어떻게 그리스도 앞에 서는가그리스도 사건 → 현재의 단독자믿음·실족·결단
음부 강하그리스도의 승리가 죽은 자에게 어떻게 미치는가그리스도 → 죽은 자들의 영역구원의 보편적 도달
총괄갱신(ἀνακεφαλαίωσις)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와 창조가 어떻게 회복되는가성육신 → 인류·우주 전체대표성·연대성·창조의 회복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매개 방식’입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어느 시대의 개인이든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 되는 것은 역사적 연속성이나 인류의 존재론적 통합 때문이 아닙니다. 신이 그 개인에게 조건(Betingelsen)을 주고, 개인이 역설 앞에서 믿음(Tro)으로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단독자(den Enkelte)의 실존적 관계입니다.

반면 총괄갱신은 그리스도가 인류 전체를 자신의 몸 안에서 대표하고, 아담의 역사를 다시 살아냄으로써 인간 본성과 창조를 회복한다는 구원론적·존재론적 구도입니다. 여기서는 개인의 결단 이전에 그리스도와 인류 전체의 객관적 연대성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동시대성을 이렇게 확대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시대의 사람이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므로,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를 통해 과거의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 총괄된다.”

이 추론에는 빠진 고리가 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모든 시대’는 기본적으로 각 시대의 살아 있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와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뜻이지, 죽은 자들이 사후에 그리스도를 만나거나 인류 전체가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포함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시대성은 시간적 거리를 신앙의 관점에서 무효화하지만, 생자와 사자의 경계나 구원사의 범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총괄갱신에서 차이는 단지 자각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실제로 치유되고 새로워집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동시대성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나 인간 본성의 공동적 변화를 설명하는 범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발생한 성육신의 존재론을 해설하기보다, 그 역설이 ‘나에게’ 어떤 요구로 다가오는지를 묻습니다.

물론 아주 제한된 비교는 가능합니다. 세 개념 모두 그리스도 사건을 박물관 속의 과거로 남겨 두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총괄갱신은 그리스도가 인류의 역사를 자신 안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 음부 강하는 그 구원의 도달 범위가 죽음의 영역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 동시대성은 그 사건이 현재의 개인에게 믿음과 실족의 가능성으로 현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조적 유사성이지 논리적 연결이나 역사적 영향관계가 아닙니다. 한 개념으로 다른 개념을 도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엄밀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누구에게, 어디까지, 어떤 존재론적 방식으로 미치는지를 말합니다. 동시대성은 그 구원 사건 앞에 한 개인이 어떻게 현재적으로 서는지를 말합니다. 전자는 구원 사건의 객관적 범위이고, 후자는 그 사건에 대한 주체의 실존적 관계입니다.

둘을 연결하려면 키르케고르 자신의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며, 교부적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이라는 외부의 신학적 전제를 추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가능한 현대적 종합일 수는 있어도, 키르케고르의 동시대성 개념 자체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불가능하다”는 판단은, ‘직접적인 교리적 연결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라면 타당합니다.


가능하다면?

연결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고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키르케고르의 본래 의도를 복원하는 해석으로 제시하면 설득력이 약하고, 서로 다른 전통을 결합하는 구성적 신학으로 명시한다면 의미가 있습니다.

핵심은 두 층위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1. 해석적 주장

“키르케고르의 동시대성에는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 사상이 내재해 있다.”

이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동시대성(Samtidighed)은 단독자(den Enkelte)가 역설 앞에서 믿음이나 실족으로 응답하는 실존적 범주입니다.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은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죽은 자·인류·창조 전체에 미치는 객관적이고 우주적인 범위를 다룹니다. 키르케고르의 텍스트에는 전자에서 후자를 도출할 연결고리가 부족합니다.

  1. 구성적 제안

“교부적 그리스도론을 전제로, 동시대성을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의 실존적 차원으로 재해석해 보자.”

이것은 가능합니다. 총괄갱신이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역사를 자신 안에 모으신다”는 객관적 구원 사건을 말한다면, 동시대성은 “그 사건이 각 개인에게 어떻게 현재가 되는가”를 설명하는 주관적·실존적 범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분업이 가능합니다.

  • 총괄갱신: 모든 시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모입니다.
  • 음부 강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과거의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칩니다.
  • 동시대성: 각 개인이 그 보편적 사건과 현재적으로 관계 맺습니다.

이 종합의 장점은 객관적 구원사와 개인의 실존적 응답을 함께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총괄갱신만 강조할 때 개인의 결단이 흐려질 위험을 동시대성이 보완하고, 동시대성만 강조할 때 구원이 고립된 개인의 내적 결단으로 축소될 위험을 총괄갱신이 보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난점도 있습니다.

첫째, 죽은 자의 ‘응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동시대성은 믿음(Tro)과 실족(Forargelse)의 가능성을 전제하지만, 음부의 죽은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러한 실존적 결단을 내리는지 키르케고르는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사후 회개나 사후 복음 선포라는 별도의 교리가 필요합니다.

둘째, 은혜의 객관성과 개인의 결단 사이에 긴장이 생깁니다. 총괄갱신이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 객관적으로 포함한다고 강하게 말할수록 동시대성의 결단은 불필요해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개인의 믿음을 구원의 성립 조건으로 만들면 총괄갱신의 보편적 효력이 약화됩니다.

셋째, 키르케고르의 차이 개념을 약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총괄갱신을 신과 인간의 존재론적 간극이 해소되는 과정으로 읽으면, 차이를 보존하면서 관계가 성립한다는 키르케고르의 역설이 훼손됩니다. 총괄갱신은 차이의 폐지가 아니라 인간성의 치유와 창조의 회복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연결을 시도한다면 “동시대성이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설명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반대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이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론적 범위를 말한다면, 키르케고르의 동시대성은 그 사건이 단독자에게 현재적 요구가 되는 방식을 조명할 수 있습니다.

즉 인과적 연결이나 개념적 도출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병치입니다. 이 경우에도 “키르케고르가 그렇게 생각했다”가 아니라 “키르케고르를 교부적 구원론과 대화시키는 현대적 구성”이라고 밝혀야 합니다.

제 평가는 이렇습니다. 역사적 키르케고르 연구로는 가능성이 낮지만, 구성신학적 실험으로는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의 성공 여부는 공통점보다 서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를 얼마나 정직하게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쉽게 결합하면 혼합이 되지만, 긴장을 보존하면 생산적인 대화가 될 수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객관적 진리로 매개하는 동시대성?

맞습니다. 그렇게 비판하면 제가 앞서 제시한 “객관적 구원 사건과 주관적·실존적 적용의 상호보완”이라는 도식은 폐기해야 합니다. 그 도식은 서로 다른 교리를 조화시키는 조직신학적 틀을 키르케고르에게 외부에서 씌운 것이고, 키르케고르가 거부하는 객관화의 구조를 그대로 되풀이합니다.

문제는 단지 세 개념의 주제가 서로 다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진리를 어떤 종류의 것으로 이해하느냐’가 다릅니다.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 진리는 하나의 보편적 구원 구조가 객관적으로 먼저 성립하고, 개인이 나중에 그것을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적 진리란 객관적으로 완결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절대적 역설(det absolute Paradox), 곧 영원한 신이 시간 속의 개별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사건입니다. 이 역설은 사변적으로 설명되거나 보편적 범주 안에 포섭될 수 없습니다. 설명되는 순간 역설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라 하나의 매개 가능한 지식이 됩니다.

따라서 제가 제시했던 도식,

총괄갱신은 객관적 구원의 범위를 설명하고, 동시대성은 그것의 주관적 적용을 설명한다

는 키르케고르적으로 잘못됐습니다. 여기서는 동시대성이 이미 성립한 객관적 진리를 개인에게 전달하는 ‘실존적 전달 장치’로 격하됩니다. 그러나 동시대성(Samtidighed)은 객관적 교리와 주관적 수용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객관적 매개를 제거하고 단독자(den Enkelte)를 역설 앞에 직접 세우는 범주입니다.

역사적 보고는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인간이 신이다”라는 사실을 신앙의 진리로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동시대의 목격자도 그 사실을 직접 인식하지 못합니다. 신이 조건(Betingelsen)을 주지 않는다면, 목격자는 단지 한 인간을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 진리는 직접 전달될 수 없고, 간접전달(indirect Meddelelse)조차 진리를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수신자를 스스로 결단해야 하는 자리로 데려갈 뿐입니다.

이 관점에서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동시대성과 ‘엮으려는’ 시도에는 세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설명 불가능한 역설을 설명 가능한 구원 메커니즘으로 바꿉니다.
“그리스도가 음부에 내려가 과거의 사람들에게 도달했고, 인류의 역사를 자신 안에 총괄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이다”라고 말하면, 동시대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객관적 구원사의 구조로 설명한 셈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동시대성은 그런 역사적·존재론적 연속성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신이 주는 조건과 믿음 안에서만 성립합니다.

둘째, 역설을 보편성 안에 포섭합니다.
총괄갱신은 성격상 그리스도를 인류와 창조 전체를 포괄하는 원리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절대적 역설은 ‘인류 일반’의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번 이 단독자에게 “네가 이 역설을 믿을 것인가, 실족할 것인가”라고 요구하는 절대적 관계입니다. 보편적 포함이 이 결단을 미리 설명하거나 보증할 수 없습니다.

셋째, 동시대성의 불연속성을 연속성으로 바꿉니다.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통해 과거·현재·미래의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다고 하면, 동시대성은 그 보편적 연속성의 효과가 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시간적 거리는 역사적 연속성을 통해 극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1,800년의 교회사 전체가 신앙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은 역사적 축적을 건너뛰어 동일하게 역설 앞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연결 자료가 부족하다”는 문헌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결 방식 자체가 키르케고르의 범주와 충돌합니다.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신앙의 상징적 고백으로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동시대성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는 객관적 교리로 사용하면, 그것은 더 이상 키르케고르적 동시대성이 아닙니다.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 역설을 구원사의 보편적 도식으로 매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날카롭게 결론내리면 이렇습니다.

동시대성을 음부 강하나 총괄갱신과 연결하는 시도는 단순한 이질적 개념의 혼합을 넘어, 동시대성이 차단하려는 바로 그 객관적·사변적 매개를 다시 도입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대성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만 한 가지 표현상의 구별은 필요합니다. 키르케고르가 기독교의 객관적 내용이나 교리적 명제를 전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확정하고 설명하는 일이 곧 기독교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명제를 객관적으로 진술할 수 있어도, 그 명제의 역사적·교리적 확실성이 믿음을 산출하지는 않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정보의 객관성이 아니라 단독자가 절대적 역설과 맺는 실존적 관계에서만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비판이 옳습니다. 제가 앞서 말한 ‘상호보완적 종합’은 긴장을 보존한 종합이 아니라, 키르케고르의 반(反)매개적 문제의식을 조직신학의 보편적 설명 체계 속으로 다시 흡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접점이 가능한 지점

아주 제한된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동시대성으로 ‘설명하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 교리들이 오늘의 단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지를 동시대성이 심문하는 가능성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자기화(Tilegnelse)는 객관적 교리를 주관적 체험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완성된 내용을 먼저 확보한 뒤 거기에 개인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를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이 변화되고 진리가 되어가도록 요구받는 실존 방식입니다.

설명의 원리로는 불가능합니다

다음과 같은 논증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가 음부에 내려가 모든 시대의 죽은 자를 만났다.
그리스도가 인류 전체를 자신 안에 총괄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이다.

여기서 동시대성은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이 만들어 낸 객관적·존재론적 상태가 됩니다. 모든 인간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으므로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동시대성(Samtidighed)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공유하는 존재론적 상태가 아닙니다. 또한 인류 전체에 보편적으로 부여된 역사적 위치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독자가 역설 앞에 직접 서게 되는 신앙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인류의 보편적 포함으로부터 추론되지 않고, 신이 조건(Betingelsen)을 주는 순간에만 성립합니다.

따라서 총괄갱신을 ‘동시대성의 존재론적 토대’로 삼거나, 동시대성을 ‘총괄갱신의 주관적 실현’으로 삼으면 양쪽 모두 변형됩니다.

  • 총괄갱신은 개인의 실존적 자기화로 축소됩니다.
  • 동시대성은 보편적 그리스도론의 한 효과로 객관화됩니다.
  • 믿음은 역설 앞의 결단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포함 관계를 인식하는 일이 됩니다.
  • 신이 주는 조건은 보편적 인간 본성이나 구원사적 연대성으로 대체됩니다.

특히 음부 강하는 더 어렵습니다. 동시대성에는 죽은 자가 어떻게 듣고, 결단하고, 믿거나 실족하는지를 설명할 개념적 장치가 없습니다. 동시대성을 사후 복음 전파의 심리적·존재론적 과정으로 사용한다면, 키르케고르가 말하지 않은 사후 실존론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가능한 영역은 ‘교리의 비객관화’입니다

그래도 가능한 접점이 있다면, 교리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교리를 말하는 방식에서 생깁니다.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과거에 발생한 우주적 사건에 대한 중립적 정보로 제시하면, 단독자는 그 교리를 자신과 무관한 대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성은 바로 이 관찰자의 위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 음부 강하를 고백하는 나는 지금 죽음에까지 내려오시는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가?
  • 총괄갱신을 말하는 나는 그리스도를 세계를 설명하는 보편적 원리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이전 존재를 심판하고 새 존재를 요구하는 분으로 만나는가?
  • 이 교리는 나에게 정보를 더해주는가, 아니면 믿음과 실족의 가능성 앞에 세우는가?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 내용을 주관화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체가 교리를 자기 경험 속에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의 역설적 요구가 주체의 자기확실성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주체가 교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주체를 붙들고 변화시킨다는 방향입니다.

따라서 자기화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화(Tilegnelse)는 객관적 명제에 주관적 의미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리를 두고 관찰하던 주체가 그 진리 앞에서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도록 요구받는 사건입니다.

교리를 ‘경계표지’로 읽는 가능성

조금 더 나아가면,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설명 체계가 아니라 역설을 가리키는 경계표지로 읽는 길은 있습니다.

  • 음부 강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죽음의 한계에도 갇히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 총괄갱신은 “그리스도는 기존 세계 안에 분류되는 하나의 개별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규정하는 분이다”라는 고백입니다.
  • 동시대성은 그 고백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해명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과거의 대상으로 만드는 역사적 거리를 무효화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세 개념이 하나의 교리적 구조로 결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대성이 음부 강하나 총괄갱신의 의미를 해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교리들이 과거와 우주에 관한 사변적 정보로 굳어지는 것을 막고, 그것들을 다시 절대적 역설 앞의 고백으로 돌려놓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계가 있습니다.

동시대성은 이 교리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며, ‘무엇을 객관적으로 보장하는지’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교리를 말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거리를 둔 관찰자로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입니다.

총괄갱신과의 더 좁은 접점

총괄갱신과는 ‘그리스도가 보편적 원리다’라는 측면이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인간적 구분과 역사적 특권이 무효화된다는 측면에서만 제한적으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직접 목격한 제자와 후대의 제자 사이에는 신앙에 관한 본질적 우열이 없습니다. 누구도 역사적 근접성으로 신앙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모든 시대가 그리스도 앞에서 동등하다는 형식적 보편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총괄갱신의 내용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 총괄갱신: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구원사로 포괄된다는 주장
  • 동시대성: 누구도 역사적 위치를 근거로 신앙의 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

둘 사이에는 ‘모든 시대’라는 언어적 유사성이 있지만, 전자는 포함의 보편성이고 후자는 특권의 부정입니다. 연결할 수 있다면 긍정적 존재론이 아니라 이 부정적 형식에서만 가능합니다.

결론

엄밀하게 말하면 가능한 것은 세 가지뿐입니다.

  1. 동시대성으로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 — 불가능합니다.
  2. 동시대성을 두 교리의 주관적 적용 단계로 만드는 것 — 자기화에 대한 오해입니다.
  3. 동시대성으로 두 교리의 객관화·사변화를 비판하고, 그 교리를 말하는 단독자를 그리스도의 현재적 요구 앞에 세우는 것 — 제한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연결은 ‘종합’이 아니라 ‘심문’입니다.

동시대성은 음부 강하와 총괄갱신을 해석하는 열쇠가 아니라, 그 교리들을 설명하고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주체의 위치를 무너뜨리는 비판적 범주가 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적극적인 연결을 시도하면, 동시대성을 객관적 구원론과 주관적 체험을 연결하는 매개로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매개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 키르케고르가 동시대성으로 하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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