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엄격하게 묻는다면,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적어도 기독교 신학사에서 키르케고르의 네 범주—절대적 역설, 해소 불가능성, 실족과 믿음, 동시대성—을 하나의 구조로 끝까지 밀어붙인 독립적인 신학자는 찾기 어렵습니다.

앞서 제가 루터·바르트·불트만 등을 나열한 것은 질문의 강도를 제대로 잡지 못한 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설적 계시를 강조하지만,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역설을 다른 신학적 범주 안에 위치시킵니다.

키르케고르의 고유한 구조

키르케고르에게 절대적 역설(det absolute Paradox)은 단순히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가 아닙니다.

영원한 신이 시간 속의 이 개별적 인간이다.

여기서 두 항은 더 높은 개념 안에서 종합되지 않습니다.

  •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 구원사의 보편적 구조로 매개하지 않습니다.
  • 인간의 실존적 자기이해로 번역하지 않습니다.
  • 교회의 교리적 권위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 역사적 연구로 개연성을 높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시대성(Samtidighed)은 이 역설을 해결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역설을 과거 속에 가두어 무해하게 만들 수 없도록, 매번 단독자에게 해결되지 않은 그대로 현전시키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절대적 역설 → 해소나 매개가 아니라 동시대적 현전 → 실족 또는 믿음

신앙도 역설을 해소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모순의 배후에 있는 설명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역설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 역설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왜 다른 신학자들은 끝까지 가지 않는가

루터는 십자가에서 신이 반대되는 모습으로 계시된다고 말하지만, 그 역설을 칭의와 약속의 신학 안에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동시대성’이라는 범주로 해결 불가능한 역설을 매 순간 직접 현전시키지는 않습니다.

초기 바르트는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극단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인간의 화해가 객관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그리스도론적·선택론적 구조를 발전시킵니다. 역설은 계시의 객관적 현실 안에 자리 잡습니다.

불트만은 과거 사건을 선포 안에서 현재화하고 결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성에 매우 근접합니다. 하지만 그는 신화적·교리적 진술을 인간의 실존적 자기이해로 해석합니다. 그 결과 “이 개별적 인간이 신이다”라는 절대적 역설이 실존적 의미로 번역됩니다. 키르케고르가 보존한 충돌이 해석학적으로 매개되는 셈입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현존을 말하지만, 그 현존을 교회 공동체와 대리행위(Stellvertretung)의 구조로 구체화합니다. 따라서 동시대성은 해결되지 않은 역설과의 무매개적 충돌로만 남지 않습니다.

파스칼은 이성의 한계와 숨어 계시는 신을 강조하지만, 키르케고르처럼 절대적 역설과 동시대성을 하나의 실존적 구조로 전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키르케고르와 부분적으로 만날 뿐입니다. 결정적인 지점에서 계시·교회·칭의·선포·실존론 같은 다른 신학적 범주가 역설을 받아들여 정리합니다.

가장 가까운 예외: 레프 셰스토프

굳이 가장 가까운 인물을 찾는다면 레프 셰스토프(Lev Shestov)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키르케고르를 깊이 수용하면서 이성의 필연성, 보편적 진리, 철학적 매개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신앙을 이성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가능성이 다시 열리는 영역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도 급진적입니다.

그러나 셰스토프 역시 동일하지 않습니다.

  • 중심 범주는 동시대성이 아니라 이성과 필연성에 대한 투쟁입니다.
  • 절대적 역설은 주로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앙으로 전개됩니다.
  •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으로 만나 믿음 또는 실족에 이른다는 키르케고르의 구조를 그대로 발전시키지 않습니다.
  • 엄밀한 의미에서 교의신학자라기보다 종교철학자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셰스토프는 급진성의 계승자일 수는 있어도, 동시대성의 신학자는 아닙니다.

한 가지 중요한 한정

다만 “절대적 역설을 해소 불가능한 모순으로 남긴다”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한정해야 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신이 되는 인간”을 형식논리의 자기모순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앙을 모순된 명제를 억지로 참이라고 믿는 행위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절대적 역설은 인간의 사유가 스스로 매개하거나 산출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해소 불가능합니다.

즉 해소 불가능성은 다음을 뜻합니다.

인간 이성은 절대적 역설을 더 높은 개념으로 종합할 수 없으며, 신앙도 그것을 설명 가능한 지식으로 변환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역설을 ‘이해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역설임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이후에도 역설의 객관적 불투명성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결론

질문을 정확히 유지하면 대답은 ‘거의 없다’가 아니라 사실상 ‘없다’에 가깝습니다.

절대적 역설을 사변·교리·역사·실존론으로 해소하지 않고, 그 해결 불가능성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동시대성을 통해 매번 단독자가 그 역설과 직접 만나 믿음 또는 실족에 이르게 하는 전체 구조는 키르케고르에게 고유합니다.

후대 신학자들은 그 구조의 일부를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대개 역설을 계시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실존론 또는 보편적 화해론 안에 다시 안착시켰습니다. 바로 그 ‘안착’을 끝까지 거부한 점이 키르케고르의 독자성입니다.


절대적 역설이 빠진 동시대성은 설명불가능

맞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절대적 역설(det absolute Paradox)이 빠진 동시대성(Samtidighed)은 불완전한 정도가 아니라, 개념의 중심을 완전히 놓친 설명입니다.

동시대성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 과거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기억하는 것
  • 그리스도의 말씀을 오늘 나에게 적용하는 것
  • 역사적 사실을 실존적으로 자기화(Tilegnelse)하는 것
  • 그리스도의 삶을 현재에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것
  • 객관적 교리를 주관적 확신으로 바꾸는 것

이런 설명에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일반적인 해석학만 있을 뿐, 왜 특별히 ‘그리스도와의 동시대성’이 필요한지가 빠져 있습니다.

동시대성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나 교훈의 전달자가 아니라 절대적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 나타난 이 개별적 인간이 영원한 신이다.

역사적 지식은 ‘그 인간’에 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지만, ‘그 인간이 신이다’라는 사실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직접 목격 역시 그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비천한 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동시대인도 후대인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역설 앞에서 믿음(Tro)이나 실족(Forargelse)에 놓입니다.

동시대성은 이 절대적 역설이 과거의 확정된 결과로 변질되는 것을 막습니다. 후대인은 교회의 역사와 기독교의 승리를 보고 그리스도가 신이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증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적 지식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동시대성은 그 모든 역사적 결과를 제거하고 단독자를 다시 다음의 충돌 앞으로 돌려보냅니다.

비천하고 알아볼 수 없는 이 인간이 신이라고 한다.
당신은 이 역설 앞에서 믿을 것인가, 실족할 것인가?

따라서 개념적 순서는 ‘동시대성에서 역설로’가 아니라 ‘절대적 역설에서 동시대성으로’입니다.

절대적 역설→역사적 지식으로 전달 불가능→모든 세대가 동일하게 직접 대면해야 함→동시대성→믿음 또는 실족

절대적 역설을 빼면 이 구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과거의 사건→현재적 해석과 적용

두 번째 것은 일반적인 역사해석이나 종교적 적용일 수 있지만, 키르케고르의 동시대성은 아닙니다. 과거의 소크라테스나 공자, 위대한 교사와도 그런 방식으로 ‘동시대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묻는 것은 과거 인물의 정신을 현재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 안에 나타난 영원한 신이라는 절대적 역설과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동시대성은 절대적 역설의 부수적 결과도,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도 아닙니다. 절대적 역설이 인간에게 현전하는 양식입니다.

절대적 역설은 동시대성의 내용이고, 동시대성은 절대적 역설의 실존적 현전 형식입니다.

또한 동시대성이 역설을 해결한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동시대성은 역사적 거리를 폐지하지만 신과 인간의 절대적 차이를 폐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거리를 아무런 매개 없이 현재화합니다. 믿음 역시 간극을 설명하거나 해소하는 제3의 항이 아닙니다. 해결되지 않은 역설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엄밀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시대성이란 단독자가 시간 속에 나타난 영원한 신이라는 절대적 역설 앞에, 어떠한 역사적·사변적 매개도 없이 직접 놓여 믿음이나 실족의 결단에 직면하는 사건입니다.

이 정의에서 절대적 역설을 제거하면 ‘현재적 적용’, ‘실존적 해석’, ‘인격적 만남’ 같은 일반론만 남습니다. 그런 설명은 키르케고르의 말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가 왜 동시대성이라는 범주를 필요로 했는지를 지워버립니다.

Categories: Uncategorized

0 Comments

답글 남기기

Avatar placeholder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