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11, IIA93

하나님(Gud)께서 온 세상(Verden)을 창조하셨을 때, 그것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a (창세기 1:31)

반면, 그리스도(Christus, Χstus)께서 십자가(Korset) 위에서 죽으셨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울려 퍼졌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1837년 6월 9일

이는 창세기 1장 31절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 개역개정)

흥미롭게도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는 표현은 1550년부터 1740년까지 덴마크의 공식 성경 번역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표현이 공식 번역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1년 구약 공식 번역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훨씬 이전부터 다른 문헌들에서는 사용되고 있었다.

먼저 한스 타우센(Hans Tausen)이 1535년에 번역한 『모세오경(De fem Mosebøger)』에서 이미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1693년판 『마르틴 루터의 소교리문답(Dr. M. Luthers liden Catechismus)』과 그 이후 여러 판본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다(목록 번호 189, 1849년판 참조).

이후 이 표현은 다른 저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예를 들어 S. B. 헤르슬렙(S.B. Hersleb)의 『성경사 교과서(Lærebog i Bibelhistorien)』(제3판, 코펜하겐, 1826[1812])에서는 창조 기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그것은 심히 좋았다 (saare godt).”(2쪽 참조)

또한 『덴마크 예식서(Forordnet Alter-Bog for Danmark)』(1830년판, 원판 1688)의 혼인예식(Brudevielse)에서도 창세기 1장 31절은 다음과 같이 인용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그것은 모두 심히 좋았다 (altsammen saare godt).”(261쪽 참조)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일기에서 사용한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라는 표현이 당시의 공식 성경 번역에서 그대로 인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한다.

1837년 당시 덴마크에서 사용되던 공식 성경은 1740년 성경(GT-1740)이었지만, 그 번역에는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라는 표현이 없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공식 성경이 아니라, 당시 널리 읽히던 교리문답(Catechismus), 성경사 교재(Bibelhistorie), 예식서(Alter-Bog) 등의 교회 문헌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던 표현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키르케고르가 성경을 인용할 때 단순히 공식 번역만을 따르지 않고, 당시 교회 전통 속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언어를 자연스럽게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가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라는 표현을 선택한 것은, 창조의 선함(godhed)을 최대한 강조하려는 의도와도 잘 어울린다. 이러한 강조는 이어지는 일기에서 십자가 위의 “다 이루었다(det er fuldbragt)”와 대조되며, 창조(Creation)의 완성과 구속(Redemption)의 완성을 대비시키는 키르케고르의 사유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IIA94[a]

그러나 주목할 것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라는 선언은 인간(Menneske)이 창조되기 이전이 아니라, 인간 창조가 완성되는 여섯째 날(den 6te Dag)에 선포되었다는 점이다.a 마치 이것을 통해 단순히 “좋다(godt)” 이상의 어떤 것이 암시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점을 다음의 놀라운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b (막 10:18, 개역개정)

즉, 그리스도(Christus, Χristo) 밖에 있는 존재는, 헤겔주의자(Hegelianerne)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수 존재(den rene Væren)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c

1837년 6월 23일

이는 창세기 1장 25절창세기 1장 31절의 표현 차이를 가리킨다.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Menneske)을 창조하시기 이전, 곧 창세기 1장 2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5, 개역개정)

반면, 하나님께서 인간(Menneske)을 창조하신 후(창 1:26–27), 창세기 1장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 개역개정)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주목한 성경의 미묘한 표현 차이를 설명한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창조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각 창조를 마치실 때마다 단순히 “좋았더라(godt)”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그 선언이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로 강화된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차이에 주목한다. 그는 일기에서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가 인간 창조 이전이 아니라 인간 창조 이후에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단순히 ‘좋음(godt)’ 이상의 의미를 암시한다고 본다.

그의 관심은 창조 자체보다도, 인간(Menneske)의 출현이 하나님의 창조를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시키는 사건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관찰은 이어지는 메모에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와 연결되며, 창조의 선함(godhed)과 그리스도(Christus) 안에서 드러나는 완성(Fuldbringelse) 사이의 변증법을 전개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는 마가복음 10장 18절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8, 개역개정)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일기에서 인용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Ingen er god uden Gud)”가 마가복음 10장 18절에서 온 말씀임을 밝힌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자 청년(den rige mand)이 자신을 “선한 선생님(gode Mester)”이라고 부르자 이에 응답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이 생각하는 도덕적 의미의 선함(godhed)을 넘어, 참된 선함(godhed)은 오직 하나님(Gud)께만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신다.

키르케고르는 이 구절을 창세기 1장의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와 연결하여 사유한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께서 선하다(god)고 선언하셨지만, 선함(godhed) 자체의 근원은 피조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창조의 선함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선함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키르케고르는 이어서 그리스도(Christus)를 언급한다. 그의 관심은 단순히 도덕적 선함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선함(godhed)이 그리스도(Christus)를 통해 어떻게 완성(Fuldbringelse)되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조의 선함과 구속의 완성을 연결하는 그의 신학적 사유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된다.

이는 헤겔(Hegel)이 자신의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에서 논리를 ‘순수 존재(den rene Væren, das reine Seyn)’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헤겔에게 순수 존재(den rene Væren)란 모든 구체적인 규정(concrete Bestemmelser)을 완전히 추상해 낸 가장 극단적인 추상(abstraktion)이다.

그는 『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Seyn), 순수 존재(reines Seyn), 곧 아무런 추가적인 규정도 없는 존재(ohne alle weitere Bestimmung).”

또한 『철학 학문의 백과사전(Encyc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제8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수 존재(das reine Seyn)는 사유(reiner Gedanke)이면서 동시에 아무 규정도 없는 단순한 직접성(das unbestimmte einfache Unmittelbare)이기 때문에 출발점이 된다. 최초의 시작(der erste Anfang)은 매개된 것(Vermitteltes)일 수도 없고, 더 규정된 것(bestimmtes)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편 H. L. 마르텐센(H.L. Martensen)은 순수 존재(den rene Væren)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수 존재(den rene Væren) = 무(Nichts). 이것은 모든 사유 규정(Tankebestemmelser) 가운데 가장 비어 있고 가장 내용이 없는 규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더 이상 추상할 수 없는 마지막 규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무 전제(Forudsætning)도 갖지 않는 유일한 범주(Kategorie)이지만, 다른 모든 범주들은 이것을 전제로 하며 그 안에 이것을 포함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비로소 사유(Tænkningen)는 확고한 발판을 얻고, 자기와 독립된 진리(uafhængige Sandhed)를 인식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헤겔주의자들이라면 그것을 순수 존재(den rene Væren)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한 배경을 설명한다.

헤겔 철학에서 순수 존재(den rene Væren)는 모든 규정(Bestemmelse), 모든 차이(Forskel), 모든 내용을 제거하고 남는 가장 추상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헤겔은 자신의 논리학을 바로 이 순수 존재에서 출발시킨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이 개념을 언급하는 의도는 헤겔을 따르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막 10:18)는 말씀을 연결하면서, 그리스도(Christus) 밖에 있는 존재를 헤겔적 의미의 순수 존재(den rene Væren)에 비유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순수 존재는 구체성(Konkrethed)과 인격(Personlighed), 그리고 구속(Frelse)의 충만함을 결여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헤겔에게 순수 존재는 철학적 출발점이지만, 키르케고르에게는 오히려 그리스도(Christus) 안에서 계시되는 참된 존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특히 그는 이 메모에서 창세기의 “심히 좋았더라(saare godt)”와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det er fuldbragt)”를 연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존재(den rene Væren)의 추상적 분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Fuldbringelse)되는 존재이다.

이 점은 헤겔 철학과 키르케고르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 준다. 헤겔은 순수 존재에서 출발하여 변증법을 통해 구체성으로 나아가지만,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Christus) 안에서만 참된 선함(godhed)과 완성(Fuldbringelse)이 주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 밖의 순수 존재는 철학적 추상에 머무를 뿐이며, 구원의 실재에는 이르지 못한다.


IIA95

그러므로 신약(Nye Testamente, N. T.)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모든 역사(Guds Gjerning)가 선하다(god)고 말한다. 이는 아직 차이들(Differentserne)이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den gode Gjerning)을 끝까지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개역개정)

1838년 11월 11일


해설

이 짧은 메모에는 키르케고르의 중요한 변증법이 이미 나타납니다.

  • 창조(Creation)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다(saare godt)”고 선언하십니다.
  • 그러나 구속(Redemption)에서는 단순한 “좋음”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det er fuldbragt)”가 선포됩니다.

즉, 창조는 선함(godhed)의 완성이지만, 십자가는 완성(Fuldbringelse)의 사건입니다.

또한 키르케고르는 “심히 좋았다”가 인간 창조의 완성과 함께 선언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마가복음 10장 18절의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말씀과 연결합니다. 그의 암시는, 그리스도(Christus)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 밖의 단순한 존재(den rene Væren, 순수 존재)는 동일한 차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1장 6절을 통해 그는 창조의 선함보다 더 깊은 구속의 완성, 곧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i os) 시작하신 선한 일(den gode Gjerning)을 끝까지 이루시는 역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키르케고르 후기 사상에서 중요한 생성(Tilblivelse)과 완성(Fuldendelse)의 변증법으로 이어지는 초기 사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DD:12, II A 97

기적(Under)의 무능력(Uformuenhed)—이 표현 자체가 사실은 모순이므로 이 말을 사용함을 용서해 달라(sit venia verbo)—을 그 자체로 생각해 보자. 즉, 기적을 어떤 확신(Overbeviisning)을 일으키는 능력과 분리하여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해, 기적을 오직 사변(Spekulation)에 대해서만 객관적(objektive, gegenständliche)으로 나타나는, 영원한 자유(evige Frihed)가 스스로 부여한 조건들(Betingelser), 곧 시간(Tid)과 공간(Rum)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현상과 분리하여 생각해 보자.1

이 점은 다음 말씀 속에 이미 표현되어 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6:29, 31, 개역개정)

더 깊은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Christus, Χstus)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단지 문제를 더 멀리 미루어 놓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그런 사실(Factum)이 그들에게 전해진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신(Overtro)일 뿐이다.

혹은 무관심(Indifferente)할 수도 있다. 또는 완전한 증명을 거친 후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기적(Under)이라고 받아들이겠는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바로 그 구체적인 사례(concrete Tilfælde)에 대해 기적을 말하는 순간, 동시에 기적의 개념(Begreb) 자체를 폐기(ophæve)해야 할 것이다.


다우브(Daub)는 바우어(Bauer)의 『학술지(Zeitsskrift)』 제1권 제2호 103쪽에서 매우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a 의심(Tvivl)과 불신(Vantro)은 사람들이 성경의 기적(bibelske Underværker)의 진실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한, 오히려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이러한 요구 속에서는 역사(Geschichte)에서 자유(Freiheit)가 무시된다. 왜냐하면 기적을 믿기 위해서는 확실하고 참된 사실(Factum)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으로 규정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연(Natur)에서는 필연성(Nothwendigkeit)이 무시된다. 왜냐하면 기적은 자유로운 행위(frie That)인데도 마치 하나의 자연 현상(Natur-Begebenheit)처럼 보아야 한다고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적을 경험(erlebt)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의 구주(Weltheiland)가 승천(Himmelfahrt)하실 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단지 그가 땅에서 떠나가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그 무조건적인 자유(unbedingte Freiheit), 곧 그가 떠나가시는 능력(Macht)은 보지 못했다.”

“기적 자체인 진리(Wahrheit)는 실현(verwirklichte)되었고, 그 실재성(Wirklichkeit)은 그 운동의 덧없는 광경(vergänglichen und vergangnen Anblick)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Macht)에 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역사나 자연의 관점에서 기적의 진리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스스로 다음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곧 그들 안에서는 조건지어진 자유(bedingte Freiheit)가 역사 연구에서는 인과율(Gesetz der Causalität)에, 순전히 경험적인 자연 연구에서는 감각성(Sinnlichkeit), 곧 인간이 동물성과 공유하는 감각적 차원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1837년 6월 12일

이는 『사변신학 저널(Zeitschrift für spekulative Theologie)』 제1권 제2호 103쪽부터 104쪽 첫머리까지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다만 원문과 비교하면 철자법(Orthografi)과 문장부호(Interpunktion)에는 일부 차이가 있다.

  • pragmatisirenden Geschichts- … Kunde: 여기서 다우브(Daub)는 두 가지 역사 서술 방식을 서로 대조하고 있다. 첫째는 실용적(또는 인과적) 역사 서술(pragmatische Geschichte)이다. 이것은 역사적 현상(historiske Fænomener)의 원인(Årsager)을 규명하고 설명하려는 역사 서술을 말한다. 둘째는 단순히 기술하는(deskrivende) 자연과학(Naturvidenskab)과 유사한 역사 서술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historiske Kendsgerninger)을 그저 묘사하거나 제시하는 것(beskriver eller fremlægger)에 그칠 뿐, 그 의미나 원인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해설

이 주석은 다우브가 비판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다우브에 따르면, 기적(Under)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모든 역사적 사건을 인과관계(Causalitet)로 설명하려는 실용적 역사학(pragmatiske Historie)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학처럼 단지 관찰 가능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경험주의적 역사 서술(empirisk Historie)이다.

그러나 두 방식 모두 기적(Under)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적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Factum)도 아니고 자연 현상(Naturbegivenhed)도 아니라, 자유(Frihed)의 현현(Manifestation)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가 이 인용을 받아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기적을 객관적 증명(objectivt Bevis)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순간, 이미 기적의 본질은 사라진다고 본다. 기적은 역사적 사실 여부보다도, 영원한 자유(evige Frihed)가 시간(Tid)과 공간(Rum)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적은 관찰의 대상이라기보다 믿음(Tro) 속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다.


DD:13 (IIA97)

다우브(Daub)가 말한 것이 옳은 것은 사실이다(바우어(Bauer)의 『학술지(Tidsskrift)』). 곧, 그리스도(Christus, Χ.)의 세 가지 말씀(Udsagn) 속에 그의 전 생애사(Livshistorie)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a

첫째,“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누가복음 2:49, 개역개정)

둘째,“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9:4, 개역개정)

셋째,“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개역개정)

그러나 또한 다음의 다른 세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누가복음 2:40, 개역개정)

둘째,그는 시험을 받으셨다(han fristes).(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

셋째,“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개역개정)

1837년 6월 16일


이는 카를 다우브(Carl Daub)의 논문 「기독교 교리사와 교회사 형식(Die Form der christlichen Dogmen- und Kirchen-Historie)」(『사변신학 저널(Zeitschrift für spekulative Theologie)』 제2권, 1837년, 제1호, 88–89쪽)를 가리킨다. 다우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복음서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말씀),“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누가복음 2:49)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또 다른 말씀,“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9:4, 또한 5:17 참조) 그리고 온 인류에게 하신 말씀,“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이 세 말씀(drei Worte)은 다른 모든 것들이 관련되는 세 가지 근본 자료(Data)와 같다.

곧, 예수께서 계시하신 가르침(Lehren), 행하신 행위(Thaten), 당하신 고난(Leiden),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이 그분에 대하여 기록한 모든 것은 이 세 가지 근본 자료(Data)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다른 모든 사건이 이 세 가지 자료 가운데 각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한 각각의 자료가 단지 암시만 하는 사실들(indicirten Faktums)이든, 혹은 예언(Weissagung)이나 기적(Wunder)처럼 직접 묘사된 사실들이든, 그것들이 모두 이 세 가지 자료와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밝혀낼 수만 있다면,

그 내용(Inhalt)이 지닌 형식(Form)은 그 내용과 함께 숭고한 통일성(erhabene Einheit) 속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 아무런 모순도 없는 동일성(Identität) 속에서 인식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시대의 역사(Historie)가 다루는 고유한 대상, 곧 예수의 생애(Leben Jesu)—유일하게 하나님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gleich-göttliche und menschliche) 생애—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다음은 일반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핵심 개념어는 덴마크어와 헬라어를 병기했습니다.


DD:14 (IIA98)

로마서 8장 19절에서 말하는 피조물의 간절한 고대(ἀποκαραδοκία τῆς κτίσεως, apokaradokia tēs ktiseōs)가 바로 이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시적인(poetiske) 암시(Glimt)들이 여러 전설(Sagn) 속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인간(Menneske)의 사랑(Kjærlighed)으로 구원을 받는 인어(Havfruer) 이야기나, 노움(Gnomer)에 관한 전설들이 그러하다.a (예를 들면 푸케(F. de la Motte Fouqué)b, 호프만(Hoffmann)c, 잉에만(Ingemann)d 등이 이러한 옛 전설(gl. Sagn)을 다시 재현(reproducerende)하였다.)

이러한 전설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이 영적 존재들(Aander)이 인간(Menneske)을 파멸(Ødelæggelse)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1837년 6월 26일

노움(Gnomer)은 땅의 정령(jordånder), 곧 난쟁이 같은 존재(dværgagtige væsner)를 가리킨다.


해설

노움(Gnom)은 유럽, 특히 게르만 전승에 등장하는 대지(땅)의 정령이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작은 난쟁이(dværg)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산속이나 동굴, 땅속에서 살아가는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키르케고르가 DD:14에서 인어(Havfruer)와 함께 노움(Gnomer)을 언급한 이유는, 이러한 전설 속 존재들이 모두 구원(Forløsning)을 갈망하는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인간(Menneske)의 사랑(Kjærlighed)을 통해 이들이 구원을 얻거나 더 높은 존재로 변화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곧바로 이러한 전설의 또 다른 측면(anden Side)도 덧붙인다. 곧 이러한 영적 존재들(Aander)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존재만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파멸(Ødelæggelse)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노움(Gnomer)은 단순한 민속적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의 간절한 고대(ἀποκαραδοκία τῆς κτίσεως)를 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전설들을 통해 피조세계 전체가 구속을 기다린다는 로마서 8장의 사상을 낭만주의 문학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드 라 모트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é, 1777–1843)는 독일의 작가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동화 『운디네(Undine)』(1811)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해설

푸케(Fouqué)의 『운디네(Undine)』는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운디네(Undine)는 물의 정령(vandånd)으로, 인간(Menneske)의 사랑(Kjærlighed)을 통해 영혼(Sjæl)을 얻게 되고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DD:14에서 인어(Havfruer)와 함께 푸케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운디네』를 비롯한 낭만주의 문학이 피조물의 간절한 고대(ἀποκαραδοκία τῆς κτίσεως)를 시적으로 표현한 사례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과의 사랑을 통해 더 높은 존재로 변화하거나 구원을 갈망하는 이야기는, 피조세계 전체가 구속을 기다린다는 로마서 8장 19절의 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는 곧이어 이러한 영적 존재들(Aander)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반대로 파멸(Ødelæggelse)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점도 함께 언급한다. 따라서 푸케의 작품은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적 진리 자체라기보다, 기독교 진리를 희미하게 반영하는 낭만주의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1822)은 독일의 법률가, 작가, 작곡가, 그리고 음악철학자이다. 그는 특히 동화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과 단편을 많이 썼으며, 프리드리히 드 라 모트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é)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운디네(Undine)』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1816년 초연(opført 1816)되었다.


해설

호프만은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현실과 환상,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가 교차하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정령(Aander), 요정, 자동인형, 악령 등 신비로운 존재들이 자주 등장하며, 인간과 초자연적 세계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키르케고르가 DD:14에서 호프만을 언급한 이유는, 그가 푸케(Fouqué)와 마찬가지로 옛 전설(gl. Sagn)을 문학적으로 재현(reproducere)한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호프만이 작곡한 오페라 『운디네(Undine)』는 인간의 사랑(Kjærlighed)을 통해 물의 정령이 구원을 갈망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피조물의 간절한 고대(ἀποκαραδοκία τῆς κτίσεως)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관심은 이러한 낭만주의 작품 자체에 있지 않다. 그는 이러한 전설과 문학이 로마서 8장 19절에 나타나는 피조세계의 구속에 대한 갈망을 희미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호프만의 작품은 기독교 계시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시적으로 암시하는 문화적 흔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베른하르드 세베린 잉에만(Bernhard Severin Ingemann, 1789–1862)은 덴마크의 작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출판하였다.

  • 『지하의 존재들(De Underjordiske)』(1817)
  • 『동화와 이야기(Eventyr og Fortællinger)』(1820)
  • 『늑대인간, 살아 있는 죽은 자, 코르시카인(Varulven, Den levende Døde, Corsicaneren)』 ― 세 편의 이야기(Tre Fortællinger, 1835)

DD:15 (IIA99)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Folk)의 전설(Sagn)에는 그들의 가장 뛰어난 인물(meest udmærkede Mænd), 곧 영웅(Heroer)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 역시 창세기(Genesis)의 다음 말씀을 상기시킨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세기 3:15, 개역개정)

이 영웅들은 모두 오직 발꿈치(Hæl)만 상처를 입는 존재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 크리슈나(Krischna)
  • 헤라클레스(Hercules)
  • 발두르(Baldur)

가 그러하다.

1837년 6월 26일

이는 창세기 3장 15절을 가리킨다. 뱀이 하와(Eva)를 유혹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kundskabens træ)의 열매를 먹게 한 후, 하나님(Gud)께서 뱀(slange)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 개역개정)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DD:15에서 언급한 “발꿈치(Hæl)”의 상징이 창세기 3장 15절에 근거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키르케고르는 여러 민족의 전설(Sagn)에 등장하는 위대한 영웅(Heroer)들이 오직 발꿈치만 상처를 입는 존재로 묘사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러한 공통된 모티프를 창세기 3장 15절과 연결한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흔히 최초의 복음(Protoevangelium)으로 이해해 왔다. 즉, 여자의 후손(kvindens sæd)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Christus)를 가리키며, 뱀은 그의 발꿈치(Hæl)를 상하게 하지만, 그리스도는 결국 뱀의 머리(Hoved)를 상하게 하여 승리하신다는 예언으로 읽어 왔다.

키르케고르가 크리슈나(Krischna), 헤라클레스(Hercules), 발두르(Baldur)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영웅 전설 속에도 결정적인 약점은 발꿈치에 있다는 유사한 모티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러한 전설들을 창세기의 계시와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여러 민족의 신화와 전설 속에 복음의 원형적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메모에서 키르케고르의 관심은 신화 자체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다양한 전승 속에 악에 대한 최후의 승리와 구속(Forløsning)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갈망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이는 DD:14에서 “피조물의 간절한 고대(ἀποκαραδοκία τῆς κτίσεως)”를 낭만주의 전설과 연결한 사고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크리슈나(Krishna)는 힌두교(Hinduisme)의 신(神)이다. 그는 실수로 발사된 화살(vådeskud)이 발(foden)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해설

키르케고르가 DD:15에서 크리슈나(Krischna)를 언급한 이유는, 그의 죽음이 발(foot) 또는 발꿈치(Hæl)와 연결되어 전승되기 때문이다.

힌두교 전승에 따르면, 크리슈나는 생애의 마지막에 숲속에서 쉬고 있을 때 사냥꾼 자라(Jara)가 그의 발을 사슴으로 오인하여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이 그의 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전설을 창세기 3장 15절의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du skal sønderknuse hans Hæl)라는 말씀과 연결한다. 그는 크리슈나를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권의 영웅 전승 속에 발 또는 발꿈치의 상처라는 공통된 모티프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DD:15에서는 크리슈나(Krischna), 헤라클레스(Hercules), 발두르(Baldur)가 함께 언급된다. 이들은 모두 결정적인 약점이나 죽음이 발 또는 발꿈치와 관련되어 전승되는 영웅들이다.

키르케고르의 관심은 이러한 신화들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여부가 아니라, 인류의 다양한 전승 속에 창세기 3장 15절의 원형적 모티프, 곧 악과의 싸움, 상처,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전설들을 복음의 계시를 대신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복음을 멀리서 반향하는 문화적 흔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헤르쿨레스(Hercules)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Herakles)를 가리키는 로마식 명칭(rom. betegnelse)이다.그러나 여기서는 실제로는 아킬레우스(Achilleu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킬레우스는 오직 발꿈치(Hæl)만이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약점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결국 그 발꿈치에 화살(pil)을 맞아 죽음을 맞이하였다.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DD:15에서 “헤르쿨레스(Hercules)”라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아킬레우스(Achilleus)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설명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Herakles, 로마명 Hercules)는 위대한 영웅이지만, 발꿈치만이 유일한 약점이라는 전승은 없다. 반면 아킬레우스(Achilleus)는 어머니 테티스(Thetis)가 그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스틱스 강(Styx)에 담글 때 발꿈치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만은 보호받지 못했다는 유명한 전승이 있다. 결국 그는 발꿈치(Hæl)에 화살을 맞아 죽는다.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DD:15에서 말한 “발꿈치만 상처를 입는 영웅”이라는 예는 헤라클레스보다 아킬레우스에게 훨씬 잘 들어맞는다. 편집자는 이러한 이유로 키르케고르가 이름을 혼동했거나 단순한 착오를 범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의 논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여러 문화의 영웅 전승 속에서 발꿈치(Hæl)라는 상징적 모티프가 반복되는 점에 주목하며, 이를 창세기 3장 15절의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다. 즉, 그의 관심은 특정 신화의 정확한 세부 내용보다, 인류 문화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속과 승리의 원형적 흔적을 지적하는 데 있다.

발두르(Baldur)는 북유럽의 신(nordiske gud)이다. 그는 겨우살이(misteltenen)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으로도 상처를 입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겨우살이 가지(kvist)로 만든 화살(pil)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였다.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DD:15에서 언급한 발두르(Baldur)가 북유럽 신화에서 거의 불사(不死)의 존재로 묘사된다는 점을 설명한다.

북유럽 신화에 따르면, 발두르의 어머니 프리그(Frigg)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아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그러나 너무 어리다고 여겨 겨우살이(mistelten)만은 예외로 남겨 두었다.

이를 알게 된 로키(Loki)는 겨우살이 가지로 창 또는 화살을 만들어, 앞을 보지 못하는 신 호드르(Höðr)에게 던지게 하였다. 그 무기가 발두르를 맞히면서 그는 죽음을 맞는다.

키르케고르가 크리슈나(Krischna), 아킬레우스(Achilleus)(본문에는 헤르쿨레스(Hercules)로 기록됨), 그리고 발두르(Baldur)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는, 이들 모두가 거의 무적이지만 단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영웅 또는 신이라는 공통된 모티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전설을 창세기 3장 15절의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읽는다. 물론 발두르는 성경이 말하는 여자의 후손(kvindens sæd)이나 피조물이 고대하는 아들이 아니다. 키르케고르의 의도는 발두르를 그리스도의 예표로 동일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여러 문화권의 신화 속에 상처를 입는 구원자,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영웅, 죽음을 통한 승리와 같은 모티프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러한 전설들은 복음 자체가 아니라, 인류 문화 속에 남아 있는 구속(Forløsning)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갈망을 반영하는 시적인 반향(poetiske Glimt)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DD:16 (IIA100)

중세(Middelalderen)는 낭만적(romantisk)으로 영원(Evighed)의 한 측면만을 이해하였다.a 곧 시간(Tid)의 소멸(Forsvinden)이라는 측면이다. (중세 시(Digte fra Middelalderen)에는 그 예가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일곱 잠자는 사람들(Syvsovere)의 전설 등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Jøderne)처럼 영원의 또 다른 측면, 곧 영원 안에 있는 시간의 내면성(Tids Inderlighed i Evigheden)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중세는 분명“천 년이 하루와 같다.”고는 말하였다. 그러나“하루가 천 년과 같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세인은 노력하며(stræbende) 살아가는 가운데 복된 한순간(Saligheds Øieblik)은 가질 수 있었지만, 영원한 복(Evigheds Salighed) 자체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래의 말씀,“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2는 단순한 평행 표현(simple Paralellisme)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히려 참으로 사변적인(speculativt) 진술(Udsagn)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시간 개념(Tidsbegrebet)을 폐기(ophæver)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성한다(fuldstændiggjør).b

1837년 6월 30일

1800년경에는 낭만적(romantisk)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연대기적(chronologisk) 의미이다. 이 의미에서 낭만적(romantisk)이라는 말은 중세(Middelalderen)의 예술 전통을 가리켰다. 중세의 기독교 예술(kristne kunst)은 고전적(classiske) 예술과도, 근대적(moderne) 예술과도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둘째는 유형론적(typologisk) 의미이다. 이 의미에서 낭만적(romantisk)이라는 말은 주로 소설(roman)이 허구(fiktion)의 틀 안에서 감정(følelser)과 열정(lidenskaber)을 다루는 방식을 가리켰다.

헤겔(Hegel)은 낭만적 예술(romantiske kunst)의 내용을 “절대적 내면성(die absolute Innerlichkeit)”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이를 특히 중세의 기독교 예술(middelalderens kristne kunst)에서 구현된 것으로 보았으며, 낭만적(romantisk)이라는 말을 주로 연대기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반면, 예를 들어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에게서는 이 두 가지 의미가 하나로 결합된다.

그는 『낭만주의 학파(Die romantische Schul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독일의 낭만주의 학파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중세 시(Mittelalters)의 시(Poesie)를 다시 일깨우는 일이었다. 그 시는 중세의 노래(Lieder), 회화와 건축(Bild- und Bauwerken), 예술(Kunst)과 삶(Leben) 속에 나타나 있었던 바로 그 시였다. 그리고 이 시는 기독교(Christenthum)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Blute Christi)에서 피어난 수난의 꽃(Passionsblume)이었다.”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DD:16에서 “중세를 낭만적으로 이해하였다(Middelalderen som romantisk opfattede)”고 말할 때, 낭만적(romantisk)이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한다.

19세기 초 낭만주의(Romantik)는 단순히 감상적이거나 감성적인 것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중세 기독교 문화의 부흥을 의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성(Innerlighed)과 감정, 상상력을 중시하는 예술적 경향을 의미했다.

헤겔은 낭만주의를 절대적 내면성(die absolute Innerlichkeit)의 예술로 규정하며, 그 전형을 중세 기독교 예술에서 찾았다. 반면 하이네는 중세와 낭만주의를 사실상 동일한 문화적 흐름으로 이해하면서, 낭만주의를 기독교에서 피어난 예술이라고 설명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면서도 DD:16에서 중요한 비판을 덧붙인다. 그는 중세(Middelalderen)가 영원(Evighed)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시간(Tid)의 소멸(Forsvinden)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중세는 영원을 시간을 초월한 세계로만 이해했지, 시간이 영원 안에서 새롭게 의미를 얻는 것(Tids Inderlighed i Evigheden)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비판은 훗날 키르케고르가 『철학의 부스러기』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전개하는 순간(Øieblikket)과 동시대성(Samtidighed)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영원은 단순히 시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시간을 완성하는 사건이라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독특한 이해이다.

헤겔(Hegel)에 따르면, 개념(Begreb)들은 서로 변증법적 관계(dialektisk Forhold) 속에 있다. 따라서 어떤 개념은 단순히 부정(benægtet)되거나 소멸(tilintetgjort)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반대 개념에 의해 동시에 부정되면서도 보존(bevaret)된다.

예를 들어, “북쪽(nord)과 북쪽이 아닌 것(ikke nord)”의 관계가 아니라, “북쪽(nord)과 남쪽(syd)”의 관계가 그러하다. 헤겔은 이처럼 동시에 부정되고 보존되는 것을 지양(Aufhebung)이라고 부른다.

사변적 진술(spekulative Udsagn)이란, 이처럼 서로 대립하는 개념들이 이루는 유기적 통일성(organiske Enhed)을 표현하는 진술을 말한다.

예를 들어,“북쪽으로 가는 길은 동시에 남쪽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라는 진술이 그러하다. 여기에서 “하루(1 Dag)”와 “천 년(1000 Aar)”도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 관계(dialektisk Modsætningsforhold)로 이해되고 있다.


해설

이 주석은 DD:16에서 키르케고르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왜 “참으로 사변적인 진술(ægte speculativt Udsagn)”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한다.

헤겔 철학에서 사변적(speculativ)이라는 말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개념이 더 높은 통일성 안에서 함께 유지되는 변증법적 사고를 가리킨다.

그래서 헤겔은 지양(Aufhebung)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지양은 어떤 것을 단순히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보존하고 더 높은 단계에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키르케고르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이해한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니.”

이 말씀은 시간(Tid)을 없애거나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와 천 년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시간 개념을 하나의 더 높은 관점에서 함께 이해하게 함으로써, 시간 개념(Tidsbegrebet)을 완성(fuldstændiggjør)한다.

다만 여기에는 키르케고르 특유의 전환이 있다. 그는 이 문장을 “사변적(speculativ)”이라고 부르면서도, 곧이어 헤겔적 사변에 머물지 않는다. 헤겔에게 변증법은 개념(Begreb)의 자기 전개를 의미하지만, 키르케고르에게 시간과 영원의 통일은 실존(Existens)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영원(Evighed)은 시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으로 들어와 시간을 완성하는 것이며, 이러한 완성은 훗날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순간(Øieblikket)**과 동시대성(Samtidighed)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이 메모는 이미 초기부터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실존적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DD:17 (IIA101)

직접적인 표현(umiddelbart Udtryk)은 얼마나 자주 아이러니(Ironie)와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예를 들어 외렌슐레어(Oehlenschlaeger)a의 다음 시를 보라.3

오, 꽃들이여,
너희에게 일어나는 일이
곧 내게도 일어난다.
가련한 시인(Poet)인 나는
수레국화(Kornblomst)처럼 서서
근심한다(græmmer sig).
곡식(Korn)을 자라게 하는 밭에서
나는 다만 길을 막는 존재일 뿐,
도대체 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하 생략).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직접성(Umiddelbarhed)—비록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이기는 하지만—때문에, 그리스도(Christus, Χsti)의 말씀(Taler)과 더 나아가 신약성경(hellige Nye Testamente, h. N. T.) 전체는 아이러니(Ironie)나 유머(Humor)의 성격(Præg)을 지니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만일 단 한 획(Streg)만 더해졌더라도, 그 표현은 곧바로 가장 강렬한 아이러니유머의 색채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1837년 6월 30일

아담 외렌슐레어(Adam Oehlenschläger, 1779–1850)는 덴마크(da.)의 시인(digter)이다. 그는 1809년 명예교수(titulær professor)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부터 코펜하겐 대학교(Københavns Universitet)에서 미학(æstetik) 특별교수(ekstraordinær professor)로 재직하였다. 또한 1831년부터 1832년까지 코펜하겐 대학교의 총장(rektor)을 지냈다.


해설

아담 외렌슐레어는 덴마크 낭만주의(Romantik)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그는 덴마크 황금시대(Guldalderen)의 문학을 이끈 핵심 인물로, 북유럽 신화와 역사, 민족 전통을 시와 희곡 속에 담아 덴마크 국민문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키르케고르가 DD:17에서 외렌슐레어를 언급한 이유는 그의 시 속에 나타나는 직접성(Umiddelbarhed) 때문이다. 외렌슐레어의 시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을 수레국화(Kornblomst)에 비유하며 순진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아이러니(Ironie)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키르케고르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직접성(Umiddelbarhed)은 때로는 아이러니와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Christus)의 말씀(Taler)과 신약성경(Nye Testamente)의 직접성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아이러니나 유머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결과가 아니라, 진리가 너무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이러니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직접성이다.

이러한 구분은 훗날 키르케고르가 『아이러니의 개념』에서 전개하는 사상과도 연결된다. 그는 미학적 직접성, 아이러니, 그리고 종교적 직접성을 동일한 것이 아니라 서로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직접성(Umiddelbarhed)의 표현이라고 본다.


DD:18, II A 102

아이러니(Ironi)는 분명 어떤 종류의 평온(Rolighed)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 평온은 유머(Humor)의 전개 이후에 뒤따르는 평화(Fred)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 화해(Forsoning)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Brødre i Christo)4이라는 것은, 그 안에서는 다른 모든 차이가 절대적으로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는 사실에 비하면 다른 모든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Christus)는 정말 아무 차이도 두지 않았을까? 요한(Johannes)을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지 않았을까?5 (1837년 6월 30일 저녁 폴 묄러(Poul Møller)와 나눈 매우 흥미로운 대화.)

아이러니는 또한 일종의 사랑(Kjærlighed)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b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Socrates)가 자신의 제자들을 품었던 사랑이 그렇다. (하만(Hamann)의 표현을 빌리면 “정신적 소년애(aandelig Pæderasti)”이다.6) 그러나 그것 역시 결국은 이기적(egoistisk)이다. 왜냐하면 그는 제자들의 구원자(Forløser)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더 높은 의식(Bevidsthed)과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Overskuen) 속에서 제자들의 답답한 표현과 제한된 관점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이 운동(Bevægelse)의 지름(Diameter)은 유머리스트(Humorist)의 운동만큼 크지 않다. 유머리스트는 하늘(Himmel)과 지옥(Helvede) 을 모두 품는다. 기독교인(Christen)은 모든 것을 경멸해야 한다. 반면 아이러니스트(Ironiker)의 가장 높은 논쟁적 운동(polemiske Bevægelse)은 단지 nil admirari(아무것에도 놀라지 않음)에 머문다.

아이러니는 이기적이다. 아이러니는 속물성(Spidsborgerlighed)을 공격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 안에 머문다. 마치 한 마리의 종달새(Sangfugl)가 하늘 높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짐(Baglast)을 버리듯이 개인(Individ)도 자신을 가볍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기적으로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는 것(egoistisk Fanden i Vold)’ 으로 끝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는 아직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스스로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인이 아이러니의 빛 아래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반면 유머(Humor)는 서정적(lyrisk)이다. 그것은 삶의 가장 깊은 진지함(Livs-Alvor)이며 가장 깊은 시(Poesi)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 자체로 형상화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바로크적인 형식 속에서 결정처럼 응결된다. 그것은 흐르지 않는 황금 광맥(den gyldne Aare non fluens)이며, 더 높은 삶(høiere Liv)의 거대한 내적 노력(molimina)이다.

라틴어로 “아무것도 놀라워하거나 경탄하지 않는 것(nil admirari)” 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호라티우스(Horatius)의 『서간집(Epistolarum)』 제1권 제6서의 첫 구절에서 유래한 유명한 격언이다.

덴마크의 고전학자 바덴(J. Baden)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아무것도 경탄하지 않는 것(nil admirari)이야말로 행복(Lyksalighed)을 얻고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는 nil admirari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무것도 위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아무것도 갈망할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

이 표현은 더 오래된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계승한다. 특히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말인 τὸ μηδὲν θαυμάζειν (tò mēdèn thaumázein, “결코 놀라지 않는 것”) 과 연결된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추구한 아타우마시아(athaumastia, ‘놀라움으로부터의 자유’) 의 이상과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 에피쿠로스학파(Epikuræerne)는 아타락시아(ataraxia, 마음의 평정) 를,
  • 스토아학파(Stoikerne)는 아파테이아(apatheia, 정념으로부터의 자유)

최고선으로 보았다. 즉, 평온한 마음(sindsro)정념으로부터의 자유(friheden fra passionerne) 를 지혜로운 사람(den vise)의 이상적인 상태로 이해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윤리 원리(negative moralprincipper) 는 견유학파(Kynismen)와 회의주의(Skepticismen)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 DD:18에서 키르케고르가 아이러니(Ironi)의 최고 운동을 “nil admirari” 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결국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초연한 태도에 머문다는 뜻이다. 반면 유머(Humor)는 하늘(Himmel)과 지옥(Helvede)을 모두 끌어안는 실존적 깊이를 가지므로, 키르케고르는 유머를 아이러니보다 훨씬 높은 단계로 평가한다.

주석 a, II A 103

그러므로 소크라테스(Socrates)는 단지 깨우는 자(vækkende) 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산파(Gjordemoder)였으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해방하거나 구원하는 자(Forløser)는 아니었다. (1837년 10월 30일)

주석 b, II A 104

그러므로 이것은 근대 관념철학(idealistisk Philosophi)의 무모한 자기 확신(Fanden i Vold)과는 전혀 다르다.7

주석 c, II A 105

유머(Humor)는 때로 신성모독(Blasphemi)에까지 가까이 갈 수도 있다. 하만(Hamann)은 차라리 발람(Bileam)의 나귀나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진리를 말하는 철학자에게서 지혜를 듣기를 원할 것이며, 천사나 사도에게서 듣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주석 d, II A 106

이것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하늘의 사다리(Himmel-Stige)가 아니다.8 오히려 이것은 공성 사다리(Storm-Stige, 성을 공격할 때 쓰는 사다리) 이다. 거대한 것이며, 기독교에서는 곧 하나님의 나라(Guds Rige)를 폭력으로 빼앗는 것(at tage Guds Rige med Vold) 에 해당한다.


그리스 자연(den græske Natur)의 전체적인 태도는 조화(Harmonie)아름다움(det Skjønne) 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그 조화에서 벗어나 투쟁(Kamp)을 시작하더라도, 그 투쟁은 여전히 그러한 조화로운 삶의 이해(Livs-Anskuelse)에서 비롯된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 투쟁은 큰 원(Cirkel)을 그리지도 못한 채 곧 끝나 버렸다. 소크라테스(Socrates)가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 전혀 다른 삶의 이해(Livs-Anskuelse)가 등장했다. 그것은 온 자연(hele Naturen)이 타락하였다(fordærvet) 고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논쟁(Polemik)이었고, 가장 큰 날갯짓(Vingestrækning)이었다.

그러나 자연(Naturen)은 복수(Hævn)했다.

그 결과 개인 안에는 유머(Humor) 가 생겨났고, 자연 안에는 아이러니(Ironi) 가 생겨났다.

그리고 둘은 한 지점에서 만난다.

유머는 세상에서 광대(Nar) 가 되기를 원하고, 세상은 실제로 그를 그렇게 받아들인다.

주석 e

장 파울(Jean Paul)은 가장 위대한 유머의 자본가(humoristiske Capitalist) 이다.

주석 f

자연 안의 아이러니(Ironien i Naturen)는 더욱 전개되어야 했다. 예를 들어 인간(Menneske)과 원숭이(Abe)를 나란히 놓는 자연의 아이러니한 병치(Sammenstillinger)가 그렇다. 슈베르트(Schubert)의 『상징론(Symbolik)』에는 이런 예가 적지 않다. 내가 알기로 그리스인들은 이런 사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중세(Middelalderen)의 동화(Eventyr)에는 이런 익살(Lune)이 있다. 어떤 사람이 풍차에서 2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서서 한쪽 콧구멍을 막고 다른 쪽으로 바람을 불어 풍차를 돌렸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아이러니(Ironi)와 유머(Humor)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고 단지 정도(Grad)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유대교(Jødedommen)와 기독교(Christendom)의 관계를 말한 바울(Paulus)의 말로 대답하겠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Alt er Nyt i Christo).

기독교적 유머리스트(den christne Humorist)는 마치 뿌리만 보이고 꽃은 더 높은 태양(høiere Sol)을 향해 피어나는 식물과 같다.

1837년 7월 6일 

Søren Kierkegaards Skrifter, Bd. 24.pdf


주석

  1. 이는 다우브(Daub)의 논문 「기독교 교리사와 교회사 형식(Die Form der christlichen Dogmen- und Kirchen-Historie)」(『사변신학 저널(Zeitschrift für spekulative Theologie)』 제1권 제2호, 95–103쪽)을 참고하라.
    sit venia verbo: 라틴어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을 용서해 달라”,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다면”, 또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이런 표현을 쓰자면”, “표현이 다소 그렇지만”, “이 표현을 용서해 달라” 정도로 옮길 수 있다.
    Manifestation: 현현(Manifestation), 드러남, 나타남, 현시(顯示)를 뜻한다. 이 문맥에서는 영원한 자유(evige Frihed)가 시간(Tid)과 공간(Rum)이라는 조건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현현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는 “현현(Manifestation)” 또는 “드러남”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
  2. 이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가리킨다.“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후서 3:8, 개역개정) ↩︎
  3. 이는 아담 외렌슐레어(Adam Oehlenschläger)의 시 「아침 산책(Morgen-Vandring)」 가운데 「랑엘란 여행(Langelands-Reise)」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는 『시집(Poetiske Skrifter)』 제1권(1805), 364쪽에 수록되어 있다. ↩︎
  4. Brødre og Medarvinger i Χsto : 골로새서 1장 2절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de troende brødre i Kristus)” 과 로마서 8장 17절의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Kristi medarvinger)” 라는 표현을 결합한 것이다. ↩︎
  5. 요한복음 13:23, 19:26, 20:2, 21:7, 20을 가리킨다. 이 본문들에서 요한(Johannes)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den discipel, Jesus elskede)” 로 언급된다. ↩︎
  6. 하만(Hamann)이 『학교극에 관한 다섯 편의 목회 서신(Fünf Hirtenbriefe das Schuldrama betreffend)』(1763)에서 사용한 표현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하만은 “거룩한 소년애(die Schande der heiligen Päderastie)”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Paederastie 는 고대 그리스에서 성인 남성과 소년 사이에 형성되던 동성 관계를 의미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표현을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맺었던 강한 정신적·교육적 관계를 풍자적으로 가리키기 위해 하만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즉, 여기에서 aandelig Paederastie(정신적 소년애) 는 스승이 제자를 자신의 정신적 영향력 아래 두고 형성하는 독특한 교육적 관계를 비판적·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7. 여기서는 특히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G. Fichte)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W.F. Hegel) 을 가리킨다. 또한 헤겔의 덴마크 제자들인 요한 루드비그 하이베르(J.L. Heiberg)한스 라센 마르텐센(H.L. Martensen) 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스승인 헤겔보다 더욱 교훈적(docerende) 이고 가르치려는 태도(belærende) 를 강하게 드러냈다. ↩︎
  8. 창세기 28장 12절과 요한복음 1장 51절을 가리킨다.
    창세기 28: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이는 야곱(Jakob)이 벧엘(Betel)에서 꿈속에 본 하늘의 사다리(Himmel-Stige) 를 말한다.
    요한복음 1:51,“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den aabnede Him̄el)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께서는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며, 인자(Menneskesønnen) 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참된 사다리임을 선언하신다.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하늘의 사다리(Himmel-Stige)” 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성경적 이미지를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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