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31_trans 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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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31:38, Pap. XI1 A 366(1854년)

이렇게 상상해보자. 평범한 마부가 아주 놀라울 정도로 흠이 없이 완벽한 5년생 말,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코를 킁킁거리는 패기 넘치는 말의 이상(ideal)을 발견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글쎄, 나는 이 말을 사기 위해 경매에 참여할 수 없고, 살 형편조차 안 됩니다. 설사 내가 살 수 있다 해도 내가 부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나고 그 놀라운 말이 절름거리고, 못쓰게 되었을 때, 마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이 말을 사기 위한 경매에 뛰어들 수 있고, 살 만 합니다. 이제 나는 아직 남아있는 말의 가치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죠. 이제 약간의 돈만 쓰고 이득을 얻으려는 내 방식이 통할 것입니다.”

국가와 기독교에도 마찬가지다. 세상 속으로 들어온 고매하면서도 구별된 기독교에 대해서, 모든 국가는 부득이하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나는 이 종교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나를 이 종교로부터 구하시고, 보호하소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종교는 나에게 확실한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세기에 걸쳐 기독교는 비뚤어지고 노쇠해졌고, 마지막 다리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바보가 되었을 때, 국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세요, 저는 그 경매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합니다. 저는 이제 기독교를 사용할 수 있고 충분히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재정비하기 위해 약간의 돈을 쓸 수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재정비의 대가로 다시 그 본래의 모습이 된다는 농담을 국가에게 한다면, “으악!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소서. 이 종교가 나의 파멸이라는 것을 어느 나라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마부는 자신이 똑똑한 구매를 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20살의 늙은 말을 패기 넘치는 5살짜리 말로 되돌릴 생각이 없다. 모든 마부들이 만장일치로 낸 의견에 따르면, 국가는 영원히 젊은 기독교에 의해 섬김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마부 역시 패기 넘치는 5살짜리 말로는 섬김을 받을 수 없다.(JP 4:4232 [1854])


NB31:42, Pap. XI1A371

오, 소크라테스여,

결국 당신은 인간 중에서도 단 하나의 참된 사상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른바 기독교 철학자들이란, 얼마나 혼란스러운 머리들인가! 유명한 어거스틴(Augustine)을 보라!

그는 한때 도나투스파(Donatists)에 대항하여 이렇게 논증했다:

“그대들―십여 명의 사람들―은 전체 기독교 교회를 마주하며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마치 그대들 몇몇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 소크라테스여,
이것이 사상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숫자를 근거로 진리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사상가라니!
그러나 기독교는 바로 단독자 문제 위에 세워져 있지 않은가?


NB31:53, Pap. XI1 A 383

나 자신에 대하여

내게는 한 가지 선물이 주어졌으며, 그것도 내가 이를 일종의 천재성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주어졌다. 그 선물은 대화할 수 있는 능력, 모든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행운과도 같은 선물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 내가 당대에서 가장 침묵하는 사람임을 절대적으로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침묵이 또 다른 침묵 속에 감춰져 있다면, 그것은 의심을 불러일으키며, 마치 무언가를 배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이 가장 뛰어난 대화의 재능 속에 감춰져 있다면? 그것은-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말하건대!-진정한 침묵이다.

*여백에서: 적어도 자신이 침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NB31:54, Pap. XI1 A 384

기독교에 따른 존재(Tilværelsen) 법칙

그 법(그리고 다시 말해 이는 은혜다), 즉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심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해 설정하신 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과 단독자로서 관계를 맺으라.

네가 지혜롭든 단순하든, 뛰어난 재능을 가졌든 평범하든 전혀 상관없다. 단독자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라. (오, 신적 은혜여! 하나님께서 한 개인과 관계를 맺고자 하시다니! 그것도 각각의 단독자로서!) 단독자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용기를 가져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의 능력과 가능성에 맞게 모든 것을 조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먼저 관계를 맺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존재하는 것(være til) 자체, 존재(Tilværelsen) 그 자체가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두려워한다-그는 먼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내면의 본능(짐승과 같은 속성)이 승리하여 결국 이렇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과 같아야 한다”를 실존의 첫 번째 원리로 삼는 모든 실존 방식은 결국 낭비된 실존, 궁극적으로는 망쳐진 실존(forspildt Existens)이다. 그리고 기독교적으로 볼 때, 그것은 단순한 실수(mistake)가 아니라 죄(Brøde)에 의해 이루어진 타락이다.

이런 수백만의 존재 법칙(Tilværelses Lov)은 이렇다. 이런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백만의 인간 존재, 이 흉내내는(Efterabelse) 집단-이들은 감각적으로 보면 마치 거대한 것처럼 보이고, 엄청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감각적으로는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보자면, 이 집단, 이 수백만은 “0”보다도 더 없는 무(nothing), 낭비되고 망쳐진 실존들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 파리 한 마리, 심지어 독을 가진 벌레까지도 돌보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낭비되지도, 망쳐지지도 않은 존재(Tilværelse)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흉내내는 집단, “다른 사람들처럼” 살기를 선택한 인간은 결국 망쳐진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토록 자비를 베푸셔서, 각각의 단독자와 관계를 맺고자 하셨다. 그리고 그 은혜의 본질 자체가 하나님과 단독자로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사람들처럼”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위엄에 대한 범죄(Majestæts-Forbrydelse)”1에 해당한다. 그에 대한 형벌은? 그 형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히 무시되는 것(ignoreres af Gud)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모든 지식의 전달(또는 강의, doceren)는 낭비된, 망쳐진 존재(Tilværelse)이다. 학자들은 점점 더 교묘하게 논리를 다듬고 지식을 쌓아갈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망쳐진 존재(Tilværelse)로 남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야 한다”-이것이 모든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지혜의 법칙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혜야말로, 기독교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현명하여 스스로 영원을 속이는 지혜”일 뿐이다.

* *

아아, 나는 슬픔 속에서 이것을 기록한다. 나 자신도 불행하면서도 인간들과 인간들의 무리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보인 짐승 같은 행태가 너무나도 가혹하여, 이를 견디기 위해 나는 점점 더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나는 부정할 수 없이 기독교(Χstd.)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진리는 나에게 고통을 준다.


NB31:62, Pap. XI1 A 393(1854년)

공식적 기독교의 선포


NB31:68, Pap. XI1 A 400(1854년)

사도

결국 사도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무섭고 비인간적이며 초인간적인 고통과 공포가 따르기 때문에 감히 사도가 되려고 하지 않고 그 고통에서 면제되기를 바라는 우리 인간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자주 말했듯이 기독교 세계를 탓하는 것은 그 문제가 위선적인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가 되기를 바랄 수 없을 만큼 겸손합니다.”

이 거짓말로 인해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기독교 세계를 외면하셨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에 행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과 함께하기를 계획하실 때,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께 정직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사기 치는 본성은 본능적으로 다음과 같이 계산했다.

“그렇게 정직해지면 우리가 사도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고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제하실 것이며, 우리를 그의 계획에 밀어 넣는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그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될 것입니다. 사탄에 의해,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오, 당신 인간이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즉, 하나님은 당신을 경멸하신다.

그러나 사도가 된다는 것은 모든 고통과 공포를 뛰어넘는 고통과 공포임이 분명하다.

계속해서 위험에 처하고, 곤경에 처하고, 궁핍에 처하고, 고통에 처하고, 조금의 확률(probability)도 계속 부정해야 한다.2 그러나 인간에게 확률은 물고기에게 물이나 새에게 공기와 같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확률을 부정하는 것은 극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치고 기진맥진한 그에게 죽음을 허락하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절대적인 극도의 순간에, 그는 겁에 질려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진실로 여기에, 기적의 도움이 존재한다. 위대하신 하나님이여, 기적이다! 그렇다. 충분히 맞지만 그런 식으로 실천하는 것은 바퀴가 부러 지거나 끌려가서 4등분되는 것보다 더 나쁜 고문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기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이것은 오히려 또 하나의 고통이다. 주변 세계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 때문에 고통당할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오, 그는 아무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그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과 관련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그때 아마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마 아닐 수 있다. 기적, 이것은 끔찍한 고문이다.

보라, 이것은 고문이다!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무한한 뜻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먼저 인간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해야 합니다. 두려운 작업이다. 그리고 당연히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만큼 고통스럽게 철저하게 시험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죽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문 중에 의사가 입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사가 실수하여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분께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고문을 받을 때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의 체력은 점점 줄어들고 죽음은 점점 가까워지지만, 전지전능한 존재만이 매 순간 완전히 새로운 힘을 제공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고통이다. 사실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형언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일이기 때문에 사도에게는 항상 한 가지 부가되는 부담이 있다. 즉, 감사해야 할 의무, 무한한 은혜에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사도에게 유보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우리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사도이다. 진리의 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절대적으로, 제거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다. 당신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도록 유쾌하고 사랑스럽게 자신을 내버리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 가장 극심한 가난 속에서 단 한 번만 사는 것보다 무한히 더 힘든 것은, 가장 극심한 가난과 그 이후 평화,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보다 무한히 더 힘든 것은, 절대적으로 극심한 순간에 기적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한번 기적이 있다. 이것은 가장 끔찍한 형태의 담요던지기(Himmelspræt)3이다.


NB31:111

어떤 생각들(Tanker)이 있다. 바로 가장 높은 생각들(de høieste)이다. 모든 인간(ethvert Menneske)은 젊은 시절(som Yngling)에 그 생각들에 대해 하나의 인상(Indtryk)을 받고, 하나의 기억(Mindelse)을 지닌다. 그러나 이후 그는 이른바 분별 있는 사람(fornuftig)이 되어 가고, 그 생각들은 잊혀지고 만다.

예외적으로 몇몇 단독자들(nogle Enkelte)은 오히려 젊은 시절의 그 인상(Ynglings-Indtrykket)을 처음부터 받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들의 젊음(Ungdom)은 어두운 우울(mørkt Tungsind) 속에서 지나간다. 그러다가 그들이 장년의 나이(Mandens Alder)에 이르고, 동시에 충분히 형성되고(dannede) 충분히 발전하게 되었을 때(udviklede), 비로소 그 생각들이 깨어난다(da vaagne disse Tanker). 그리고 그것들은 젊은이의 열정(Ynglings Begeistring)과 함께 깨어난다.

⸻핵심 개념어

  • Modenhed — 성숙
  • Umodenhed — 미성숙
  • Tanker — 생각들
  • de høieste — 가장 높은 것들 / 가장 고차원적인 생각들
  • Indtryk — 인상
  • Mindelse — 기억, 흔적처럼 남은 회상
  • Yngling — 청년, 젊은이
  • fornuftig — 분별 있는, 합리적인, 세속적으로 ‘현명한’
  • Enkelte — 단독자들
  • mørkt Tungsind — 어두운 우울, 깊은 침잠
  • Mandens Alder — 장년의 나이, 성숙한 인간의 시기
  • dannet — 형성된, 교양을 갖춘
  • udviklet — 발전된, 전개된
  • Ynglings Begeistring — 젊은이의 열정, 청년적 열광
해설 보기

이 짧은 일기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려는 것은 대략 이런 뜻으로 읽힙니다.

인간은 젊을 때 한 번 영원한 것(det Erotiske? 아니고 오히려 det Evige에 가까운)의 흔적을 스친다. 그러나 대부분은 “현실적이고 분별 있는 사람(fornuftig)”이 되어 가면서 그것을 잃어버린다.

반면 어떤 단독자는 젊을 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채 우울 속을 통과한다. 그러나 훗날

충분히 형성된 뒤에 그 생각이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처음보다 더 젊은 열정으로 되돌아온다.

마치 이는 반복(Gjentagelse)의 구조와도 닿아 있습니다. 젊음의 직접성이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상실 이후에 다시 돌아오는 젊음, 즉 더 깊어진 청년성으로 귀환하는 것이지요.


NB31:112

열광가들(Sværmere)

Lessing은 어디선가 아주 정확하게 이렇게 지적한다. “열광가(Sværmer)”라는 말은 “떼(Schwarm)”에서 나온 말이며, 따라서 그것은 본래 사회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곧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려는 충동, 떼를 지어 함께 달려가려는 성향(Trang til at rende sammen i Flok)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소크라테스를 “열광가(Sværmer)”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독한 열광가(en eensom Sværmer)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것은 너무도 경이로워서 하나의 현상(Phænomen)이라 불릴 만하며,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Meteor-Steen)처럼

극히 드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곧 소크라테스(Socrates)이다.

고독한 열광가란 불과 물을 함께 놓는 것처럼(at sætte Ild og Vand sammen) 놀라운 일이다. 또는 정숙한 쾌락주의자(en kydsk Vellystning)라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고독한 사교인(en eensom Selskabsbroder)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바닥 없는 그릇(Kar uden Bund) 속에 액체(et flydende Legeme)를 담아 두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다.

놀라운 소크라테스여! 가장 높은 열정(den høieste Begeistring)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가장 탁월한 성찰(den eminenteste Reflexion)과 지혜(Klogskab)안에 감추어 두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치 바닥 없는 그릇 속에 액체를 담아 두는 것과 같다. 우리 다른 사람들(os Andre)에게는 그것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릇에 바닥이 없으면 액체는 곧 아래로 흘러내려 버린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 성찰(Reflexion)과 지혜(Klogskab)가 발전할수록, 그만큼 그것은 열정(Begeistring)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아 간다.

놀라운 소크라테스여! 참으로 그것은 그대가 행한 하나의 예술이었다(et Kunststykke). 콜럼버스의 달걀(Columbuss Æg)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예술이다.4그런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속된 재주(plebeiiske Kunststykker)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예술은 그런 종류의 재주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속된 재주는 한 사람이 해 놓고 나면 그 다음에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예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지금도 똑같이 어렵다. 그리고 실제로 그 누구도 그대를 따라 해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 교수들(Professorer)과 사강사들(Privat-Docenter)의 무리 가운데서는 누구나 자기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고 생각한다.5 이 무리(Pak)에 대해 나는 오히려 그대가 은밀히(ganske geheimt) 말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알키비아데스(Alcibiades)가 전하듯, 그대가 늘 짐 나르는 나귀들(Pak-Æsler)에 대해 말했을 때 말이다.

핵심 개념어

  • Sværmer — 열광가
  • Schwarm — 떼, 무리
  • det Sociale — 사회적인 것
  • eensom — 고독한
  • Phænomen — 현상
  • Meteor-Steen — 운석
  • Begeistring — 열정, 감탄에 가까운 고양된 열정
  • Reflexion — 성찰
  • Klogskab — 지혜, 영리함
  • Kunststykke — 예술적 기교, 경이로운 솜씨
  • Columbuss Æg — 콜럼버스의 달걀
  • Pak — 떼거리, 군중, 무리(매우 경멸적 표현)
  • Pak-Æsler — 짐 나르는 나귀들
해설 보기

⸻이 일기에서 키르케고르가 감탄하는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열정(Begeistring)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성찰(Reflexion)을 지닌 자였다. 대부분의 인간은

* 열정이 깊어지면 성찰을 잃고,
* 성찰이 깊어지면 열정을 잃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가장 높은 열정”과 “가장 높은 반성”을 동시에 지닌 유일한 존재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그를 “고독한 열광가(en eensom Sværmer)”라고 부릅니다. 정말 아름답고도 아주 키르케고르다운 소크라테스 찬가입니다.


NB31:113, Pap. XI1 A449

소크라테스(Socrates)

사르다나팔(Sardanapal)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자기 무덤(Grav)에 이런 글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나는 삶의 모든 향락을
나와 함께 가져갔다.”6

이에 대해 이미 어떤 이교도(en Hedning)가 훌륭하게 이렇게 논평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자네는 살아 있는 동안조차 그 향락들 가운데 단 하나도 붙잡아 둘 수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무덤으로 가져간다는 것(at tage Alt med sig i Graven)은 그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방식으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통과하게 흘려보낼 뿐이며(lade Alt gaae igjennem sig) 결국 무덤으로 가져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slet Intet).

아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오직 그 사람만이 이 과제(Opgaven)를 해결했다. 그는 모두, 모두 모두(Alt, Alt, Alt)를
자기 무덤으로 가져갔다. 경이로운 소크라테스여(Vidunderlige Socrates)! 그대는 하나의 예술(Kunststykke)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똑같이 어려운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대를 따라 하려 한다 해도 말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Intet, Intet, Intet) 남기지 않았다. 교수(Professor)가 붙잡을 수 있는 결과(Resultat)의 가장 작은 실오라기(ikke den mindste Trævl)조차 남기지 않았다.

아니다. 그대는 모든 것을 자기와 함께 무덤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그대는 가장 탁월한 성찰(den eminenteste Reflexion)과 지혜(Klogskab) 안에 가장 높은 열정(den høieste Begeistring)을 공기가 새지 않도록 완전히 봉인한 채(luftæt afspærret) 보존했다. 그리고 그것을 영원을 위해 보존했다(bevarede den for Evighed).

그대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갔다. 그래서 지금 오, 소크라테스여—지금 교수들 사이에서는 그대를 두고 조금 깎아내리는 말투로(nedsættende)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단지 하나의 인격(Personlighed)이었을 뿐이다.
아직 하나의 체계(System)를 갖지는 못했다.”7


핵심 개념어

  • Livets Nydelser — 삶의 향락들
  • Grav — 무덤
  • tage Alt med sig i Graven — 모든 것을 자기와 함께 무덤으로 가져가다
  • Opgaven — 과제
  • Kunststykke — 예술적 기교, 위대한 솜씨
  • Resultat — 결과
  • Trævl — 실오라기, 아주 작은 흔적
  • Reflexion — 성찰
  • Klogskab — 지혜
  • Begeistring — 열정
  • Personlighed — 인격, 인격적 존재
  • System — 체계
해설 보기

이 일기의 핵심은 정말 놀랍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사유의 “결과(Resultat)”를 남기지 않았다. 책으로 정리된 체계도 없고, 교수들이 해설할 수 있는 교리도 없고, 철학적 “결론”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기 자신(Personlighed)을 남겼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담은 채
그것을 무덤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교수들은 비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체계(System)가 없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함입니다. 왜냐하면 체계는 남겨질 수 있지만, 존재(Tilværelse)은 남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논문처럼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 안에서 다시 반복(Gjentagelse)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 일기는 사실 이렇게 읽힙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결과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오히려 모든 것을 보존했다.”

이건 키르케고르 자신의 저술 이해와도 아주 깊이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NB31:114, Pap. XI1 A450

인류(Menneske-Slægten)

본래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태어나지 않는다. 마치 어떤 곡식이나 어떤 과일 품종을 두고“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종이다”라고 말하듯, 실로 이제 더 이상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다.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은 영(Spirit)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마치 귀 없는 바늘과도 같이 쓸모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주체성(Subjektivitet)이 없기 때문이다. 주체성이란 영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며, 혹은 영의 가능성 그 자체다. 주체성—이 “나”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일깨우고 상기시키는 그 “나”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나”, 고귀한 것을 보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들었을 때 즉시 자기 자신에게 묻는 “나”다.

“너는 어떠한가?”
“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너 역시 그렇게 힘쓰고 있는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그 “나”다. 그 “나”는 윤리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들지 못함, 곧 영혼의 깨어 있음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주체성 없이 태어난다.

마치 날 없는 칼처럼,
마치 촉 없는 화살처럼 태어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오직 이 세상의 유한한 목적들에만 매여 살아간다.

그런데 내가 “오늘날 인간은 영과 관련하여 귀 없는 바늘처럼 쓸모없다”고 말할 때 내가 특별히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탁월한 자들, 곧 세상에서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자들이다. 그들은 곧 교수들(Docenter) 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체성이 없다. 무뎌지고 둔감해진 객관성들, 하나의 표본들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성을 가장 강렬하게 불붙게 해야 할 바로 그것 앞에서조차, 곧 신적인 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고난받으시며 외치시는
“나를 따르라”는 그 절대적인 요청 앞에서조차,8 그들은 여전히—비인간적으로, 아니 정말 내가 말하는 그대로, 인간이 아니기에—객관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강의한다.

또한 다른 모든 위대한 것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난을 겪었고 따름을 요구했던 모든 고귀한 것들 앞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객관적으로 머물며 그것을 설명하고 강론한다. 더 나쁜 것은, 이 평온함이 그들 안에 있는 더 나은 어떤 것과 오랜 싸움을 벌인 끝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심과 씨름한 뒤에 얻어진 고요가 아니다. 아니다. 이 평온함은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들 안에는 싸워 이겨야 할 더 나은 것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가 이렇게 강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고 스스로를 훌륭한 인간이라 여긴다.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무영성(Aandløshed, 영의 상실) 이다.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곧바로 양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없이(bona conscientia ), 오히려 자신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범죄를 저지른다면, 바로 그것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마찬가지다. 영이 없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영이 없으면서도 그것이 곧 영적인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참된 무영성(영의 상실)이다.


아, 마치 네르고르 장군이 늘 이렇게 말하듯 말이다.

“고귀한 프레데릭스보르의 종족은 멸종되었다.”9

정녕 그와 같이 고귀한 인간 종족 또한 오래전에 멸종해 버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태어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NB31:115, Pap. XI1 A 451

하나님에 대한 의무 –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사라짐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가 등장했다. 이것은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란, 인간을 무조건적인 것(Det Ubetingede)을 향해긴장시키고, 몰아가는 것으로-틀림없이 가장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그건 이제 그만 두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새로운 종류의 의무가 발명되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혹은 말하자면, 인간 안에 있는 모든 비천한 것, 이기적인 것들이 진급(avancement)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런 ‘위대한 발견’이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사실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는데 말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의 예들을 보자.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고, 다른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간다. 이제…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빠진 사람을 구할 용기(courage)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라는 그 발견이 있기 전에는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도망치고, 자신이 겁쟁이(cujon)임을 솔직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당당하게 물러서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먹고 마시는 것? 언제나 사람들의 습관이었지만, 그 ‘발견’ 이후, 그건 이제 의미가 달라졌다-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돈을 긁어모으는 것? 언제나 사람들의 보편적 관심사였지만, 이제 그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 되었다-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결국, 오늘날 살아가는 이런 ‘의무의 인간들(Pligt-Mennesker)’은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 전체는 그야말로 ‘의무 이행’으로 가득 차 있다.

정말 훌륭한 발명품 아닌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도덕 체계가 그토록 오랫동안 애써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의무를 수행하게 하지 못했던 방식-즉, 의무를 ‘선언’함으로써 의무를 실천하게 만들려던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제는 성공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미 하고 싶은 것, 이미 하고 있는 것에 ‘의무’라는 이름을 붙이면 되는 것이다.

내 제안은 다음과 같다:

이미 하나님에 대한 의무는 사라졌으니, 차라리 이웃에 대한 의무(Pligten mod Næsten)도 폐지하고, 전체 윤리학을 단 하나의 범주 아래 다루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NB31:116, Pap. XI1 A 452

하나님의 말씀(Guds Ord)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Guds Ord)이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방식인가? 각 개인(Den Enkelte, 단독자)과 하나님의 말씀(Guds Ord) 사이에 1800년 동안 축적된“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온갖 의견들(Meninger)이 끼어들어 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have)”는 것은 거의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상을 이미 받아 버렸다(have Lønnen borte)”

는 것과 비슷하다.

곧, 이미 가져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맹세한 교사들(eedfæstede Lærere)이 있다. 그들은 저마다 신약성서(Det nye Testamente) 위에 맹세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교사들 각각의 맹세(Eed)와 신약성서(Det nye Testamente) 사이에도 역시 1800년 동안 쌓여 온“신약성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들(Meninger)이 끼어든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이런 생각도 끼어든다.

“나는 단지 내 시대의 다른 목사들처럼 똑같이 맹세할 뿐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차라리 그 맹세(Eed)는 없는 편이 낫다..

해설 보기

해설: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할 때의 자기기만을 폭로합니다. 그 말씀은 더 이상 직접적이지 않으며, 교회 전통과 제도적 언명, 해석학적 누적을 통해 철저히 매개된, 먼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동일하게, 신약에 대한 맹세(eed)도 개인의 신실한 결단이 아니라, 제도화된 관습의 반복에 불과하게 되어버렸다고 비판합니다. 결국,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맹세가 없고, 말씀도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정직하다.”


NB31:117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 (At ville være den Første)

개가 아무리 잘 훈련되었다 해도 순간순간 불쑥 드러나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을 보면 아, 이것이 동물(Dyret)이구나, 동물적 본성(Dyre-Naturen)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인간(Menneske)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인간 안의 동물적 본성(Dyre-Naturen)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칭찬하기까지 한다.

“나는 첫째가 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뭐 미쳤다고 첫째가 되려고 하겠는가.”

네가 첫째가 되려 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너는 네 앞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무리(Flokken) 다. 곧 너는 동물(Dyr)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조건(Vilkaar)을 바꾸지 않으신다. 그것은 기독교(Christendom)의 은혜(Naade)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Guds Rige)를 구하라. 그리고 먼저 오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마치 베데스다 못가의 사람처럼.

너는 첫째가 되려 하지 않는다. 맞다. 왜냐하면 너는 감히 나서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앞에 다른 사람들이 있기만 하면 앞에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을 덜 감수하게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결국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게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감수하는 것(vove)의 정반대를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그리고 각 개인(Den Enkelte)이
감히 나서기를(vove) 원하신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무한한 은혜(Naade) 가운데서
마치 자신의 신적 위엄(guddommelige Majestæt)을 거의 농담처럼 낮추시며,

각 개인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그 무한히 높은 것을 허락하실 때, 하나님은 인간들의 비겁하면서도 교활한 흉내 내기 곧 원숭이 같은 재주(Abestreger)로 조롱당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은 모방(Efterabelse)과 동물성(Dyriskhed)을 택하면서도 정작 같은 것을 얻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너는 첫째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조건(Vilkaar)이다. 그리고 달리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 각 개인(Den Enkelte)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사랑은 대중(Masse)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받기 위해서도 요구하신다. 곧 , 각각의 개인(hver især)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신다.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남들 사랑하듯 당신도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례(Uforskammethed)한 일이다.

그것은 거짓된 겸손(løgnagtig Beskedenhed)이며
거짓된 비천함(Ydmyghed)이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은
그런 것을 혐오(Modbydelighed)한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저 무리(Flokken) 속으로 뛰어들어가면 된다. 바로 그곳, 기자들(Journalister)이 손짓하며 너를 부르는 곳, 그리고 대중(Publikum)이 안전(Tryghed)과 확실성(Vished)을 보장해 주는 바로 그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 *

나는 여기서 다시《두 시대(En literair Anmeldelse af To Tidsaldre)》의 마지막에 서게 된다. 곧 그때 미래에 대해 그려졌던 그 그림 앞에 나는 다시 서 있다.

해설 보기

동물의 규정은 ‘무리(Mængde)’이다(Dyre-Bestemmelsen er: Mængde): 비교하라. 1851년 4월의 일기 NB23:216에서 키르케고르(SK)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매우 정확하게‘무리(Mængden)’는 동물적 규정(Dyre-Bestemmelse)이라고 말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Den Nikomachæiske Etik)》 제1권 제5장(1095b19)에 대한 언급이다.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삶의 여러 방식(livsformer)을 구분하면서 특히 ‘무리(Mængden)’ 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다수의 사람들(den store Haufe), 곧 가장 통속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Glückselighed)을 감각적 쾌락(sanseligt Velbehag)에 둔다. 그러므로 그들은 향유하는 삶(nydende Livsform)을 가장 선호한다.
…이처럼 단지 동물적 안락함(blot thierisches Wohlleben)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는 대중(Mængden)의 견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저급하고 노예적인 영혼(lave og slaviske Sjæle)의 몫이다.”

키르케고르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오는 이유는 분명하다.그에게 무리(Mængde) 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라는 수량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 규정(Bestemmelse) 이다.
곧,
개별자(Den Enkelte)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거부하고,
안전과 익명성 속으로 숨어 들어가려는
동물적 존재 방식(Dyre-Natur) 을 가리킨다.
그래서 NB31:117에서
“나는 첫째가 되려 하지 않는다.”
는 말은 겸손이 아니라,
실은 무리(Flokken) 속으로 숨으려는 본능이며,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기를 회피하는 태도다.
키르케고르에게 무리(Mængden) 는
단지 사회학적 범주가 아니라
신학적·실존론적 범주다.
무리(Mængden)는
하나님 앞의 단독자(Den Enkelte)의 반대말이다.


NB31:118, Pap. XI1 A 454

큰 고기잡이(Det store Fiske-Dræt)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I skulle fange Mennesker)”

이제 1800년 동안 사람들은 잡혀 왔다. 왕국들(Riger), 나라들(Lande), 민족들(Folk)이 잡혀 왔다. 한 대륙 전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수 세기 동안 계속 그렇게 불려 왔다. 참으로 엄청난 어획이다! 엄청난 어획! 참으로 주님의 예언(Herrens Forudsigelse)이 놀랍게 성취된 것처럼 보인다.

가령 어떤 어부가 “가물치나 잉어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백만 마리의 피라미(Skaller)를 잡았다면 어떻겠는가? “엄청난 어획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 누군가 “고래(Hvaler)를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수백만 마리의 청어(Sild)를 잡았다면 어떻겠습니까? 역시 “엄청난 어획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가 사용해 온 방법(Methoden)은 이것이었다.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det at være Christen)의 기준(Maalestok)을 계속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더 많이 잡았다(fanget saa mange desto flere). 고래(Hvaler) 대신 청어(Sild)를 잡았다. 수는 많았다. 그리고 청어 대신 가시고기(Hundesteiler)를 잡았다. 역시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처음 요구된 것은 고래였다.

참으로 주님의 예언은 놀랍게 성취된다.

“내가 다시 올 때 과연 땅 위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핵심 개념어 정리
  • Det store Fiske-Dræt — 큰 고기잡이 / 대어획
  • Mennesker — 사람들
  • Christen — 그리스도인
  • Methoden — 방법
  • Maalestok — 기준, 척도
  • at være Christen —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 uhyre Fangst — 엄청난 어획
  • Hvaler — 고래
  • Sild — 청어
  • Hundesteiler — 가시고기(three-spined stickleback)
  • Troen — 믿음 (정관형, “그 믿음”)
  • Herrens Forudsigelse — 주님의 예언

NB31:126, Pap. XI1 A 462

순교(Martyriet)

신약성경에서의 기독교(Χstd)는 순교(Martyriet)가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Forbilledet)의 모범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기독교는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존재(Tilværelsen)를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고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가 말했듯이, 반드시 바깥에 있는 점(Punktet udenfor)이 필요하다.

이 바깥의 점은 오직 순교(Martyriet)이며, 순교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을 가진 순교만이 해당한다. 순교와 수천 명의 순교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것의 가치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그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차라리 그런 고난이 필요하지 않았기를 바란다면, 그런 모든 순교는 단지 세상 안에서의 움직이는 한 점(Bevægelses-Punkter i Verden)일 뿐, 세상 밖의 점(Punktet uden for Verden)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순교는 여전히 세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실행된다. 세상의 도움, 인간적인 지혜 등이 동원되며,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순교의 길을 택하게 된다.

반대로, 세상 밖의 점이 되는 참된 순교는, 히브리서(Hebræer-Brevet)에서 말하듯,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고, 고난을 피하기 위한 도움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순교는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순교는, 그리고 특히 여기서 말한 이해 방식으로 수행되는 순교는, 기독교에서의 핵심 원리(cardo rerum)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결국 순교에 대한 이해가 점진적으로 변화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순교의 개념을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수천 명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순교에 대한 개념이 변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세상과의 동질화(세속화)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후 점차적으로 순교의 수가 줄어들게 된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너무 엄격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순교의 개념은 점차 사라진다. 그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며, 교회는 점점 더 타협적이게 되고, 점점 더 요구 수준을 낮추게 된다.

마침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순교자가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선택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마치 약자를 배려하는 교육적 접근이나 인도주의적 태도처럼 아름다운 명분으로 포장된다. 또한 이는 열광자나 광신자처럼 순간의 가능성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God Nat Ole!”(잘 자라, 올레!) 기독교가 완전히 세상과 동질화되었다. 매 순간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계산이자 세속적 공식에 불과하다. 이런 태도는 결코 세상을 움직일 수 없으며, 세상 밖의 독립적인 관점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온전히, 철저하게, 완벽하게 세상 속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기독교라 불리고 있다. 사제들은 자녀를 낳고, 주교들은(예: 엥겔스토프트) 세 쌍둥이를 얻는 등, 모든 것이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떤 감각적 이미지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변질이다. 그 변화는 너무나도 커서,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방법조차 없다.


NB31:148, Pap XI 1 A 484

나 자신에 대하여

한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은 바로 내가 내 살 속의 가시(Pæl i Kjødet)라고 부를 수 있는 고통(Qval)이었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Sorg), 그리고 사랑했던 어린 소녀(elskede Pigebarn)와 그와 관련된 일들에 대한 마음의 아픔(Hjertesorg)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내가 꽤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활동 속에서 영의 기쁨(Aands Glæde)을 너무나 많이 느꼈기에, 비록 그것이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Sorg over sin Synd)이라 할지라도, 내가 살고 있는 삶을 고난(Lidelse)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과거의 고난들 위에 생계에 대한 걱정(Sorg for Udkommet)과 군중의 학대(Pøbel-Mishandling)라는 또 다른 짐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자, 오라! 역사(History)여, 너의 감사(audit)를 시행하라.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다. 게다가 나는 자발적으로 이 위험을 감수했다. 이것은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다.


NB31:149, Pap XI 1 A 485

종(Slægt)-개인(Individ)

모든 동물의 종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조가 적용된다. 종(Arten)은 더 높은 존재, 이상(Idealiteten)이며, 개체(Exemplaret)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다. 즉, 종은 더 높은 것이고, 개체는 더 낮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종족에서는 기독교(Χstdommen)에 의해 상황이 다르게 정리되었다. 바로 개인(Individet)이 종(Slægten)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고통과 노력(uhyre anstrenget)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적 속성은 이 관계를 다시 뒤바꾸려는 경향이 있다.

즉, 종이 개인보다 더 높은 위치가 되고, 개인은 단순히 샘플(Exemplar)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결국 동물(Dyr)이 되어버린다. 물론 동물로 존재하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anstrengelser)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마치 우스꽝스러운 광기(fabelagtig Galskab)처럼 보일 것이다. 즉, 하나님과 아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신다(prøver En)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말이다.

해설 보기

해설

1. 동물적 존재 vs. 인간적 존재

동물의 세계에서는 종이 우선시되고, 개체는 단순히 반복적으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은 개인(Individ)으로서 종(Slægten)보다 우월하다.

2.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관계를 뒤집고, 종족이 개인보다 우월하도록 하려는 경향이 있다.

3.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차라리 집단에 동화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결국 동물처럼 살아가게 된다.

4.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키르케고르는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지 강조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개인적 신앙이 우스꽝스러운 일로 여겨지지만, 키르케고르는 이것이 진정한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본다.


NB31:150, Pap XI 1 A 486

군중(Mængde) – 단독자(den Enkelte)

언제나 인류(종족, Slægten)의 범주가 이렇게 압도적이었던 적은 없었고, 군중(Mængde)과 숫자(Numeriske) 개념, 추상(Abstraktionerne)이 지금 이 시대만큼 강력했던 적도 없다. 그리고 단독자(den Enkelte)가 이렇게 강하게 강조된 적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나(Søren Kierkegaard)에 의해 그렇게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Sokrates)조차도 제자들(Disciple)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중와 단독자는 서로 대조되며, 이는 신성한 위엄(Guddommeliges Majestæt)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단순히 반항(Opstanden)이 커졌다고 해서 더 강력해지시는 위엄(Majestæt)이 아니다. 하나님은 후퇴하지 않으신다(slaaer af).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나아가신다(skrue op).

비유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두꺼운 몽둥이(svær tyk Stok)를 들고 10명의 사람을 때리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10명이 20명으로 늘어난다면, 진정한 위엄(Majestætiske)은 그 두꺼운 몽둥이를 내려놓고 오히려 아주 가느다란 몽둥이(ganske tynd Stok)로 20명을 때리는 것이다. 진정한 위엄은 양보하거나 물러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반항이 더욱 강력하고 거세질수록,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얼마나 위엄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거의 무(無, Intet)에 가까운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얼마나 위엄이 있는가!

아,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 역할을 맡아야 하는 가엾은 인간(stakkels Menneske)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끊임없이 존재의 가장자리에, 즉 거의 무(nothing)가 된 상태로 내몰리는 것은 모든 면에서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위엄(Majestætiske)이 드러날 수 있다.

반항이 더욱 강해질수록, 위엄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uendelige Magt)과 절대적인 우월함(sikre Overmagt)을 드러낸다. 내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런 반항은 장난스럽게(spøgefuld) 보인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그 가엾은 인간에게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 이 모든 것은 바로 사랑(Kjærlighed)이다. 당신, 무한한 사랑(uendelige Kjerlighed)이여.


NB31:151, Pap XI 1 A 487

나(I)―제3자(Third Person)

“영(spirit)”이 된다는 것은 “나(I)”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나(I)”들이 있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인류의 관심은 어디에서나 객관성(objectivities)을 도입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인류(race)라는 범주의 관심사이다.

“크리스텐덤(Christendom)”은 수백만 명이 모인 공동체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제3자(3rd person)로 존재할 뿐, 그 안에는 “나(I)”가 없다.


NB31:152, Pap XI 1 A 488

믿음(At troe) – 니고데모(Nicodemus)

만약 믿음이란 단순히 숨겨진 내면성(skjult Inderlighed)에 불과했다면, 그리스도(Χstus)께서는 니고데모(Nicodemus)의 태도를 인정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니고데모의 믿음은 바로 숨겨진 내면성이었기 때문이다.

해설

이 문장은 키르케고르가 진정한 믿음이란 단순히 내면의 감정이나 비밀스러운 열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실천적 결단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니고데모(Nicodemus)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으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가르침에 관심을 가졌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간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자 했지만,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해설 보기

키르케고르의 비판

키르케고르는 니고데모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만약 믿음이 단지 숨겨진 내면의 감정에 불과했다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긍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개적인 신앙 고백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의 진정한 의미

믿음은 단순히 내면에만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용기 있는 고백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믿음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숨겨진 내면성(skjult Inderlighed): 키르케고르는 숨겨진 내면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이 개념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외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면적인 열정에만 머무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키르케고르의 비판

키르케고르는 1850년 8월경 작성한 NB20:74의 저널 기록에서, 기독교 신앙을 외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숨겨진 내면성으로 머무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1. 신앙의 안일함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희생(자기부정) 없이,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숨겨진 내면성을 택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고난이나 희생 없이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방식입니다. “숨겨진 내면성은 진정한 희생을 면제하며, 기독교의 사명을 위해 고통받는 모든 수고에서 자유롭게 만든다.”

2. 형식적 신앙

이러한 내면적 신앙은 단지 교양(Dannelse)으로 포장되어, 사탄(Satan)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춰진 채 유지됩니다. 외적으로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믿는 자기기만적인 태도를 비판합니다.

3. 키르케고르의 자기 고백

키르케고르는 자신도 한때 아이러니스트(Ironiker)이자 우울한 사람(Tungsindig)으로서 숨겨진 내면성을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내면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적 행동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지속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내 내면성을 숨겼지만, 동시에 행동으로 기독교적 충돌을 경험하도록 했다.”

4. 간접적 도전

키르케고르는 숨겨진 내면성을 자극(pirre)하고 드러나게 하려면,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indirecte)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저작에서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NB31:153, Pap XI 1 A 489

기독교(Xnty) ― 전파(Diffusion)

기독교는 그 전파 정도에 반비례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립(opposition)에 기반한다. 따라서 기독교가 인류의 보편적인 사명, 즉 크리스텐덤(Xndom)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었을 때, 이는 곧 하나님의 사명이 아니게 된다.

하나님은 개인(individuals)을 원하신다. 하지만 개인은―그것이 선의의 공감에서 비롯되었든, 아니면 속임수의 교활함(swindler’s cunning)에서 비롯되었든―항상 자신과 함께할 무리(the herd)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개인을 원하신다.

해설 보기

해설

1. 기독교와 확산의 관계

키르케고르는 기독교(Xnty)가 확산(diffusion)될수록 그 본질이 퇴색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본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보편적 가치로 확산되어 사회 전체의 사명이 되면, 더 이상 그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관계가 아닌,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신앙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개인’

하나님은 집단적 무리가 아닌, 개별적인 개인(individual)과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리(herd) 속에서 안정을 찾고, 자신이 속한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 합니다. 이는 때로는 선한 의도(good-natured sympathy)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때로는 교활한 속임수(swindler’s cunning)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3. 크리스텐덤(Xndom)의 위험성

키르케고르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 추구하는 방향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멀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기독교가 사회 전체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으면, 개인적인 신앙의 긴장감과 실존적 결단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만이 남게 됩니다.

4. 실존적 신앙의 중요성

키르케고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집단적이기보다, 개인의 실존적 결단과 내적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다수의 안락함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1:1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실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서 완성된다고 봅니다.


NB31:154, Pap XI 1 A 490

유대교(Jødedom) – 기독교(Χstd.)

유대교(Jødedom)에서는 하나님이 “민족(Folk)”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기독교(Χstd.)에서의 진보는 하나님께서 개인(Individ)과 관계를 맺는 데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Χstus)는 바로 이러한 관계의 모범(Forbilledet)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걸림돌(Anstød)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Χstd.)가 수(數, Numerus)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모든 진보(Fremskridt)는 본질적으로 수적인 것(Numeriske)에서 반대로 이루어진다.


NB31:155, Pap XI 1 A 491

모든 것(Alt) – 무( Intet)

하나님은 무(無)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신다(Alt af Intet).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먼저 무(無)로 만드신다.

Everything―Nothing.
God creates everything out of nothing―and everything God is to use he first turns into nothing.

해설 보기

해설

이 문장은 창조와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신학적이면서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여기서 창조(creation)와 소멸(nullification)의 역설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1.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無)에서 모든 것(全存在)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기독교 창조론의 핵심 개념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드신다는 의미입니다.

2. 소멸을 통한 사용(사용하기 위해 무로 만듦):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사용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교만함이나 자아를 무너뜨리고, 철저히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왕궁에서 권세를 누렸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철저히 낮아진 후에야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 역시 교만했던 과거를 버리고 겸손히 자신을 낮춘 후, 복음 전파의 도구로 쓰임받았습니다.

3. 존재의 역설적 관계: 키르케고르는 존재(Alt, 모든 것)와 무(Intet)가 단순히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진정한 창조와 변화는 기존의 것을 부수고(무로 만들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세우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4. 실존적 적용: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자아와 교만한 자의식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무(無)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새로운 창조와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는 교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인간이 무로 돌아가는 겸손함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참된 존재(Alt, 모든 것)가 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NB31:156, Pap XI 1 A 492

본보기(Forbilledet) – 화해자(Forsoneren)

“본보기(Forbilledet)”는 마치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화해자(Forsoneren)”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Χstus)는 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Χstd.)는 결코 화해(구원)와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가볍게 소비하는, 그런 비열하고 교활한(Gavtyveagtige) 종교가 아니다.

해설 보기

해설

1. 본보기(Forbilledet)와 그 부담

본보기(Forbilledet)는 신앙적, 도덕적 이상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완벽한 이상에 도달할 수 없기에, 이는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좌절과 절망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모델을 따르려다 실패하여, 영적으로 죽어버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2. 화해자(Forsoneren)와 구원

화해자는 인간의 한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은혜로 인간을 받아들이고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본보기이자, 동시에 인간의 연약함을 감싸 안는 구세주입니다. 따라서 죄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3. 그리스도의 이중성

예수님은 단순한 도덕적 본보기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이를 구속하시는 화해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단지 본보기였다면, 인간은 그를 따르다가 결국 좌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화해자이시기에 인간은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4. 기독교에 대한 경고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기독교가 이 화해와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경고합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구원을 값싸게 생각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비열함(Gavtyveagtige)”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진정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요약

본보기(Forbilledet):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기준.
화해자(Forsoneren): 인간의 한계와 죄를 감싸 안고 구원하는 존재.
그리스도(Χstus): 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시는 분.
경고: 기독교는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가볍게 다루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됨.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의 완전함과 구원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통해, 신앙은 단순히 이상을쫓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정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NB31:157, Pap XI 1 A 493

사도(Apostelen) – 전파(Udbredelse)

사도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기독교적인 위험(희생)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소수였고 세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을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이는 본래 기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임)을 피할 수 없었다.

“크리스텐덤(Χsthed)”이라는 개념은 헛소리이다. 방법(Methoden)이 변화되어야 하며,

걸림돌(Anstødet, 실족)과 거부감(Frastødet)은 끊임없이 드러나야 한다.

해설 보기

해석 및 설명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위험이 없었다는 점은, 그들이 소수였기에 이미 세상의 압도적인 저항과 탄압 속에서 자연스럽게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 전파에 따르는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Χsthed(크리스테넘)이란 개념을 “Vrøvl”(헛소리, 무의미한 말)라고 지적함으로써, 키르케고르는 당시 기독교가 형식적이고 안일하게 변질되었다고 비판합니다.

“Methoden maa forandres”(방법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기독교가 복음 전파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또한 “Anstødet”(걸림돌, 실족)과 “Frastødet”(거부감, 반발)을 계속해서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가 편안하고 안일한 종교가 아니라, 불편한 진리와 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종합적 해석

키르케고르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겪은 고난과 희생이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기독교는 형식적이고 안일한 종교로 변질되었고, 도전적이고 불편한 진리를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가 근본적인 방법의 전환을 통해 다시 거부감과 도전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당시 국교화된 기독교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진정한 개인의 신앙과 결단을 촉구하는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반영된 것입니다.


NB31:158, Pap XI 1 A 494

지혜 – 기독교

기독교는 바로 ‘지혜(Klogskaben)’ 속에서 멈추어 서서 갇혀버렸다. 우리는 이 지혜를 통과해 나아가야만 한다.

기독교는 이렇게 설정되어 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겪어야 하며, 그 모든 것은 영원(Evigheden)이 심판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기발하게도 이렇게 생각해냈다.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가르치고(docere), 소유하고(have), 크리스천으로 존재하면서도(være), 동시에 슬기롭게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지혜에 대해 스스로 꽤나 자부심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진보(Fremskridt)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다. 인간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영원이 이미 정해놓은 방식, 즉 크리스천이 되고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제서야 인간은 비로소 고난을 겪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일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아, 근시안적인 인간의 지혜여! 영원히 자신을 속이는구나. 아니,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명하셨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NB31:159, Pap XI 1 A 495

계산 문제(Regnestykket)

기독교(Χstd.)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립(모순)에 기반하고 있다. 이 대립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만큼이나 극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번 계산해보라! 만약 1,000명의 기독교인이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립이 이미 사라질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 수는 10만 명, 백만 명으로 늘어날수록 더욱 커질 것이고, 결국 온 세상이 모두 기독교인이 된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대립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이다. 수백만의 기독교인이 있다는 것이 맞다면, 하나님께서 계산을 잘못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잘못된 비율로 계획하신 것이다. 아니면, 이 수많은 기독교인과 기독교화된 세상이라는 것은 결국 사기극(Gavtyvestreger)에 불과하다.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며, 그 이후에는 영원한 삶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칭하면서, 고난을 회피하려는 행동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약속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대교가 추구하는 바이다.) 기독교는 영원한 삶을 약속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NB31:160, Pap XI 1 A 496

유대교(Jødedom) – 기독교(Χstdom)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다가 도움이 와서 고난이 끝나는 것은 유대교이다. 기독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난 속에 머물고, 그 이후에야 영원(Evigheden)이 온다.

해설 보기

해설

유대교(Jødedom)와 기독교(Χstdom)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유대교는 현세에서의 고난이 끝나고 도움이 오며, 이 땅에서의 회복과 축복을 중시합니다. 즉, 고난이 있어도 결국 이 땅에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키면 풍요와 평화를 약속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반면,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 끝까지 지속되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인내하며, 영원한 삶(구원)을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즉, 현세의 고난이 끝나지 않더라도 영원한 세계에서의 보상과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요약

유대교는 현세의 도움과 회복을 중심으로 하고, 기독교는 끝없는 고난 속에서도 영원한 구원을 바라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과 희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중심 진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NB31:161, Pap XI 1 A 497

나 자신에 대하여

만약 내가 소란을 일으키고, 당을 조직하고, 숫자를 모으는 등의 일을 할 수 있었다면―그렇다면 나는 권력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 잘 자라! 하지만 이해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나의 실존(Existeren)는 인류에 대한 가장 깊은 풍자 중 하나이다. 현상적으로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극도로 연약한 한 인간이지만, 존재의 비밀(Tilværelsens Hemmeligheder)에 대한 이해는 매우 깊어 드물게 발견되는 수준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제대로 이해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거나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풍자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작은 점이 이 모든 일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은 점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해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존재(Tilværelse)를 상상으로 재구성하고 꾸며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언제나 똑같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집중(Intensitet)은 항상 확장(Ekstensitet)과 아이러니한 관계를 가진다. 마치 이런 말과도 같다.

der Eine hat den Beutel und der Andre hat das Geld.

“한 사람은 지갑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돈을 가지고 있다.”

확장성은 거대한 기계장치와 같고, 집중성은 그 속에서 작아질수록 더 아이러니해진다. 확장성은 자기만족에 빠져서 스스로를 넓히고자 하며, 그러한 정도로 넓어져서 집중성이 조그만 점으로라도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이 관계는 더욱 아이러니하다. 마치 거대한 대중 집회가 너무 커서 연설자가 문으로 들어올 수조차 없고, 연설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현실 속 확장성은 늘 거대한 기계장치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을 느끼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작은 점 하나가 보인다. 그렇다,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작은 점이 보인다. 만약 무대의 커튼이 내려갔는데 배우들이 계속 연기를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가? 마찬가지로 현실이라는 연극도 그런 작은 점 하나가 떠오르면 우스워진다. 무대의 커튼이 내려간다는 것은 연극이 끝났다는 의미이고, 작은 점이 떠오른다는 것은 이제 그 현실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그 점이 작으면 작을수록, 마치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면, 그것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아이러니는 확장성과 집중성 사이의 불균형에서 발생한다.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현실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이러니하지 않다. 그것은 물리적 힘 대 물리적 힘, 즉 균형 잡힌 싸움이다. 그러나 작은 점이라니!

큰 몽둥이로 말의 이마를 내려쳐 죽이는 것도 아이러니하지 않다. 말의 큰 몸집에는 그 정도의 물리적 힘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늘로 특정 지점을 찔러서 말을 죽인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다.

현실을 끝내는 방식이, 그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모두가 인식하게 한다면 아이러니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이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끝내버린다면―그것이야말로 아이러니하다. 이미 어떤 일이 벌어졌지만, 현실은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모든 기계장치는 여전히 작동하고, 모든 배우들은 평소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무언가가 이미 일어났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작은 점이 보인다. 현실은 그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다.


NB31:161, Pap XI 1 A 497

영의 목표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떤 남자가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길, “나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어쩌면 큰 가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한 사람, 즉 외로운 개인이 더 위대한 존재이다.

하나님께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나아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단순한 개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한 개인이 하나님께 더 큰 존재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Χstd.)이며, 모든 사람이 그 개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모든 사람이 마치 아틀라스처럼 세상을 짊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는 어떤 존재인지 보라. 아, 더욱 슬픈 것은 우리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바로 우리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각주

  1. Majestæts-Forbrydelse란 원래 왕에 대한 범죄를 의미한다. 덴마크 법률인 Christian V의 덴마크 법(Danske Lov, 1683)에 따르면, 이 범죄는 가장 높은 형벌을 받는 범죄로 규정되었으며, 이는 1849년 6월 5일의 헌법(Grundloven)이 제정된 이후에도 유효했다(6권 4장 §1 참조). ↩︎
  2. 고린도후서 11:23-27을 암시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허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도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3. 이것은 천 등에 사람을 뻗어 놓거나 두 줄의 사람 사이 또는 뻗은 팔 위로 올려놓았다가 다시 잡는 게임을 암시한다. ↩︎
  4. 이는 Becker의 ≪세계사(Weltgeschichte)≫ 제6권(1824)을 가리킨다. 거기 41쪽 각주에는 Christopher Columbus의 유명한 ‘콜럼버스의 달걀(Columbuss Æg)’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콜럼버스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많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 그의 발견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에야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던 것처럼 말하며, “자기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어느 날 콜럼버스가 그런 사람들과 식탁에 함께 앉아 있었는데, 마침 반숙 달걀이 나왔다. 그러자 콜럼버스가 말했다.
    “여러분, 이 달걀을 뾰족한 끝으로 세워 보실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고, 몇몇은 직접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콜럼버스가 달걀 하나를 집어 들어 식탁 위에 가볍게 쳐서 끝부분을 눌렀고, 달걀은 그대로 서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외쳤다.
    “아, 그렇게 하는 거라면 우리도 할 수 있었겠는데요!”
    그러자 콜럼버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하지 않았습니까?”
    키르케고르가 이 일기에서 이 비유를 꺼내는 이유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소크라테스의 예술(Kunststykke)은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종류의 재주가 아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한 번 누가 보여 주고 나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였네.”하고 곧 모방할 수 있지요. 그런데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여 준 것은
    * 열정(Begeistring)을 가지면서도
    * 동시에 반성(Reflexion)과 지혜(Klogskab) 안에 그것을 감추어 두는 능력,
    곧 “고독한 열광가 (en eensom Sværmer)”로 존재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한 번 보여 준다고 해서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뒤에 와서 따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따라 사는 것은 지금도 똑같이 어렵고, 여전히 아무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소크라테스를 “경이로운 자(Vidunderlige Socrates)”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5. gaaet langt videre end: “~보다 더 멀리 나아가다” 또는 “~를 넘어가다”라는 표현은 당시 덴마크 헤겔주의(den danske hegelianisme)에서 자주 쓰이던 관용적 표현이었다. 원래는 데카르트의 회의(Descartes’ tvivl)를 넘어서 사유가 더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 다른 철학자를 넘어섰다고 말할 때도 쓰였다. 예를 들어 헤겔을 넘어선다고 말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소크라테스를 넘어선다(at gå videre end Sokrates)”는 표현은 키르케고르의 ≪철학의 부스러기≫(1844) 전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이며, 예를 들어 「교훈(Moralen)」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SKS 4, 306 참조).
    [1] 이는 Alcibiades가 Socrates에 대해 말하는 Symposium의 한 대목(221d–e)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그의 말을 처음 들으면 처음에는 그것이 완전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 마치 장난기 많은 사튀로스의 가죽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짐 나르는 나귀(Lastesler), 대장장이, 구두장이, 무두장이 같은 이야기만 한다. 그리고 항상 같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무지하고 분별 없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말을 듣고 웃는다. 그러나 그 말이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비로소 사람은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말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이 가장 신적인 말이며, 가장 많은 덕의 형상(Dydsbilleder)을 담고 있고, 참으로 넓은 범위를 지니며, 고귀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가 탐구해야 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주석은 NB31:112의 마지막 문장을 푸는 열쇠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썼지요.
    “나는 소크라테스가 ‘짐 나르는 나귀들(Pak-Æsler)’에 대해 말할 때, 사실은 이 교수들의 무리를 두고 은밀히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Pak-Æsler는 직역하면 “짐 나르는 나귀들” 또는 “짐승처럼 짐을 지고 다니는 나귀들”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말한 뜻은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겉으로 보면 늘 아주 사소한 것만 이야기합니다.
    * 나귀
    * 대장장이
    * 구두장이
    * 가죽 세공업자
    이런 일상의 이야기들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고 웃습니다. “저게 철학인가?” 하지만 그 말의 내부를 열어 보면, 그 안에는
    * 진리
    * 덕
    * 영혼
    * 자기 인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지요.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기 자신의 저술 방식과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 아이러니
    * 우화
    * 익명 저작
    * 일상적인 비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실존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는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교수들을 풍자합니다. 교수들은 소크라테스를 넘어섰다고 말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의 말을 “열어 보는 법”조차 모른다는 것이지요. ↩︎
  6. 이는 로마의 정치가이자 법률가이며 철학자인 Marcus Tullius Cicero의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선과 악의 궁극 목적에 관하여》) 제2권 32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키르케고르가 직접 참고했을 가능성이 큰 독일어 번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겨진다.
    “육체적 쾌락이 이미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즐거움을 준다고 말한다면, 나는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르다나팔의 묘비명을 그토록 비웃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 묘비명에서 이 시리아 왕은 자기가 삶의 모든 욕망과 향락을 무덤까지 가져갔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그는 살아 있는 동안조차 그것을 누리는 순간 외에는 그것을 붙잡아 둘 수 없었는데, 어찌 죽은 뒤에도 그것이 자기 것일 수 있겠는가?’”
    사르다나팔은 전설적인 아시리아 왕으로, 고대 문헌들에서 흔히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Aristotle는 여러 저술에서 그를 나약하고 향락적인 인물의 대표로 언급한다. 한편 이 인용문은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 단편으로 간주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위(僞) 아리스토텔레스(pseudo-Aristotelian) 전승으로 본다.

    해설
    키르케고르가 이 주석을 NB31:113에서 소크라테스를 말하며 끌어오는 이유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는 먼저 사르다나팔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삶의 모든 쾌락을 무덤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곧바로 이렇게 반박합니다.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쾌락은 지나는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향락은 통과하면서 소비될 뿐, 인간의 내면에 남지 않습니다. 먹는 기쁨도, 권력도, 육체의 만족도, 누리는 순간 지나가 버립니다. 즉 향락은 인간을 통과하지만 인간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데 이어서 소크라테스를 두고 키르케고르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만이 모든 것을 무덤으로 가져간 사람이다.”
    이게 핵심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재산도 남기지 않았고, 제도도 남기지 않았고, 체계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내면 속으로 가져갔다. 즉 바깥에 결과(Resultat)를 남긴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 안에 모든 것을 응축해 가지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표현이 놀랍지요.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교수들이 붙잡을 만한 결과의 한 조각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무덤으로 들어갔다.” ↩︎
  7. 이 부분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라. https://karisacademy.kr/socrates-love-arcibiades/ ↩︎
  8. 이는 그리스도교 교의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stedfortrædende satisfaktion) 교리를 가리킨다.
    곧,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인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타락과 죄로 인해 인간에게 내려져야 했던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대신 담당하셨다는 교리이다. 그분은 인간이 본래 받아야 했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해 값을 치르셨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침해된 정의를 만족시키시며 속죄를 이루셨다는 뜻이다. ↩︎
  9. “네르고르 장군이 늘 말하듯, ‘고귀한 프레데릭스보르 종은 멸종했다’”
    이는 Jens Veibel Neergaard의 저서 《Historisk-factisk Oplysning om vore Stutteriherrers sælsomme Commerce paa Hestenes Gebeet》(1854)를 가리킨다. 네르고르는 그 책 14쪽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내가 이미 분명하고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로 입증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가장 유명한 국가적 품종들, 특히 옛 프레데릭스보르 종마 계통의 완전한 퇴화와 파멸은 바로 이 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또 그는 이어 15쪽에서 자신이 이미 1826년에 공적 지원을 받아 프레데릭스보르 종마장을 조사했으며, 그 보고서에서 당시 이미 이 품종이 심각하게 퇴화해 있었다고 밝혔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수백 마리 가운데서도 본래 품종의 전형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어 번식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다른 저작들에서도 반복해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 곧 덴마크의 옛 프레데릭스보르 말 품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퇴화하여 그 본래의 형질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귀한(ædel)”이라는 형용사는 네르고르 본인이 직접 사용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신문 서평에서는 이 말을 사용하여 “한때 고귀했던 프레데릭스보르 종”이라 묘사하였다. 당시 Berlingske Tidende는 네르고르의 책을 리뷰하면서 이렇게 썼다.
    “한때 그렇게도 고귀했던 오래된 프레데릭스보르 종.”
    또 네르고르를 두고는“비범한 능력과 탁월한 전문성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그가 거의 50년 동안 덴마크 말 사육의 퇴락을 비판해 온 긴 싸움을 소개한다. 네르고르는 덴마크의 법률가이자 수의학자였으며, 농업과 축산에도 깊이 관여했고 다양한 학술·비판적 저술을 남겼다.

    이 배경을 알고 나면 NB31:114 마지막 문장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지요.
    “네르고르가 늘 말하듯 ‘고귀한 프레데릭스보르 종은 멸종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인간 종족 역시 오래전에 사라졌고, 지금 태어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여기서 그는 네르고르의 말 품종의 퇴화라는 이미지를 빌려와 그 시대의 인간 정신의 퇴락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말의 혈통이 타락해 본래의 품종을 잃어버렸듯, 인간 역시 영(Spirit)과의 관계를 잃어버려 더 이상 본래 의미의 “인간(Menneske)”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대단히 과격한 표현이지만, 키르케고르가 겨냥한 것은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주체성 없는 인간”,
“영과 관계를 맺지 않는 인간”,
“객관성 속에 안주한 인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네르고르의 말 이야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키르케고르가 당대의 크리스텐덤과 학문 세계 전체를 향해 내리는 하나의 영적 진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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