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은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왜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가?

키르케고르는 『철학의 부스러기』를 집필하던 1844년의 한 초고에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을 남겼다.

참 신(Guden)은 반드시 사람들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것도 드러내어 정체를 폭로해서는 안 된다.— 세례 요한(Johannes Døberen), Pap. V B 6:6, 1844년, 연월일 미상

이 문장은 얼핏 보면 모순처럼 들린다. 참 신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이끌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알려지려면 자신을 드러내야 하고, 믿게 하려면 자신의 신성을 명백히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바로 이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이 『철학의 부스러기』가 말하는 성육신과 믿음의 핵심을 보여 준다.


“주의를 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참 신(Guden)이 사람들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이끌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숨어 계셔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진리( Sandhed)를 스스로 발견할 수 없고, 자신이 비진리(Usandhed)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알 수 없다면,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셔야 한다.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참 신은 단순히 인간의 기억을 일깨우는 소크라테스적 스승이 아니다. 그는 인간에게 진리뿐 아니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조건(Betingelse)까지 주는 스승이며 구원자(Frelser)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역사 안에 나타나야 하고, 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앞에 서야 한다.

참 신은 인간이 자신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 그는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자신을 따르도록 부르며, 자신과 관계를 맺도록 요청한다. 이 의미에서 계시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눈에 띄어야 한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곧이어 말한다. 참 신은 사람들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이끌면서도 “아무것도 폭로해서는 안 된다.”


왜 자신의 정체를 명백히 증명하지 않는가?

여기서 “폭로하다”라는 표현은 참 신이 자신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Forstand)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령 참 신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모든 왕국을 정복하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적을 끊임없이 행하며 자신의 신성을 증명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믿음(Tro)으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눈앞에 놓인 압도적인 사실에 굴복할 뿐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믿음은 객관적 증거에 의해 강제로 산출되는 결론이 아니다. 믿음은 역설(Paradox) 앞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적 결단이다. 믿음이 가능하려면 참 신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인간의 이해가 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도록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

따라서 참 신은 자신을 드러내되, 자신의 신성을 이해의 대상으로 완전히 내어놓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그를 단순한 지식의 대상으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다. 인간은 그 앞에서 믿거나, 아니면 걸려 넘어져야 한다.

이것이 걸림돌(Anstød)의 가능성이다.


침례(세례) 요한은 왜 언급되는가?

초고 끝에 적힌 “세례 요한”이라는 메모는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인물이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고, 그가 그리스도가 아닌지 질문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는 대신 그리스도를 가리켰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29절

또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장 30절

세례 요한은 눈에 띄어야 하지만, 자신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하지 않고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에게 돌린다.

이 점에서 세례 요한은 하나의 표지다. 표지는 눈에 띄어야 한다. 그러나 표지 자체가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표지는 자신을 보게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넘어 다른 곳을 보도록 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세례 요한의 역할을 통해 참 신의 자기 계시가 지닌 간접성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 신은 세례 요한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물론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는 동일하지 않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증인이며, 그리스도는 바로 계시된 참 신이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가 이 문장 옆에 세례 요한을 적어 둔 것은, 참 신의 현현 역시 어떤 의미에서 직접적인 자기 과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참 신은 자신에게 주의를 끌지만, 자신을 세속적인 영광이나 권력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세상을 정복하는 개선장군으로 오지 않고, 낮아진 한 인간으로 온다.

그의 외적인 모습만을 본다면 그는 다른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는 가난하고, 배척받고, 고난을 겪으며, 마침내 죽는다. 인간의 이해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영광과 위엄은 그의 모습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참 신은 자신을 나타내지만 자신의 신성을 외적 영광으로 폭로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그를 보면서도 그가 참 신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볼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성육신의 역설이 있다.


“조금 다르다”는 것의 의미

이 초고와 연결된 다른 메모에서 키르케고르는 참 신이 된 인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다른 인간들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으며, 사소한 것들에서 달랐다. 그는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고난을 당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 신의 차이가 인간의 눈을 압도하는 초인적인 영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차이는 오히려 그의 낮아짐, 세상에 대한 자유, 그리고 고난 가운데 나타난다.

그의 참된 위대함은 높은 자리에 오르는 데 있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데 있다. 그의 신성은 지배와 정복이 아니라 사랑과 자기 비움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보고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를 단지 평범한 인간으로 여길 수 있다. 어떻게 저처럼 낮고 무력하며 고난받는 사람이 참 신일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질문에서 걸림돌(Anstød)이 발생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낮아짐 속에서 참 신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믿음(Tro)이다.


계시는 강제가 아니라 초청이다

참 신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압도적인 권력과 명백한 증거로 인간을 굴복시킨다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다. 그 관계는 힘 앞에서의 복종이거나 불가피한 사실에 대한 승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을 드러내지만,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응답할 가능성을 남겨 둔다. 참 신의 계시 역시 인간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초청한다.

이 때문에 계시는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계시는 충분히 드러나 있어 인간이 참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충분히 감추어져 있어 인간이 외적 증거에 강제되지 않고 믿음으로 응답하게 한다.

참 신은 자신을 계시하지만,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게 가까이 오지만, 인간의 이해 속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눈앞에 서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선다.


간접 전달과 성육신

이 초고는 키르케고르가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는 간접 전달(indirekte Meddelelse)의 원리와도 연결된다.

직접 전달은 객관적인 정보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수학적 명제는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존적 진리는 단순한 정보 전달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명제를 아는 것과 그 사랑을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실존적 진리는 듣는 사람 자신의 결단과 전유를 요구한다.

따라서 참 신은 자신을 하나의 객관적 명제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한 인간으로 나타나 인간을 자신과의 관계 속으로 부른다. 인간은 그를 분석하고 관찰하는 데 머물 수 없으며, 그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응답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자기 계시이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자기 감춤이다. 하나님은 한 인간 안에서 완전히 가까이 오셨지만, 바로 그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이해에게는 오히려 감추어진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이해에게 해답이 아니라 역설이다.


참 신은 믿음을 가능하게 할 만큼 드러나고, 걸려 넘어질 수 있을 만큼 감추어진다

키르케고르의 짧은 초고는 『철학의 부스러기』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를 압축하여 보여 준다.

참 신(Guden)은 인간에게 다가오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자신이 비진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도, 참 신과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사실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참 신은 인간의 이해(Forstand)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믿음은 사라지고 강제된 인정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신은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감추신다. 그는 사람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이끌지만, 세속적인 영광으로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는다. 그는 낮아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고난을 당한다.

그 결과 인간 앞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린다.

하나는 걸려 넘어지는 것(Anstød)이고, 다른 하나는 믿는 것(Tro)이다.

이 초고의 뜻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참 신(Guden)은 자신을 알 수 있을 만큼 계시하시지만, 인간의 이해(Forstand)가 그를 소유하거나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폭로하지 않으신다. 그는 인간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고, 믿음(Tro)으로 자신과 관계를 맺도록 부르신다.

참 신은 믿음을 불필요하게 만들 정도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믿음이 가능하도록 자신을 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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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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