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13:47, Pap. X2 A 116, 1849년
‘입문(Indvielse)’은 그 첫 단계, 곧 형식 규정(Formbestemmelsen)에 있어 개인(Individ)이 자기 자신 안으로 응축되는 것(Fortættelse)이다. 한 개인이 어떤 노력을 시작하면서, 그 노력이 유한한 목적들(endelige Formaal)의 달성으로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그 달성을 가로막으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거나 스스로 분명히 자각한다면, 그는 내면으로 향하여 자기 중복(Selvfordoblelse)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단지 인간적인 것(det blot Humane)일 뿐이다. 이제 종교적인 것(det Religieuse)은 그 개인이 모든 것을 어느 정도로 하나님과 연관 짓느냐에 달려 있다.
NB17:97, Pap. X3 A 28, 1850년
일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일을 거스르는 질적 중복(qvalitativ Fordoblelse)이거나, 아니면 인격의 질적 단순성(qvalitativ Eenfoldighed)이다. 제3의 가능성은 없다(Tertium non datur).1
NB22:118
하나님의 섭리(Guds Styrelse)2
설령 하나님께서 그 밖의 온 세계를 자신의 권능 아래 두심으로써 외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사람에 대해 섭리(Styrelsen)이실 것이다.3 사람은 본래 자기 안에 그러한 중복(Fordoblelse)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실하지 않게 되는 순간, 허용될 수 없는 수단들을 사용하는 순간 등등, 그는 그만큼 자기 자신의 운명이 된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장담하더라도, 정작 그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바로 당사자 자신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안정해지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고 만다.
한 사람이 지금 굴복하고 마는 바로 그 상황을, 그는 이전 같았으면 승리로 극복했을 것이다. 차이는 이것이다. 그때는 그 사람 안에 더 많은 진실이 있었지만, 이제 그는 불안정해졌다는 것이다.
NB28:87, Pap. XI1 A 33, 1854년
중복(Fordoblelsen)의 또 다른 사례
누가복음 21장 17–18절: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시고 그만큼 극심한 위험에 내맡기실 것이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그만큼 철저한 돌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양쪽 모두에서 조금씩 양보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교(Christendom)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우리가 가장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무난하고 그럴듯한 개연성의 중용이 생겨난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교를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NB32:143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Det Dobbelttydige)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며(Dobbelttydigt), 중복(Fordoblelse)이다. 바로 이것이 힘겨운 점이며, 다른 사람들과 서로 이해하는 일까지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점이다.
단일한 의미(Eenkelttydighed)에서 행복하거나 고통받는다면, 다른 사람들과 서로 이해하는 일은 얼마나 직접적이고 쉬운가.
그러나 고난이 복을 뜻한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고난이 복을 뜻하는 이상 그 고통을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도 없다. 또한 복에 관해 말하든 고난에 관해 말하든,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다. 한쪽에는 언제나 다른 쪽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단일한 의미를 지닌 것(det Eenstydige)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비사회성(U-Socialiteet)을 지향하도록, 곧 단독자(Enkeltheden)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과 차단되도록 마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설
여기까지의 일기에서 중복(Fordoblelse)은 같은 것이 두 번 되풀이되는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실존 안에서 서로 반대되는 두 의미나 운동이 동시에 성립하는 구조다. 따라서 ‘중복’은 단순한 복제라기보다 겹침, 곧 한쪽 안에 다른 쪽이 함께 들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가장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중복(Fordoblelse)이란 한 사람이 외적으로 행하거나 겪는 것과, 그 행위와 고통이 내적으로 지니는 의미가 서로 반대되면서도 동시에 하나를 이루는 실존적 구조다.
1. 자기 중복: 행위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관계하는 것
NB13:47의 자기 중복(Selvfordoblelse)은 사람이 단순히 목적을 향해 행동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자기 자신을 동시에 의식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노력은 어떤 현세적인 목적(timeligt Formaal)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노력은 오히려 그 목적의 달성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길을 택하면, 개인에게 두 층위가 생긴다.
- 외적으로 노력하고 행동하는 자기
- 내적으로 그 행동의 의미와 대가를 의식하는 자기
자기가 둘로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자기가 동시에 자기 행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중복이다.
2. 질적 중복: 일하면서 자기 일을 거스르는 것
NB17:97은 중복을 더욱 날카롭게 규정한다.
“일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일을 거스르는 질적 중복(qvalitativ Fordoblelse)”
여기서 중복은 단순히 생각이 많거나 마음이 양분된 상태가 아니다. 어떤 일을 행하면서 그 일이 직접적인 성공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동시에 역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전하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명예나 권력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외적으로는 일을 추진하면서 내적으로는 그 일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거스른다.
따라서 중복은 행위와 자기부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구조다.
3. 인간 안의 중복: 자기 자신이 자기 운명이 되는 것
NB22:118에서는 중복이 인간의 내적 구조로 나타난다. 사람은 진실하지 않게 되거나 부당한 수단을 사용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숨길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완전히 숨기지 못한다.
- 밖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 안으로는 자신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내적 앎 때문에 그는 불안정해지고,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진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Guds Styrelse)는 반드시 외부에서 기적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안에 지닌 중복 자체가 심판의 구조로 작용한다. 거짓된 사람은 자신의 거짓 때문에 약해져, 이전이라면 이겨 냈을 상황에서도 무너진다.
중복은 이처럼 양심과 자기관계 안에서 작용하는 내재적인 섭리이기도 하다.
4. 그리스도교적 중복: 버림받음과 돌봄의 동시성
NB28:87에서 중복은 가장 역설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극심한 위험에 내맡겨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돌봄의 대상이다. 여기서 고난과 보호는 절반씩 타협되지 않는다.
- 어느 정도 미움을 받지만 어느 정도 안전한 것이 아니다.
- 철저히 위험에 놓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보호받는다.
인간은 이 두 극단을 조금씩 깎아 내어 편안한 중간 지대를 만들려 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중복은 두 극을 완화하여 중용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극을 모두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다.
5. 의미의 중복: 고난이 곧 복을 뜻하는 것
NB32:143에서 중복은 이중적 의미(Dobbelttydighed)로 설명된다. 그리스도교에서 고난은 단순히 불행만을 뜻하지 않고, 동시에 복(Salighed, 구원)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난을 말할 때 복이 함께 함축되고, 복을 말할 때 고난이 함께 함축된다. 어느 한쪽만 떼어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이 의미가 단일하다.
- 행복은 좋은 것이다.
- 고통은 나쁜 것이다.
- 성공은 긍정적이다.
- 실패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실존에서는 의미가 중복된다.
- 고통이 복일 수 있다.
- 실패가 진실의 표지가 될 수 있다.
- 버림받음 속에 하나님의 돌봄이 있을 수 있다.
-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성취일 수 있다.
중복과 반복의 차이
반복(Gjentagelse)이 어떤 것이 다시 이루어지는 시간적 운동이라면, 중복(Fordoblelse)은 한 사건이나 한 실존에 두 층위가 동시에 겹쳐 있는 구조다.
- 반복: 다시 일어남
- 중복: 동시에 겹쳐 있음
따라서 자기 중복은 ‘자기를 한 번 더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자기와 그 행위의 의미를 의식하는 자기가 겹쳐지는 것이다.
종합
이 일기들에서 중복은 세 가지 차원을 가진다.
- 자기관계의 중복
사람은 행동하면서 동시에 그 행동 속의 자신과 관계한다. - 운동의 중복
어떤 일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세속적 성공을 향한 그 일의 움직임을 거스른다. - 의미의 중복
고통과 복, 버림받음과 돌봄, 실패와 성취처럼 반대되는 의미가 동시에 성립한다.
그러므로 키르케고르에게 중복은 모순을 제거하는 논리적 해결이 아니다. 오히려 모순되는 양쪽을 모두 온전히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단일한 의미에서 떼어 내어, 단독자(den Enkelte)로서 하나님과 관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JP 3권, 909쪽 주석 번역
중복(REDOUBLING)
키르케고르는 중복(Fordoblelse) 개념을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Væren)의 유형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범주로 사용한다. 이 존재는 철학적 존재론의 출발점을 이루는 경험적이고 유한한 존재와 구별된다. 철학적 사유는 이러한 존재를 탐구함으로써, 그 존재를 축약한 어떤 추상적 개념들에 도달할 수 있다. 익명의 저자 클리마쿠스(Climacus)는 이 개념들이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존재가 무엇인지를 추상적으로 반영한 것, 곧 그것의 추상적 원형”이라고 말한다(후서, 170쪽).
철학적인 존재 개념은 경험적 존재를 추상화한 것이므로 어떠한 현실적인 중복도 포함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중복을 이루는 두 부분이 모두 현실적일 때에만 현실적인 중복이 일어난다. 이러한 현실적 중복은 오직 신앙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 영역에서는 경험적 존재에 맞서 더 높은 윤리적 또는 종교적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두 요소, 곧 경험적 존재와 더 높은 실재는 인간의 원초적 존재를 중복시킨다. 인간의 원초적 존재는 경험적으로 볼 때 두 부분, 곧 몸과 정신(body-mind)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참된 중복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단지 한 부분, 곧 시간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의 과제는 이 두 부분을 중복 안에서 종합하는 것이다. 이 종합이 현실화되면 인간 실존의 각 요소는 시간적 표현과 영원한 표현을 동시에 지닌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갖는다. 이처럼 신앙의 영역에서 중복은 하나의 존재론적 범주가 된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 261쪽에서 시간성 안의 중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중복 그 자체는 결코 시간적인 대상을 갖지 않는다. 시간적인 것이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것 역시 자신의 특성들 안에서만 존재한다. 반면에 한 사람 안에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한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중복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이중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바깥으로 향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향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방향이다. 그러나 이 양자는 하나이며 동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중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범주로서의 중복은 인간이 영원한 자기를 지니고 있거나 정신(Spirit)이 되도록 정해진 존재임을 나타낸다. 키르케고르는 중복 안에서 낮은 자기가 인간 안의 영적인 요소, 곧 더 깊은 자기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중복(self-redoubling; Selvfordoblelse)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그러나 자기 중복은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중복을 이루려고 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느냐에 달려 있다(X² A 116). 부정적 형태의 자기 중복은 특히 『죽음에 이르는 병』 201쪽 이하에서 다루어진다. 또한 고차적인 자기가 초월적인 능력의 도움 없이도 중복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본 칸트의 견해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비판에서도 다루어진다(X² A 396).
중복은 정신의 실재가 지닌 특징이므로, 키르케고르는 일기에서 심지어 하나님 안의 중복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겉으로 서로 반대되는 두 성질, 곧 온유함과 엄격함이 중복을 이룬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중복을 이해할 수 없다(XI² A 130).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무한한 중복(infinite redoubling)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신으로서 자신의 주체성 전체를 무한히 통찰하고 지배하심으로써 자신을 중복하신다는 뜻이다(XI² A 97). 이러한 일은 인간에게는 지성적으로도 실존적으로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키르케고르가 사용하는 변증법적 중복(dialectical redoubling)이라는 표현도 언급해야 한다. 이것은 그의 의사소통의 변증법과 관련된다. 변증법적 중복에서는 한 인간의 삶을 서로 질적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것에 비추어 본다. 인간은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양자를 종합하려 할 수도 있다. 키르케고르는 변증법적 중복을 “질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구성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설명한다(『그리스도교의 훈련』, 132쪽).
키르케고르 작품의 번역자 대부분은 『사랑의 역사』의 번역자들을 포함하여 중복(Fordoblelse)과 중첩·재복제(Reduplikation)의 차이를 무시해 왔다. 따라서 독자가 이 항목에서 언급한 번역서들을 찾아보면, 대개 ‘중복(redoubling)’ 대신 ‘재복제(reduplication)’를 비롯하여 ‘복제(duplication)’, ‘이중으로(doubly)’, ‘이중성(duplexity)’, ‘짝을 이루어(by pairs)’, ‘이중됨(doubleness)’ 등의 표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키르케고르의 고유한 용어인 중복(Fordoblelse)을 옮긴 표현들이다.
주석
- 제3의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Tertium non datur): 라틴어로 ‘제3의 것은 없다’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고전 논리학에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식화한 배중률(det udelukkede tredje)을 가리킨다.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 사이에는 어떠한 ‘제3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다. ↩︎
- 섭리(Styrelsen): 하나님의 섭리(Guds Styrelse)를 뜻한다. N. E. 발레와 C. B. 바스톨름의 『덴마크 학교용 복음주의 그리스도교 교리서』(일명 『발레의 교리서』) 제2장 제2절 「성경이 하나님의 섭리와 피조물의 보존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참조하라.
제3항은 다음과 같다.
“세계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선하심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스리신다. 그리하여 선과 악 모두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결과에 이르게 하신다.”
제5항은 다음과 같다.
“삶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가장 선한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만족할 이유가 있다.”
코펜하겐, 1824년판[초판 1791년], 키르케고르 장서 목록 183번, 23쪽 및 24–25쪽. ↩︎ - “설령 하나님께서 … 세계를 자신의 권능 아래 두심으로써 … 않으신다 하더라도(Selv om Gud ikke … ved at have … Verden i sin Magt)”: 문장에는 ‘섭리이시다(vilde være Styrelsen)’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즉 “설령 하나님께서 그 밖의 온 세계를 자신의 권능 아래 두심으로써, 외적으로는 섭리이시지 않다 하더라도”라는 뜻이다.
외적으로(udvortes fra):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 곧 외면적인 고찰에 따르면.
이를 반영하면 본문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다듬을 수 있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 밖의 온 세계를 자신의 권능 아래 두신다는 외면적 관점에서는 섭리(Styrelsen)가 아니시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섭리이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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