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도드와 불트만의 종말론 차이 비교
- 함께 읽을 글: 역사 앞에 불려 나온 한 사람: 누가와 키르케고르
둘 다 “종말이 이미 현재에 들어와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종말이 어디서, 몇 번, 무엇을 통해 일어나느냐에서 완전히 갈립니다. 같은 본문을 두 사람이 어떻게 읽는지를 보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도드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1935)에서 “실현된 종말론”을 제시합니다.
그의 핵심 근거는 누가복음 11:20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ἔφθασεν)입니다. 그는 마가복음 1:15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ἤγγικεν)도 이것과 같은 뜻, 곧 “이미 왔다”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종말은 예수의 사역,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 안에서 실제로 도래한 것입니다. 비유들도 이 틀로 읽습니다. 추수 비유의 추수는 먼 미래의 최후 심판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라는 지금 이 위기의 때이고, 비유들은 원래 그 위기 앞에서 청중에게 던져진 말이었다는 거죠. 도드가 비유를 예수의 삶의 자리로 되돌려 읽는 작업의 선구자가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불트만은 먼저 역사적 예수 이해에서부터 도드와 다릅니다.
그는 『예수』(1926)에서 예수 자신은 곧 임할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묵시적 선포자였다고 봅니다. 그러니 누가복음 11:20도 그에게는 나라가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임박한 나라의 징표 앞에서 지금 결단하라는 요구입니다. 현재적 종말론은 예수에게서가 아니라, 그 예수를 선포한 바울과 요한의 해석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종말은 서기 30년 무렵 팔레스타인에서가 아니라, 선포가 들려지고 누군가 그 앞에서 결단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불트만의 유명한 표현대로 예수는 “케리그마 안으로 부활했다”는 것이죠.
이걸 몇 가지 축으로 나누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종말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도드에게는 역사 안의 한 시점, 곧 예수라는 사건입니다. 불트만에게는 선포를 듣는 자의 실존, 곧 결단의 순간입니다. 도드의 종말은 달력에 적을 수 있지만, 불트만의 종말은 달력에 적을 수 없습니다.
둘째, 횟수입니다.
도드의 종말은 단 한 번(ἐφάπαξ) 일어난 사건이고, 교회는 그 이후를 살아갑니다. 성찬 같은 것을 통해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재현할 뿐, 그 사건 자체가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불트만의 종말은 선포가 있을 때마다 매번 일어납니다. 앞에서 인용한 “모든 순간에 종말론적 순간이 될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는 말이 바로 이 반복성을 말합니다.
셋째, 역사적 예수의 비중입니다.
도드에게는 예수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고 행했는지가 결정적입니다. 역사 비평으로 원래의 말씀을 복원하는 것이 곧 종말을 이해하는 길이니까요. 불트만에게는 예수가 왔다는 사실(Dass) 외에는 신학적으로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신학』의 첫 문장이 예수의 선포는 신약신학의 전제에 속할 뿐 그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넷째, 역사를 보는 눈입니다.
여기서 독일어의 Historie와 Geschichte 구분이 도움이 됩니다. 도드의 현재화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역사(Historie) 안에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구속사적 틀과 잘 어울립니다. 불트만의 현재화는 인간 실존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 곧 결단을 통해 자기 존재가 결정되는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세계사 자체에는 구원의 의미가 없다고 보죠.
다섯째, 미래에 관한 말씀들의 처리입니다.
도드는 인자의 오심 같은 미래적 표현을, 역사 너머 영원한 질서가 역사 안에 들어온 것을 묘사하는 상징으로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플라톤적 색채가 있어서,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는 구도가 강합니다. 불트만은 그것을 신화로 보고, 그 의미를 실존이 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으로 바꿉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대입하면 차이가 더 선명해집니다.
도드식으로 읽으면 이 장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예수 사건 이후의 교회를 향한 말씀이 되고, 34절의 경고는 그 역사적 상황 속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면이 됩니다. 불트만식으로 읽으면 우주적 징조들은 신화적 틀이고, 본문의 참된 요구는 34~36절의 “지금 깨어 있으라”, 곧 이 말씀을 듣는 너의 결단으로 모입니다.
참고로 두 입장 사이를 잇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아스는 도드의 입장을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sich realisierende Eschatologie)으로 고치자고 했고, 도드도 이 수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쿨만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을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날과 실제 종전일의 비유로 설명했고요.
그리고 이 구도에서 키르케고르의 자리가 흥미롭게 드러납니다.
그는 도드처럼 하나님이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철학의 부스러기》의 역설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동시에 불트만처럼 그 사건이 지금의 나에게 결단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둘을 잇는 개념이 『그리스도교의 훈련』의 “동시성”(Samtidighed)입니다. 신앙은 1,800년의 거리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역사적 사건은 과거로 남지 않고, 그렇다고 실존의 결단으로 녹아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앞에서 말씀드린 영원한 결산이라는 미래가 더해지니, 키르케고르는 도드의 과거, 불트만의 현재, 그리고 두 사람 모두가 약화시킨 미래를 함께 붙들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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