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30:87, Pap. XI1 A 269, n.d., 1854

의심스러운 것(Et Mistænkeligt)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성경(Den hellige Skrift)은 본래 자살(Selvmord)에 대해 어떤 명확한 금지도 담고 있지 않고, 중요한 성격 철학자(Charakteer-Philosopher)들 역시 그것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찬양하기까지 하며, 또 내가 알기로 어떤 이교 종교(hedensk Religion)도 그것을 금하지 않는데1—그런데 어째서 인간들 사이의 일상적인 거래와 생활(Handel og Vandel) 속에서는 끊임없이, 또 끊임없이 “자살은 비겁함(Feighed)이다”라고 말해지는 것일까?

나는 이것 역시 인간의 언어(msklig[e] Sprog)가 일종의 도둑들의 언어(Tyvesprog)2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곧,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사실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자살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바로 비겁함(Feighed)인데, 이것이 도둑들의 언어(Tyvesprog)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아마 여기에는 인간(Msket)이 어떤 작은 자기 회복(Opreisning)이라도 붙잡으려 한다는 점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것으로 용기(Mod)를 보여주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은 비겁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기 해설

키르케고르는 이 일기에서 단순히 자살(Selvmord)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사회의 언어(msklig Sprog)가 얼마나 자기기만적(self-deceptive)이며 이중적인지를 폭로하려 하고 있다. 핵심은 “비겁함(Feighed)”이라는 단어가 실제 의미와 반대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의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표면적 언어와 실제 동기의 분리
    사람들은 “자살은 비겁하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오히려 실제로는 “비겁하기 때문에 자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미지(未知)를 두려워하며, 존재의 단절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거꾸로 “나는 살아갈 용기가 있다”라는 식으로 미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언어를 “도둑들의 언어(Tyvesprog)”라고 부른다. 말은 도덕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보존적 심리와 허영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1. 인간의 자기 정당화(Opreisning) 비판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어떤 작은 자기 회복(Opreisning)이라도 붙잡으려 한다고 본다.
    즉 인간은 자신이 두려움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는 용감하게 삶을 견디고 있다”고 해석해 버린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자기해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비판한다.

이 점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절망(Fortvivlelse) 분석과도 연결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고, 늘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자신을 해석한다.

  1. 사회적 도덕 언어에 대한 의심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키르케고르가 사회적 도덕 담론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 성경은 자살을 명시적으로 금하지 않는다.
  • 고대 철학자들 가운데는 자살을 찬양한 이들도 있다.
  • 많은 종교들도 그것을 절대 금기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근대 시민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자살은 비겁하다”라는 말이 반복될까?

그는 이것을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심리적 언어 체계로 본다.
즉 사회는 살아남는 것을 미덕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그 배후에 공포와 자기보존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1. 그러나 이것이 자살 찬양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키르케고르가 여기서 자살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동기”를 해부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를 얼마나 쉽게 속이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기는 윤리학 자체보다도, 인간의 내면성과 자기기만에 대한 심리학적·실존적 분석에 가깝다.

특히 키르케고르 특유의 관심은 언제나 이것이다.

  • 인간은 자신에게 정직한가?
  • 인간은 자신이 실제로 무엇 때문에 행동하는지 아는가?
  • 인간은 도덕 언어 뒤에 숨어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이 일기는 훗날 니체(Nietzsche)나 프로이트(Freud)의 “도덕의 심리학”을 예고하는 듯한 측면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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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스토아학파(Stoikerne)의 자살(Selvmord).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 독이 담긴 작은 병(Fläschen mit Gift)이 놓여 있는 것처럼”: 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제1권, 제1서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첫 번째 고찰: 근거율(Satz des Grundes)에 종속된 표상 ― 경험과 학문의 객체」 §16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가리킨다. 그는 그곳에서 “고통받지 않으면서 살기를 원한다(leben zu wollen ohne zu leiden)”는 데 내포된 완전한 모순(vollkommene Widerspruch)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고 말한다.
    곧, “스토아 철학자(Stoiker)는 자신의 행복한 삶(glücksäligen Leben)에 대한 가르침 ― 왜냐하면 그것이 여전히 그의 윤리(Ethik)이기 때문이다 ― 속에 자살(Selbstmord)에 대한 권고를 끼워 넣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동양의 전제 군주(orientalischer Despoten)의 화려한 장식과 기물(prächtigen Schmuck und Geräth) 사이에 값비싼 독병(kostbares Fläschchen mit Gift)이 함께 놓여 있는 것과 같다. 즉, 육체의 고통(Leiden des Körpers)이 어떤 명제(Sätze)나 추론(Schlüsse)으로도 철학적으로 제거될 수 없고, 또 그것이 압도적이며 치유 불가능(unheilbar)할 경우에는,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행복(Glücksäligkeit)이 결국 좌절되며, 그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는 것은 오직 죽음(Tod)뿐이라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자살(Stoikernes Selvmord): 자살을 하나의 탈출구(Ausvej)로서 도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스토아주의(stoicismen)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스토아학파는 키프로스(Cypern)의 키티온(Kition) 출신 그리스 철학자 제논(Zenon, 기원전 약 333–261)에 의해 그리스에서 창설되었고, 이후 그리스 철학자 클레안테스(Kleanthes)와 크리시포스(Chrysippos)에 의해 계승되었다. 서기 1세기와 2세기에는 로마에서 세네카(Seneca), 에픽테토스(Epiktet),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등에 의해 이어졌는데, 이들 모두는 자살을 찬양한 바 있다. ↩︎
  2. Tyvesprog : 도둑들과 수감자들(indsatte)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비밀스럽게 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은어(隱語), 즉 서로만 알아듣는 암호적 언어(indforstået sprog). 곧 파벌적 언어(klikesprog), 전문 은어(jargon)를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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