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10:136, Pap. XI A 217, n.d., 1849
기독교(Christend.)에 대한 오직 하나의 일관된(consequent) 이해(Opfattelse)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진리(Sandheden)를 위하여 맞아 죽는 것(ihjelslagen), 곧 순교자(Martyr)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좋다, 될 수 있으면 더 빨리!”(Huhei, jo før jo hellere) 같은 방식이 아니라, 섬기는 자(Tjenende)로서 가장 철저하게 관철된 반성(den meest gjennemførte Reflexion) 가운데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Χstd.)에 대한 이 유일하고 참되며 일관된 이해에 대응하는 왜곡(Misvisning)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곧, 순교(Martyriet)의 느린 준비 과정(langsomme Forarbeiden)을 견디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살(Selvmord)이다.
일기해설
이 일기 NB10:136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이해가 얼마나 급진적(radikal)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단편이다. 그는 여기서 “참된 기독교(Christend.)란 무엇인가?”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
핵심은 한 문장이다.
기독교에 대한 유일하게 일관된(consequent) 이해는 순교(Martyr)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키르케고르가 단순히 “죽음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순교의 느린 준비 과정(langsomme Forarbeiden)”을 강조한다. 즉, 그의 관심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실존(existence)의 구조에 있다.
1. “순교”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순교를 마지막 순간의 영웅적 죽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순교는 하나의 “삶의 형식(livsform)”이다. 그것은:
- 세상과 화해하지 않는 삶
- 진리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삶
- 점진적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삶
-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삶
이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위하여 맞아 죽는 것(ihjelslagen for Sandhedens Skyld)”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맞아 죽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되고, 오해받고, 깎여 나가고, 부서지는 실존을 가리킨다. 즉 순교는 단 한 번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삶 전체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2. “Huhei, jo før jo hellere” 비판
키르케고르는 즉각적인 영웅주의도 거부한다. 그는 “Huhei, jo før jo heller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대략 “좋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죽자!”같은 조급한 열광주의를 풍자하는 말이다. 즉 그는 감정적 열광이나 충동적 자기희생을 기독교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교는 “가장 철저하게 관철된 반성(den meest gjennemførte Reflexion)”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키르케고르 특유의 긴장이다.
- 기독교는 열정(Lidenskab)이지만,
- 동시에 반성(Reflexion)을 통과해야 한다.
즉 참된 순교는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깊은 내면적 결단(Afgørelse)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지는 것이다.
3. 자살(Selvmord)은 순교의 왜곡(Misvisning)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나온다. 키르케고르는 자살을 단순한 죄론적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순교의 느린 준비 과정을 견디지 못해서 발생하는 왜곡(Misvisning)”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즉 그는 자살을 단순한 비도덕성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배후에 있는 실존적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 그에게 인간은 본래 순교적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교적 실존은:
- 자기부인
- 기다림
- 세상과의 충돌
- 점진적인 고난
- 느린 죽음
의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느림(langsomme)”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끝내 버리려 한다. 즉 자살은 단순히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시간성”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이해된다.
4. 왜 “느린 준비 과정”인가?
이 표현은 키르케고르 실존론 전체와 연결된다. 그에게 신앙은 즉각적인 완성이 아니다.
- 존재(Tilværelse)는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 반복(Gjentagelse) 속에서 생성된다.
- 고난 속에서 정화된다.
- 기다림 속에서 성숙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은 본질적으로 “느린 과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싫어한다.
인간은:
- 즉각적인 해결
- 빠른 구원
- 즉시 끝나는 결말
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자살을 “순교의 조급한 왜곡”처럼 이해한다.
5. 현대적 의미
오늘날 이 일기는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다. 현대 사회는 “견딤”을 거의 잃어버렸다.
- 즉각적인 만족
- 빠른 성공
- 빠른 치유
- 빠른 결과
를 요구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실존이란 본질적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병적인 자기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 자기중심성의 죽음
- 세속적 인정 욕망의 죽음
- 자아 숭배의 죽음
을 의미한다. 그래서 순교(Martyr)는 단순히 피 흘려 죽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긴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느린 내면적 죽음을 견디지 못할 때, 인간은 왜곡된 방식으로 “끝내기”를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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