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30:107, Pap. XI1 A 292, n.d., 1854
자살(Selvmordet)
바로 기독교적으로(christeligt) 이 존재(Tilværelse, 삶)가 형벌의 고난(Strafs-Lidelse)이기 때문이며, 또 기독교가 마지막 고난, 곧 죽음(Døden)을 견디어 낸 이후에는 복된(salig), 영원히 복된(evig salig) 존재(Tilværelse)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selvraadigt) 이 존재(Tilværelse)에서 벗어나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mishager Gud) 하는 것이다.
이 존재(Tilværelse)는 큰 선(Gode, great good)이기 때문에, 따라서 자살(Selvmord)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곧 그것이 감사하지 않음(Utaknemlighed)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당연히 거짓말(Løgn)이며 허튼소리(Sludder)이고, 서로를 격려하여 이 세상이 참으로 좋은 세계(rar Verden)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 형벌 기관(Straffe-Anstalten)1이 만들어낸 사기(Gavtyvestreger)2일 뿐이다.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 존재(Tilværelse)가 고난(Lidelse)이기 때문이며, 또 사람이 인내하며(taalmodigt) 견디어 낸다면 영원한 복락(evig Salighed)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살(Selvmord)은 섭리(Styrelsen)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이브(Jule-Aften)에 어두운 방(mørke Værelse)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다. 바로 부모가 기쁨(Glæden)을 크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했는지 알고 있으며, 또 시간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조급함(Utaalmodighed)은 부모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기 해설
키르케고르의 NB30:107은 자살(Selvmord)에 대한 단순한 윤리적 금지나 교리적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왜 기독교가 자살을 반대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시 통상적인 기독교적 설명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삶은 하나님의 큰 선물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그 선물에 대한 배은망덕(Utaknemlighed)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런 설명을 “거짓말(Løgn)”, “허튼소리(Sludder)”, 심지어 “사기(Gavtyvestreeg)”라고까지 부른다. 왜냐하면 이런 설명은 마치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즐겁고 행복한 곳인 것처럼 꾸며내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정반대로 말한다.
기독교적으로 이 현존(Tilværelse, 존재)은 본질적으로 고난(Lidelse)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키르케고르가 삶을 단순히 비관주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인간의 현존이 “형벌의 고난(Strafs-Lidelse)”의 구조 안에 있다고 본다. 즉, 인간은 타락 이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실존 자체는 고통과 인내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쇼펜하우어나 스토아주의와 부분적으로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이 본질이라면 죽음을 통해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반면 키르케고르는 바로 그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taalmodigt holder ud)” 속에 영원한 복락(evig Salighed)의 약속이 있다고 본다.
즉, 기독교는 “삶이 즐겁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 삶은 고난이다.
- 그러나 그 고난은 헛되지 않다.
- 마지막 고난인 죽음까지 견디어 낼 때 영원한 기쁨이 기다린다.
따라서 자살은 단순한 자기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한 시간과 과정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자살은 섭리(Styrelsen)에 반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섭리(Styrelsen)”는 단순한 운명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이끌어 가시는 통치와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자기 삶의 절대적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키르케고르는 매우 아름다운 비유를 사용한다.
크리스마스이브(Jule-Aften)에 어두운 방에서 기다리는 아이들.
아이들은 왜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 지금은 어둡고 답답하며 지루하다. 그러나 부모는 이미 큰 기쁨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급함(Utaalmodighed)은 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 현재의 어둠
- 기다림
- 아직 보이지 않는 기쁨
- 인내
이다.
즉, 키르케고르에게 현존(Tilværelse, 존재)은 단순히 “좋은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기다림의 장소다.
이것은 그의 실존론 전체와 깊이 연결된다.
인간은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견디며, 반복(Gjentagelse) 속에서 형성되며,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존재다.
그래서 이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매우 역설적인 말을 한다.
삶이 행복하기 때문에 자살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고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난 뒤에 영원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자살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그는 당시 시민적 기독교가 말하던 낙관주의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절망과 허무주의 역시 거부한다.
그는 고난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난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그 의미는 “기다림” 속에서 드러난다.
구독하시면 더 많른 정보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각주
- Straffe-Anstalten : 국가가 운영하는 형벌 기관(det statslige fængsel), 곧 보다 엄격하고 장기적인 자유형(frihedsstraffe)을 집행하는 감옥 또는 교정 시설을 뜻한다. ↩︎
- Gavtyvestreeg : 사기꾼(gavtyv) 같은 행위, 곧 기만적(bedragerisk)이며, 동시에 교활하고(lumsk) 약삭빠른(snedig) 행동을 뜻한다. 즉, 사람을 속이면서도 은근히 영악하게 꾸며낸 술수나 속임수를 의미한다. ↩︎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