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가 되다

알키비아데스가 본 소크라테스의 역설

Symposium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Alcibiades가 술에 취한 채 연회장에 들어와 Socrates를 찬양하는 대목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박문제 역(파주: 현대지성, 2021), 315(222b)쪽

알키비아데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그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누구보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름다움으로 소크라테스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소크라테스에게 붙들렸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사랑하는 자처럼 보였지만,
결국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가 되어 버렸다.”

이 말은 단순한 연애 감정의 역전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너를 원한다.”
“너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릅니다.

그는 누구를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자기 소유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질문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 상대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것을 깨웁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대화한 사람은 그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안에서 새로운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들 내면에 깨어난 물음입니다.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소유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를 자기에게 묶어 두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보내는 사랑입니다.

그는 상대에게 말합니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보라.”


바로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역설이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처럼 다가갑니다.
그러나 누구의 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끝내 붙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상대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상대를 자기 자신과 만나게 합니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끝내 소크라테스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통해 깨어난 자기 자신의 영혼이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소크라테스를 깊이 사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음 일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NB31:113, Pap. XI1 A449

키르케고르에게 소크라테스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를 자기에게 의존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 앞에 홀로 서게 만드는 사람.

그것이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어쩌면 참된 스승이란
자기에게 사람을 묶어 두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앞에 서도록 돕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처럼 다가왔지만
결국 사랑받는 자가 되었던 사람.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 사람.

그래서 알키비아데스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이 울립니다.

“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내가 붙잡혔다.”


구독하시면 더 많른 정보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Categories: 기독교

0 Comments

답글 남기기

Avatar placeholder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