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 불려 나온 한 사람: 누가와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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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장은 흔히 거시적인 종말론의 본문으로 읽힌다. 20~24절은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25~28절은 인자의 재림이라는 우주적 사건으로 읽고, 그 둘을 어떻게 잇느냐에 따라 과거주의, 미래주의, 부분적 과거주의로 입장이 갈린다. 언약적 구속사로 읽든 세대주의로 읽든, 본문을 역사의 연대표 위에 배치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나는 이런 읽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본문이 역사를 말하는 이상 역사적 해석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데 있다. 역사를 아무리 정밀하게 배열해도 “그래서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나는 바로 이 질문에 읽기의 중심축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축을 따라가다 보면 누가와 키르케고르가 뜻밖에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 역사를 쓰되 한 사람에게
누가는 신약에서 가장 역사가다운 저자다. 그는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 차례대로 썼다고 밝히고(1:3),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까지 이어 예수에서 교회에 이르는 긴 흐름을 서술한다. 21장 24절의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는 표현은 마가복음의 평행 본문에 없는 것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종말 사이에 하나의 시대를 끼워 넣는다. 그래서 한스 콘첼만은 『시간의 중심』에서 누가를 종말의 긴박성을 구속사의 시대 구분으로 바꾼 신학자로 읽었다.
그런데 누가의 책은 처음부터 한 사람에게 쓴 책이다. 거대한 역사를 서술하면서도 그는 데오빌로라는 한 개인에게 이 책을 바친다(1:3~4). 그리고 누가는 역사를 말할 때마다 그 역사를 듣는 사람에게 돌려놓는다.
누가에만 있는 13장 1~5절이 대표적이다. 사람들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을 전하자, 예수께서는 실로암 망대 사고까지 함께 언급하시며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고 물으신다. 그리고 곧바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신다. 역사적 재난을 해석하려는 관찰자의 질문이 듣는 자 자신의 회개로 돌아온다.
사도행전 1장 6~8절도 같다.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거시적 시간표를 묻자, 예수께서는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하시고 곧바로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다. 시간표는 하나님의 몫이고, 너희의 몫은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21장 자체도 그렇다. 거대한 징조들 사이사이에 “너희”를 향한 명령이 계속 끼어든다. 미혹받지 않도록 보라(8절),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3절), 너희의 인내로 영혼을 얻으라(19절), 스스로 조심하라(34절), 항상 깨어 기도하라(36절). 우주적 징조를 말하면서도 초점은 끝내 34절의 “마음”으로 돌아온다. 누가는 시간의 선 전체를 그리면서도, 그 선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저자다.
키르케고르: 편지를 해독하는 자와 받는 자
키르케고르는 『자기 시험을 위하여』(1851)에서 성경을 읽는 두 방식을 대조한다. 하나는 사전과 문법책을 옆에 두고 외국어로 된 연애편지를 해독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 편지를 받은 연인이다. 해독은 필요하지만, 해독으로 끝나면 편지를 읽은 것이 아니다. 같은 책에서 그는 나단과 다윗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다윗은 나단의 비유를 듣고 훌륭한 재판관처럼 판결을 내리지만,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들었다.
그는 누가의 종말 본문도 이렇게 읽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2부의 마지막 글 「최후통첩(Ultimatum)」에는 한 시골 목사의 설교가 실려 있는데, 본문이 누가복음 19장 41~48절, 곧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그 멸망을 예언하시는 대목이다. 이 예언은 21장 20~24절과 평행을 이룬다. 설교는 예루살렘 멸망 앞에서 “그 안에 무고한 자도 있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옳으신가”라는 관찰자의 질문을 던지다가, 그 질문을 뒤집어 듣는 자에게 돌린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언제나 옳지 않다는 고백으로 말이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움직임과 정확히 같다.
울티마툼이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라틴어 ultimatum은 “마지막”을 뜻하는 ultimus에서 왔고, 거부하면 전쟁이 되는 최종 요구를 가리킨다. 종말론이 “마지막 것들”에 관한 교리라면, 여기서 마지막 것들은 지금 응답해야 할 마지막 말이 된다. 물론 이것은 해석이다. 일차적으로 이 제목은 가명 저자가 친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라는 문학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그 위에 종말론적 울림이 얹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강화집마다 “나의 독자, 그 단독자에게”라는 헌사를 붙였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책을 바친 것과 묘하게 겹친다.
닮은 점
두 사람은 모두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누가는 역사가였고, 키르케고르도 하나님이 특정한 시점에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역사적 역설을 신앙의 중심에 두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역사를 관찰의 대상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누가는 역사를 말할 때마다 “너희”를 부르고, 키르케고르는 역사 앞에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둘 다 전체를 말하면서 한 사람에게 말을 건다.
또 둘 다 미래를 지우지 않는다. 누가의 종말은 먼 미래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지금 깨어 있으라는 요구다. 키르케고르도 영원한 결산이라는 미래를 끝까지 실재로 붙든다. 미래의 심판이 실재하기 때문에 현재의 매 순간이 결정적이 된다는 구조다. 이 점에서 두 사람은 종말을 전적으로 현재의 결단으로 녹여 버린 불트만식 실존론적 해석과도 구별된다.
차이점
첫째, 역사적 지식의 역할이 다르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배운 것의 “확실함”(ἀσφάλεια, 1:4)을 알게 하려고 역사를 차례대로 쓴다. 역사적 서술이 신앙을 든든히 하는 데 쓰인다. 반면 키르케고르는 『비학문적 후서』에서 역사적 지식은 아무리 정밀해져도 근사치에 머물며, 근사치는 영원한 행복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누가는 역사를 통해 한 사람에게 이르고, 키르케고르는 역사만으로는 한 사람에게 다 이를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한 사람이 서는 자리가 다르다. 누가에게 증인은 성령을 받은 공동체 안에서 증언하는 사람이다. 사도행전 전체가 교회의 이야기다. 키르케고르의 단독자는 군중에서, 때로는 이름뿐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사람이다. 이 차이는 누가가 막 태어나는 교회를 향해 썼고, 키르케고르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리스도교 국가를 향해 썼다는 역사적 상황의 차이이기도 하다.
셋째,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누가는 서술하고, 키르케고르는 가명과 간접 전달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결단의 자리에 서도록 몰아간다. 누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키르케고르는 이야기 속에 독자가 비치는 거울을 놓는다.
맺으며
누가와 키르케고르는 역사를 대하는 인식론은 달라도, 역사 앞에서 한 사람을 불러 세운다는 목적에서 만난다. 누가의 확실함도 결국 데오빌로가 관찰자로 남으라는 확실함이 아니라 증인으로 살 수 있게 하는 확실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복음 21장을 거시적으로 읽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거기서 멈추면 우리는 나단의 비유를 듣고 판결만 내리는 다윗이 된다. 예루살렘이 언제 무너졌는지, 이방인의 때가 언제 차는지를 아는 것보다 먼저 들어야 할 말이 있다.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리고 그 말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듣게 된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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