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holdet mellem Eleater og Heraklit
이는 엘레아 학파(Eleater)와 그리스 철학자 Heraclitus 사이의 대립을 가리킨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약 540–480)는 운동(Bevægelse)과 변화(Forandring)를 강조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흔히“모든 것은 흐른다.”로 요약된다. 그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Forandres), 자신의 반대물로 되어 간다(bliver til sin egen Modsætning)고 보았다.
또한 그는 불(Ilden)을 만물의 근원적 요소(Urstoffet)로 이해하였다. 물(Vandet)과 땅(Jorden)은 불로부터 생성되며, 결국 다시 세계적 대화재(Verdensbrand) 속에서 소멸한다고 생각하였다.
해설
이 주석은 방금 본 『반복』의 가장 유명한 문장 가운데 하나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Gjentagelsen forklarer Forholdet mellem Eleater og Heraklit.”
“반복은 엘레아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주장이다.
엘레아 학파(Eleater)
대표적으로 Parmenides를 생각할 수 있다.
엘레아 학파는 말한다.
존재(Væren)는 존재한다.
무(Intet)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변화는 환상이다.
운동은 환상이다.
존재는 하나이며 영원하다.
즉, 존재 = 동일성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it)
반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모든 것은 흐른다.
모든 것은 변한다.
유명한 표현으로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가 있다. 즉, 존재 = 변화이다.
키르케고르의 문제의식
이 둘은 완전히 모순된다.
| 엘레아 학파 | 헤라클레이토스 |
|---|---|
| 존재 | 생성 |
| 동일성 | 변화 |
| 영원성 | 운동 |
| 정지 | 흐름 |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반복(Gjentagelsen)이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왜 반복인가?
그 이유는 『반복』의 정의 속에 있다. 조금 전 키르케고르는 말하였다.
“Det, der gjentages, har været.”
“반복되는 것은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엘레아적 요소이다. 즉 동일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곧바로 말한다.
“Det, at det har været, gjør Gjentagelsen til det Nye.”
“바로 그것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반복은 새로운 것이 된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적 요소이다. 즉 생성과 새로움이 등장한다.
따라서 반복은 동일하면서 새로운 것
반복(Gjentagelsen)은 동일한 것이면서 새로운 것이다. 아래 표를 참고하라.
| 엘레아적 측면 | 헤라클레이토스적 측면 |
|---|---|
| 같은 것 | 새로운 것 |
| 동일성 | 생성 |
| 존재 | 되어감 |
| har været | bliver til |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반복은 매개(Mediation)가 아니라 존재와 생성을 동시에 설명하는 범주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존재(Tilværelse) 연구와의 결정적 관련성
Tilværelse 연구에서는 이 주석이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이
“Tilværelsen, som har været til, bliver nu til.”
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사실상
- 엘레아 학파
- 헤라클레이토스
를 하나로 묶는다. 왜냐하면 har været til“이미 존재해 왔다”는 엘레아적 요소이며, bliver nu til“지금 생성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Tilværelse는
단순한 존재(Væren)도 아니고,
단순한 생성(Tilblivelse)도 아니다.
오히려 존재하면서 생성되고, 생성하면서 존재하는 운동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반복』에서 Gjentagelsen은 단순한 심리학적 “반복”이 아니라, 존재와 생성을 동시에 사유하기 위한 존재론적 범주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매개(Mediation) 대신 반복(Gjentagelsen)을 새로운 철학적 범주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특히 당신이 Tilværelse를 “존재(생성)” 혹은 “생존재”로 읽는 해석은, 바로 이 엘레아-헤라클레이토스 대립을 반복 안에서 통합하려는 키르케고르의 의도와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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