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나님을 죽이는가?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 반드시 하나님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의 도덕성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인간은 하나님을 죽인다.
이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까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말하는 것은 단순한 무신론이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힌 것이다.(《반항하는 인간》, 절대적 긍정에서…)
즉 하나님이 재판관이 아니라 인간이 재판관이 됩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법정에 세운 자
그런데 놀랍게도 욥기의 친구들이 바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변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행동하셔야 한다.”라는 자신들의 도덕적 체계를 하나님 위에 올려놓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오자 그들은 예수를 죽입니다.
왜일까요?
죄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의롭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기의 의가 너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 강도
- 창기
- 세리
가 아니라
- 대제사장
- 서기관
- 바리새인
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종교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들, 도덕적으로 가장 높은 사람들, 신학적으로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평생 공격합니다. 특히 《기독교 훈련》과 후기 저작들에서 말입니다.
그는 크리스텐덤(Christenheden)을 비판하면서 사실상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죄인이 아니다.
자신이 이미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죄인은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의인은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여기서 저의 욥기 해석이 연결됩니다.
욥은 악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악함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의로움까지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에마스는“나는 죄인이다”보다 더 급진적입니다. 오히려“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를 거부한다.”에 가깝습니다.
저는 오늘날 이 부분을 더욱 심각하게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세리보다 바리새인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술 마시지 않는다.”
“나는 십일조 한다.”
“나는 교회 봉사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가장 악한 사람이 아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기의 선함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지난주 설교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결국 자기 의를 붙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공로의 반대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가장 강렬하게 표현하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죄인들이 아니었다. 자기 의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죽이는 것은 악함이 아니다. 하나님 없이도 의로울 수 있다고 믿는 자기 의이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욥기 42장의 에마스를 매우 강하게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욥이 철회한 것은 단순한 발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 의를 붙들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철회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이 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십자가 위 강도, 그리고 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는 자 안에서 보존된다”는 명제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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