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26:40, Pap. X4 A588
성령(Hellig-Aand)은 “위로자(Trøsteren, 보혜사)”이다―죽는 것(at afdøe)―거듭남(at gjenfødes)1
왜 성령(Hellig-Aand)은 “위로자(Trøsteren, 보혜사)”라고 불리는가?
아주 단순하다. 만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다는 표적(Kjendet),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표적이, 모든 일이 내게 잘되는 것(Alt lykkes mig)이라면, 나는 나를 위로할 어떤 영(Aand)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계 전체는 애초에 영(Aands)의 관계가 아니다.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Guds-Forholdet)의 표적이 고난(Lidelse)일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고난받아야 한다는 데서 표현될 때 — (“영(Aand)”으로 하나님2은 다른 방식으로는 그분의 사랑(Kjerlighed)을 표현하실 수 없다. 이것이 신약성서가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Christus)는 바울(Paulus)에게,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3 그러므로 고난(Lidelse)은 사랑(Kjerlighed)의 표현이며, 사랑받는 자(Den Elskede)라는 사실의 표현이다) — 그렇다면 우리를 위로할 하나의 “영(Aand)”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백에서] 덧붙여 말하면, “성령(Aanden)”은 또한 ‘본받음’과 관련하여 “위로자(Trøsteren, 보혜사)”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본받음(Efterfølgelsen)”은 결코 어떤 인간에게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어서, 그가 그것에 의지하여 안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at afdøe)”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한 인간에게 영(Aand)이 되는 사실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Smerte)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적이 곧 고난(Lidelse)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남(at gjenfødes)”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는 것(at afdøe)이라는 고통을 통하여 변화되어, 영(Aand)이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적이 고난(Lidelse)이라는 사실을 견디어 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으로 강화된 이기주의(Egoisme)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거기에 더하여 모든 일이 자기에게 잘되는 것(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이기주의(Frygtelige Egoisme)다. 이것과 가장 먼 거리는, 복된 기쁨(salig Glæde) 속에서, 승리하는 기쁨(seierrig Glæde)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적이 고난(Lidelse)이라는 사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주석
- Den Hellig-Aand er »Trøsteren« :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하신 고별 강화(Afskedstale), 곧 요한복음 13–17장에서 ‘성령(Hellig-Aand)’에 사용된 그리스어 표현은 ὁ παράκλητος(ho paráklētos)이다. 이 단어는 흔히 “대언자(Talsmanden)”로 번역되지만, 동시에 “보혜사”, “위로자(Trøsteren)”라는 의미로도 번역된다.
1819년 덴마크 신약성경(NT-1819)은 이를 “대언자(Talsmanden)”로 번역하였다. 반면 Martin Luther는 독일어 성경에서 “위로자(der Tröster)”로 번역하였고, 이 번역은 이후 《Huus- og Reyse-Bibel》에도 이어졌다.
이 번역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4장 25–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보혜사(Trøsteren)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Hellig Aand),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Trøsteren),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Sandheds Aand)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그리고 요한복음 16장 5–7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Trøsteren)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
키르케고르가 여기서 특별히 루터적 번역인 “보혜사/위로자(Trøsteren)”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성령(Hellig-Aand)은 단순히 진리를 설명하는 교사나 변호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지가 고난(Lidelse)이라는 사실을 견디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영이 아니다. 오히려 “죽어감(at afdøe)”과 “거듭남(at gjenfødes)”의 고통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견디도록 위로하는 영(Aand)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에게 “보혜사(Trøsteren)”라는 명칭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실존적 은혜의 사역을 뜻한다. ↩︎ - 이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나누신 대화(요 4:7–26)를 암시한다. 예수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Aand)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7–18절도 참조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키르케고르가 “하나님은 영(Aand)”이라고 말할 때 중요한 점은, 하나님과의 관계(Guds-Forholdet)가 단순히 외적 성공이나 세속적 행복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단순히 인간의 삶을 잘되게 만드는 존재라면, 그 관계는 아직 “영(Aands)의 관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Aand)”은 인간의 외적 상태보다 더 깊은 차원, 곧 존재(Tilværelsen)의 내면성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지가 외적 번영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변형(forvandles), 자기 부인, 그리고 고난(Lidelse)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요한복음 4장의 “영과 진리로 예배함”을 단순한 예배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가 영(Aand) 안에서 변화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죽어감(at afdøe)”과 “거듭남(at gjenfødes)” 역시 단순한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Aand)으로서 인간 안에 관계 맺으실 때 일어나는 실존적 변형이다. ↩︎ - 이는 사도행전 9장 10–19절의 이야기, 곧 아나니아(Ananias)와 아직 사울(Saulus)이라 불리던 바울(Paulus)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사울은 다메섹 밖에서 부르심(kaldelse)을 받은 후 눈먼 상태로 다메섹에 들어와 있었다.
예수께서는 환상 가운데 제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이 머무는 집으로 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두려워하며 주저하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내가 그에게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Lidelse)을 받아야 할 것을 보이리라.”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도 참조된다. 거기서 바울은 자신이 겪은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열거한다. 곧 옥에 갇힘, 매 맞음, 죽을 위험, 돌에 맞음, 파선, 굶주림, 추위, 수고 등을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신약(N. T.)에서 하나님의 사랑(Kjerlighed)은 단순히 “모든 일이 잘되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Den Elskede)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Lidelse)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울의 소명(kaldelse)은 단순한 사명 부여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부르심이다. 이 때문에 키르케고르는 “고난(Lidelse)은 사랑(Kjerlighed)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이 영(Aand)으로서 인간과 관계 맺으실 때, 그 관계의 표지는 외적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뒤따름(Efterfølgelsen) 속에서 겪는 실존적 고난이 된다.
그래서 성령(Hellig-Aand)은 “보혜사(Trøsteren)”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지가 고난일 때, 인간은 단지 설명이나 교리만이 아니라, 그 고난을 견디게 하는 위로(Trøst)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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