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기독교인이다”라는 말의 위험
— 키르케고르와 한국 교회
한국은 종종 “기독교 국가에 가까운 나라”라는 말을 듣는다. 인구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으로 분류되고,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정치와 사회에서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 어떤 지역에서는 십자가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보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가 크게 확장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가 널리 퍼질수록, 오히려 기독교는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논지는 단순하다. 국가나 사회는 숫자로 존재한다. 인구가 있고, 다수가 모일 때 국가가 성립한다. 국가의 논리는 언제나 숫자에 비례한다.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조직, 더 큰 영향력은 국가의 힘을 의미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단 한 사람의 참된 기독교인이 있어도 기독교는 존재한다. 반대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 가운데 아무도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인(Christen)”이라는 개념이 본질적으로 대립 속에서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와 충돌한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삶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때로는 미움과 오해, 심지어 박해를 동반하는 삶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회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회에서는 더 이상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때 기독교는 사라진다. 이름은 남아 있지만, 내용은 사라진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런 현상을 “크리스텐덤(Christenhed)”이라고 불렀다. 즉 기독교가 사회 전체의 문화가 되어버린 상태다. 교회는 존재하고, 목회자는 존재하고, 예배는 드려진다. 그러나 그 안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과 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의 질서 속에 편안하게 자리 잡는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한국 교회 역시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한국 사회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숫자가 곧 기독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이 흐려질 수도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라는 말이 더 이상 삶의 결단을 의미하지 않을 때, 그 말은 단지 종교적 신분이나 문화적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교회는 사회의 한 기관이 되고, 신앙은 하나의 전통이 된다. 그때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편안하게 공존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개인의 결단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다수의 문화가 아니라, 한 사람의 믿음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언제나 “단독자”의 문제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수백만의 기독교인이 있는 사회에서, 정말로 기독교인은 몇 명인가?
교회가 많아질수록 기독교가 깊어지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인가?
우리는 정말 기독교인이 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단지 기독교인이라고 불리고 싶은 것인가?
어쩌면 오늘 한국 교회가 다시 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이다.” 이 말이 과연 기독교의 승리인지, 아니면 기독교가 사라졌다는 신호인지 말이다.
주석
- 순간 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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