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15:114, Pap. X2 A451, 1850
「성령(Hellig-Aand)」
“성령(Den Hellig-Aand)”은 “보혜사(Trøsteren, 위로자)”라고 불린다.1
이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성령이 제자들 그리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Christne)을 위로하는 것은 그리스도(Christus)께서 떠나셨고 더 이상 그들 가운데 눈에 보이게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2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보기(Forbilledet)로서의 그리스도는 여전히 율법(Loven)의 한 형태이며, 더욱이 강화된 율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Lidelse)은 세상과 인류에 대한 가장 엄중한 심판(Dom)이다. 왜냐하면 그분과 함께 끝까지 견디어 낸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열광적 순간 속에서 감동하고 또 감동시키며, 생각도 없이 — 혹은 생각이 있다 해도 그것이 마치 육체(Kjød)가 생각을 가진다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의 생각일 뿐인 —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 되고 싶다”고 바라는 목사들의 설교가 얼마나 무한히 뒤틀린 것인지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 가장 엄격한 시험(Examination)이다. 만일 이것이 지속적인 상태가 되어야 했다면,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에서 훨씬 더 온화한 심판 아래 있었던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으신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화해(Forsoningen, 속죄)이다.
여기에 은혜(Naaden)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성령은, 본래 은혜의 분배자(Dispensator),3 곧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은혜 그 자체이다. 바로 여기서 “보혜사(Trøsteren, 위로자)”라는 이름이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과거와 관련해서만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네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 충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4
좋다.
그러나 내가 내일 죽지 않는다면,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비록 “은혜”가 내게 주어졌을지라도, 나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진 셈이다.
왜냐하면 내가 은혜를 받기 전에는 언제나 “은혜가 아직 남아 있다”는 위로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는 심지어 그 은혜마저 남용(Misbrug)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은혜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는 내가 은혜를 형편없이 사용한 것과 관련하여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한히 계속된다.
은혜(Naade)는 무한한 원천(Væld)이며, 성령(Hellig-Aand)은 그 분배자(Dispensator), 곧 보혜사(Trøsteren)이다.
또한 성령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위로자이다.
즉, 본보기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의 요구(Fordring)이지만, 어떤 인간도 그 요구에 응답할 수 없다는 점에서이다.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게 본보기로 현존해 계시는 한, 그분은 그것이 심판(Dommen)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그분의 삶은 이중적인 측면(doublee Side)을 가진다.
그분은 본보기(Forbilledet)이다.
그러나 그분은 죽으신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변화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은혜(Naaden)”가 되신다.
또한 우리가 그 “본보기”를 닮고자 불완전하게 애쓰는 것과 관련해서조차도, 그분은 은혜이시다.
Pap. X2 A452
주석(Anm.): 그러므로 가장 오래된 시대의 교회에서 사람이 죽음의 자리(Dødsleiet)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례(døbe, 침례)를 받으려 했던 것은 깊은 통찰(Betragtning)이었다.5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Χstd.)는 오직 하나의 상황에서만 유리한 삶의 이해(Livs-Anskuelse)를 갖기 때문이다. 곧 죽음(Dødens)의 상황이다.
어려움(Vanskeligheden)은 인간이 노력(stræbes)해야 할 때 발생한다.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은혜(Naaden)를 받아들이는 것을 미룬다.
그리고 그때 가서 은혜를 받는다.
이제 모든 것에 대해 충분한 대가가 치러졌다(der gjort Fyldest for Alt).
그리고 그렇게 사람은 복되게(saligt) 죽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울(Tungsind)이거나, 혹은 심지어 세속적 영리함(verdslig Kløgt)이다.
곧 기독교를 헛된 것(forfængelig)으로 취급하는 태도이다.
해설
여기서 키르케고르의 핵심은 매우 날카롭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은혜를 받으면 된다”는 태도가 사실상 기독교를 죽음 직전의 안전장치 정도로 축소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간은 “노력(stræben)”의 문제, 곧 본보기(Forbilledet)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실존적 긴장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앞 문단에서 성령(Hellig-Aand)을 “은혜의 분배자(Naadens Dispensator)”라고 불렀다. 인간은 단지 마지막 순간에만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전 과정 속에서 — 실패하고 다시 넘어지는 반복 속에서 — 끊임없이 은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는 단순히 “죽음을 잘 맞이하는 종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은혜 안에서 존재(Tilværelsen)가 형성되어 가는 실존의 길이다.
주석
- D. H-A. kaldes »Trøsteren« : 여기서 “성령(Den Hellig-Aand)”에 대해 사용된 명칭 “보혜사(Trøsteren)”는, 이어지는 주석에서 언급되는 요한복음 본문들에 근거한다. 그리스어로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은 ὁ παράκλητος(ho paráklētos)인데, 이는 흔히 ‘대언자’, ‘변호자’, ‘중보자’를 뜻하는 “보혜사” 혹은 “대언자(Talsmanden)”로 번역되지만, 동시에 “위로자(Trøsteren)”라는 의미로도 번역된다.
1819년 덴마크 신약성경(NT-1819)에서는 이 단어를 “대언자(Talsmanden)”로 번역하였다. 반면 루터(Martin Luther)는 독일어 성경에서 이를 “위로자(der Tröster)”로 번역하였으며,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바로 그 루터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 또한 이러한 번역은 《Huus- og Reyse-Bibel》에도 이어졌다.
이 점은 키르케고르의 해석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단순히 진리를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라, 실패하고 또 은혜를 남용하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다시 은혜(Naade)를 분배하는 “위로자(Trøsteren)”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단순한 교사라기보다, 무한한 은혜의 현재적 전달자(Dispensator)이다. ↩︎ - 이는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하신 고별 강화(Afskedstale), 곧 요한복음 13–17장을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Trøsteren),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Sandheds Aand)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Trøsteren)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5:26–16:7)
또한 요한복음 14장 15–31절도 참조하라. 특히 25–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Trøsteren)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Hellig Aand),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전통적 이해를 먼저 언급한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령(ὁ παράκλητος, ho paráklētos)을, 예수께서 떠나신 뒤 남겨진 제자들의 상실감과 슬픔을 위로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게 성령은 단순히 “예수의 부재를 위로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본보기(Forbilledet)로서의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은혜(Naade)를 현재화하는 “은혜의 분배자(Dispensator)”이다. 따라서 “보혜사(Trøsteren)”라는 명칭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실패한 존재를 다시 일으키는 무한한 은혜의 사역을 뜻하게 된다. ↩︎ - Dispensator :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는 ‘회계 담당자’, ‘관리인’, ‘청지기’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면제(dispensation)를 부여하는 자”, 곧 율법(Loven)으로부터 풀어 주고, 용서하며, 형벌에서 해방시키는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성령(Hellig-Aand)을 “은혜의 분배자(Naadens Dispensator)”라고 부를 때, 이는 단순히 은혜를 전달하는 행정적 관리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본보기(Forbilledet)로서의 그리스도 앞에서 끊임없이 실패하는 인간에게 계속해서 은혜(Naade)를 적용하고 베푸는 존재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키르케고르에게 성령은 단순히 율법을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다시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현재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즉 성령은 단순한 교사(Talsmanden)가 아니라, 실제로 죄인을 자유롭게 하고 위로하는 “보혜사(Trøsteren)”이다. ↩︎ - 이는 한편으로는 고해성사(skriftemål)에서의 사죄 선언(absolution)을 가리킨다. 거기서 목사는 안수와 함께 각 사람에게 죄 사함을 선포한다(두 사람씩 앞으로 나와 받음).
“너희가 마음으로부터 너희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며, 변함없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Barmhjertighed)로 피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후 더 나은 삶과 단정한 삶을 힘써 살 것을 약속하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내 직분의 권위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부터 내게 주신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와 권능에 따라,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너희 모든 죄의 용서를 선포하노라. 아멘.”
또한 이는 성찬(nadver) 이후의 파송 선언(bortsendelsesordene)도 가리킨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제 자기의 거룩한 몸과 피로 너희를 먹이시고 마시게 하셨으니, 그 몸과 피로 너희 죄를 위하여 충분한 대가를 치르셨다(fyldestgjort for Eders Synder). 그분께서 그것을 통하여 너희를 참된 믿음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강하게 하시고 붙드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충분한 대가가 치러졌다(der er gjort Fyldest)”이다. 이는 단순히 죄가 무시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Forsoning)가 죄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켰다는 뜻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통찰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인간이 단지 과거의 죄 때문에만 은혜(Naade)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인간은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계속 실패하며, 심지어 은혜 자체를 남용(Misbrug)한다. 따라서 인간은 다시 은혜를 필요로 하게 된다. ↩︎ - 이는 초대교회(oldkirkelige)에서 세례(dåb)를 죽음의 자리(Dødsleiet)까지 미루는 관행을 가리킨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로마 황제 Constantine the Great인데, 그는 337년 죽기 직전에 니코메디아의 감독 Eusebius of Nicomedia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관행의 배경에는 당시 교회가 세례를 단순한 입교 의식이 아니라, 죄 사함과 새로운 삶의 결정적 사건으로 매우 엄중하게 이해했다는 점이 있다. 특히 세례 이후에 범하는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세례를 미루려 했다.
바로 이 점을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언급한다. 그는 이러한 태도 속에 일종의 “깊은 통찰(dyb Betragtning)”이 있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보자면, 기독교(Χstd.)는 죽음의 순간에서는 가장 “유리한” 종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곧 삶의 투쟁(stræben)이 끝난 뒤에 은혜(Naade)를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것이 결국 우울(Tungsind) 혹은 세속적 영리함(verdslig Kløgt)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본보기(Forbilledet)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는 실존적 요구(Fordring)를 회피하는 태도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죽기 전에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실패하고, 계속 다시 은혜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Hellig-Aand)은 단순한 과거 죄의 사면자가 아니라, 존재(Tilværelsen)의 전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은혜를 현재화하는 “보혜사(Trøsteren)”이며 “은혜의 분배자(Naadens Dispensator)”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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