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변성(Guds Uforanderlighed)1

한 편의 강화(En Tale)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하나님의 불변성 표지

나의 고인이 된 아버지(min afdøde Fader)

미하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

이 도시에 살던 이전의 양말·직물 상인(forhen Hosekræmmer her i Byen)을

기억하며 이 책을 바칩니다.

1855년 8월 (I Aug. 1855)2


325

서문 (Forord)

이 강화(Tale)는 1851년 5월 18일에 시타델 교회(Citadellets Kirke)에서 행해졌다.3 이 본문은 내가 처음으로 사용했던 본문이다.4 그 이후에도 이 본문은 여러 차례 다시 끌어내어 사용되었다.5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그 본문으로 돌아간다.

1854년 5월 5일

S. K.


327

기도(Bøn)

변치 않으시는 주여(Du Uforanderlige),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6

사랑 안에서 변치 않으시는 주여(i Kjerlighed Uforanderlige),
참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님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참된 복(vort eget Vel)을 원하며,
주님의 불변하심(Din Uforanderlighed) 안에서
교육받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무조건적인 순종(ubetinget Lydighed) 가운데서
참된 안식(Hvilen, rest)을 발견하고
주님의 불변하심(Din Uforanderlighed) 안에서
안식하게 하소서.

주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어떤 불변성을 지키려면
자기를 지나치게 흔들 수 있는 것을
많이 갖지 말아야 하고,
또한 너무 많이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에 의해 움직이십니다(Alt bevæger Dig),
그것도 무한한 사랑(uendelig Kjerlighed) 안에서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기에
대수롭지 않다고 여겨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들,
예를 들어 참새의 필요(Spurvens Trang)조차7
주님을 움직이게 합니다.

또 우리가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인간의 탄식(et menneskeligt Suk)조차
주님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Intet forandrer Dig),
변치 않으시는 주여(Du Uforanderlige)!

오, 무한한 사랑 안에서
모든 것에 의해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우리의 기도 (denne vor Bøn)에도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이 기도를 복되게 하셔서(velsigne den)
기도가 주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den Bedende)이
주님의 변치 않는 뜻(Din uforanderlige Villie)에
일치하도록 변화되게 하여 주소서.
변치 않으시는 주여(Du Uforanderlige)!


[약1:17-21]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328

인간의 변덕과 하나님의 불변하심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방금 전에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과 정 반대 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즉, 시간적인 것, 세상적인 것의 변화, 인간의 변화 말입니다! 얼마나 우울하고, 얼마나 지치는지요. 모든 것이 부패할 수밖에 없으며,8 인간은 변한다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성도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변화가 더 나빠진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얼마나 불쌍한 인간의 위로입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위로입니다. 변하는 것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는 것, 즉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특히 이런 우울한 정신으로, 따라서 부패와 “인간의 변덕(den menneskelige Ustadighed)”9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본문을 붙잡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고 실제로 바꾸게 될 것입니다. 이 본문은 정 반대에 대하여, 즉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순수한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침묵이 살아있는 산봉우리에서처럼, 사도(Apostelens)10의 말씀은 이 땅에서 모든 삶의 변화하는 것 위에 들어 올려집니다.

그는 다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 어떤 변화도, 심지어 그림자도 없는 곳에 계시는 “빛들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빛들”의 아버지, 또는 빛의 아버지로서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진정으로 선하고 완전한지 확인하는 방법을 영원히 알고 계시는 이 아버지로부터, 위로부터 내려오는 “선하고 완전한 선물”에 대해, 그리고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 아버지로서 변함없이 선하고 완전한 선물을 보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듣기를 속히 하십시오.” 즉 빠르고 느슨한 말을 듣지 말고 위로부터 오는 말을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좋은 소식은 위로부터만 오기 때문입니다. “말하기를 더디 하십시오.” 우리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이야기, 특히 지금 여기에 대해 그리고 모든 급한 이야기는 종종 선하고 완전한 선물을 덜 선하고 완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십시오.” 이 선물이 선하고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화를 내고 결국 우리 자신의 죄책감으로 인해 선하고 완전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의도 된 것을 부패하게 만들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분노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성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329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십시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꾸미고 단장하여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이 선하고 완전한 선물을 합당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당신의 영혼을 축복할 수 있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온유함으로! 참으로 말하고 있는 자가 사도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 하고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명령을 신속히 따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건 이상한 대화 방식이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만을 원하시는 그분과 관련하여, 우리는 온유하라고 훈계를 받을 필요가 있을 만큼 어리석은 자들일까요? 이런 식으로 “온유(meekness)”라는 말은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를 부당하게 때린다면 그리고 한 방관자가 훈계하듯 말했습니다: 온유하게 참아라, 이것은 직설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친근한 존재인 사랑 그 자체를 상상해보십시오. 그분이 나를 위해 선물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물은 사랑처럼 선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오셔서 이 선물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때 방관자가 나에게 훈계하며 말합니다.

“이제 당신이 이것을 온유하게 참는 것을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방인이며, 그저 한 인간이었던 저 단순한 현자11는 종종 경험한 것을 한탄했습니다. 즉, 그가 더 나은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다시 말해, 그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누군가에게서 이런 저런 어리석음을 빼앗으려 할 때, 이 사람들이 격분한 나머지 단순한 사람이 농담 같은 진지함으로 말했듯이, 그들이 이 현자를 물어뜯고 싶어 했다는 것이지요.12

아아, 이 6000년13 동안 하나님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경험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선한 일을 하려 하실 때, 가장 화를 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선을 알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선을 원한다면, 이 문제에서 온유함에 대한 훈계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인간은 여전히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것은 선하고 완전한 것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온유에 대한 훈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 정도까지 사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그분에게서만 선하고 완전한 선물이 내려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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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다른 관점입니까! (이교에서 실제로 명백한 것처럼) 단순히 인간의 관점은 하나님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만, 인간적인 일들이 얼마나 변화가 많은지 슬프게 말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합니다.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에 대한 생각은 유일하게 순수한 위로요, 평화요,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영원히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을 잊지 맙시다. 즉, 사도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도가 사도이기 때문이며, 사도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여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 길의 시작에 서 있지 않고 오히려 그 길의 끝에 서 있었습니다. 힘들지만 좋은 길14에 서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는 그 길을 선택했고, 선택한 그 길을 변함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따라갔습니다.15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영원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초보자에 불과한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하나님의 변함없으심(Uforanderlighed)을 볼 수 있는 다른 면이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잊으면 사도의 찬양을 자칫 잘못 받아들일 위험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전능과 불변성

그러니 가능하면 공포와 확신을 주기 위해 주님에 대해, 변함없으신 주님에 대해, 또는 주님의 변함없으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Almægtig)께서는 이 보이는 세계(den synlige Verden)를 창조하셨으나16 스스로는 보이지 않게 되셨습니다.17 그분은 이 보이는 세계를 마치 옷(Klædning)처럼 입으셨습니다.18 그리고 사람이 옷을 갈아입듯이 그 세계를 바꾸십니다. 그러나 그분 자신은 변하지 않으십니다.19 이것은 감각적 세계(den sandselige Verden)20에서 그러합니다. 또한 사건들의 세계(Begivenhedernes Verden)에서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순간(ethvert Øieblik)에 어디에나 임재하십니다(allestedsnærværende, 하나님의 편재).

인간의 가장 깨어 있는 정의(den aarvaagneste menneskelige Retfærdighed)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말해질 때보다도, 더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어떤 죽을 인간(Dødelig)도 그분을 본 적이 없지만, 그분은 모든 곳에 임재하시며(allestedsnærværende, 편재) 어디에나 계십니다.21 그분은 가장 작은 것에도, 또 가장 큰 것에도 함께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엄밀하게 말하면 사건이라 부르기 어려운 것에도, 그리고 참으로 유일한 사건(den eneste Begivenhed)에도 함께하십니다. 곧 참새 한 마리가 죽을 때(naar en Spurv døer)에도, 인류의 구주 (Menneske-Slægtens Frelser)께서 태어나실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22

그분은 매 순간 모든 현실적인 것(alt Virkeligt)을 가능성(Mulighed)으로서23 자신의 전능하신 손(sin almægtige Haand)24 안에 붙들고 계십니다. 그분은 매 순간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한 순간(i et Nu)에 모든 것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 인간의 생각(Meninger)을 바꾸시고
  • 인간의 판단(Domme)을 바꾸시며
  • 인간의 높음(Høihed)과
  • 인간의 비천함(Ringhed)까지도 바꾸십니다.25

그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그분 자신은 변하지 않으십니다(selv uforandret).

(331)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tilsyneladende Uforandrethed)에도— 사실 외적인 것이 일정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며, 그것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뒤집히는 가운데에서도(Alts Omveltning)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계십니다. 어떠한 변화(Omskiftelse)도 그분을 건드리지 못하며, 심지어 변화의 그림자(Skyggen af Omskiftelsen)조차 그분에게 닿지 못합니다. 그분은 변함없는 밝음(uforandret Klarhed) 가운데 계십니다. 빛들의 아버지 (Lysenes Fader)이시며, 영원히 불변하십니다 . 바로 이 변함없는 밝음(uforandret Klarhed)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불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밝음(idel Klarhed, 순전한 밝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밝음에는 어떠한 어둠(Dunkelhed)도 들어 있지 않으며, 어떠한 어둠도 그 밝음에 가까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Mennesker)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밝음(Klarhed)이 아니기 때문에 변하는 존재 (foranderlige)입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은 때로 더 밝아지고, 어떤 것은 때로 어두워집니다(fordunkles). 그래서 우리는 변합니다(forandres). 또 때로는 우리 밖의 세계가 변하고, 그 변화의 그림자(Omskiftelsens Skygge)가 우리 위를 지나가며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또 때로는 외부 세계(Omverdenen)로부터 어떤 새로운 빛(Belysning)이 우리 위에 비추어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 안에서도 변화합니다(forandres i os selv).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두려운 일

이 생각(Tanke)은 참으로 두려운 것(forfærdende)이며, 오직 두려움과 떨림(Frygt og Bæven)26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마도 이 점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간들의 변화(Menneskenes Foranderlighed)와 이 세상의 모든 시간적인 것(alt det Timelige)의 변화를 두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uforanderlig) — 이것이 위로(Trøsten)라고, 오직 위로라고, 심지어 경박함 (Letsindighed)조차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변하지 않으십니다(uforanderlig).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묻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이해 속에(i Forstaaelse med Gud) 있습니까? 당신은 이것을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며(betænker alvorligt), 진실로 이해하려고 애쓰고(stræber at forstaae) 있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과 모든 인간에게 가지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뜻(Guds evig uforanderlige Villie)입니다. 곧 인간이 그것을 추구하도록(stræbe derefter)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곧 하나님의 뜻(Guds Villie)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며(lever saadan hen), 이런 생각이 당신에게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원히 변하지 않으신다(den evig Uforanderlige)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Forfærdeligt)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이르든 늦든(tidligt eller sildigt), 반드시 이 변하지 않는 뜻(uforanderlige Villie)과 충돌하게 될 것(støde sammen)이기 때문입니다. 이 변하지 않는 뜻(uforanderlige Villie)은 당신이 이것을 깊이 생각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선(Dit Vel)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다른 방식으로 그것과 충돌한다면(støder sammen), 그 변하지 않는 뜻(uforanderlige Villie)은 당신을 산산이 부수고 말 것(knuse Dig)입니다.

또한 묻겠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이해 속에(i Forstaaelse med Gud)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하나님과 좋은 이해 속에(god Forstaaelse) 있습니까? 당신의 의지(Villie)는 정말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ubetinget) 하나님의 의지 (Guds Villie, 하나님의 뜻)입니까? 당신의 소망들(Ønsker), 당신의 모든 소망(hvert Ønske)이 그의 명령(Bud)입니까? 당신의 생각들(Tanker), 처음 생각과 마지막 생각이 그의 생각(Guds Tanker)입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uforanderlig)는 사실은 참으로 얼마나 두려운 일(forfærdeligt)입니까! 그는 영원히,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인간 (et Menneske)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것(at være ueens)만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당신이 더 강한 자(den Stærkere)라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래도 그는 결국 변하겠지(han forandrer sig nok).”

그러나 만일 그가 더 강한 자(den Stærkere)라면 어떻겠습니까? 혹시 당신은 더 오래 버틸 수 있다(holde længere ud)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한 시대 전체(en heel Samtid)라면 어떻겠습니까? 혹시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70년쯤이야 영원(Evighed)도 아니지.”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den evig Uforanderlige)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면 (ueens med ham) —그것은 바로 영원(Evighed)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forfærdeligt)입니다.

332

한 나그네(Vandringsmand)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의 거대한 산(uhyre Bjerg)의 기슭에 멈추어 서 있습니다. 그 산은 넘을 수 없는 산(uoverstigeligt Bjerg)입니다. 그는 그것을 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아니, 그는 넘어야 하는 것 (skal)이 아니라, 넘어가기를 원합니다(vil). 왜냐하면 그의 소망들(Ønsker), 그의 갈망들(Længsler), 그의 욕망들(Begjeringer), 그의 영혼(Sjel)—이것들은 더 가벼운 이동 수단(en lettere Art Befordring)을 가지고 있어서—이미 산의 저편 (den anden Side)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족한 것은 단지 그가 그 뒤를 따라가는 것(følger efter)뿐입니다.

이제 그가 70년을 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산(Bjerget)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uforandret), 넘을 수 없는 채(uoverstigeligt) 서 있습니다. 그가 다시 한 번 70년을 더 산다고 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산(Bjerget)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uforandret), 넘을 수 없는 채(uoverstigeligt) 그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모든 동안에 아마도 그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forandres). 그는 자신의 갈망들(Længsler)과 소망들(Ønsker)과 욕망들(Begjeringer)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을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kjender neppe sig selv)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후대의 다음 세대(en senere Slægt)가 와서 그를 보게 됩니다. 그는 변해버린 사람(den Forandrede)이 되어, 그 산 (Bjerget)의 기슭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산(Bjerget)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uforandret), 넘을 수 없는 채(uoverstigeligt) 서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 1000년이 지났다고 해 보십시오. 그 변해버린 사람(den Forandrede)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이제 단지 하나의 전설(et Sagn)뿐입니다. 그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산(Bjerget)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uforandret), 넘을 수 없는 채(uoverstigeligt) 서 있습니다.

이제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den evig Uforanderlige)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에게는 1000년이 하루(en Dag)와 같습니다.27 아, 그러나 이것조차도 지나친 표현입니다. 그분에게 1000년은 단지 순간(et Nu)과 같습니다. 아니, 사실상 그것은 그분에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som vare de ikke)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아주 조금이라도(end i fjerneste Maade),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기를 원하시는 길(den Vei han vil Du skal)과 다른 길 (en anden Vei)로 가려고 한다면—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 (frygteligt)입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Sandt nok). 당신의 의지(Din Villie)든, 나의 의지(min Villie)든, 혹은 이 수천, 수만 사람들의 의지(disse Tusinders og Tusinders Villie)든,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뜻)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 밖의 이른바 현실 세계(den saakaldte virkelige Verden)의 분주함(Travlhed) 속에서는, 그저 될 수 있는 대로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아무것으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ikke lader sig mærke med Noget). 오히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의 의인(en Retfærdig)이 있다면28—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그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곧 성경이 말하듯 악 가운데 놓여 있는(en Verden, der ligger i det Onde) 이 세상을 바라볼 때,29 그는 하나님께서 아무것으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사실 때문에 낙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하나님께서 아무것으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이 사실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는 것(evig uforanderlig)보다 덜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33

저로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말씀해 보십시오. 무엇이 더 두려운 일입니까? 하나는 이것입니다. 무한히 강하신 분(den uendelig Stærkere)께서, 조롱을 당하는 것에 지치셔서, 자신의 권능 가운데 일어나(reiser sig i sin Magt) 거역하는 자들(de Gjenstridige)을 부수어 버리시는 것(knuser).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며, 하나님께서 조롱을 받지 않으신다(Gud ikke lader sig spotte)고 말할 때,30 그리고 그분의 심판이 세대를 멸망시키는 방식으로 임했던 때(Tider, hvor hans Straffedomme tilintetgjørende gik over Slægten)를 언급할 때,31 바로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가장 두려운 일입니까?

오히려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곧, 무한히 강하신 분(den uendelig Stærke)께서—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아무 변화도 없이(ganske stille),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næsten som var han ikke til) 그저 앉아 계시며,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이(uden en Mines Forandring) 바라보고 계시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도, 의인(en Retfærdig)이라면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짓(Usandhed)이 번성하고, 힘과 권세를 얻으며(Fremgang, Magt), 폭력과 불의(Vold og Uret)가 승리하고(seirer), 심지어는 더 나은 사람조차도,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같은 수단을 조금이라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유혹(friste)에 빠지게 될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그분이 조롱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spottedes han). 곧 그 무한히 강하신 분,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e)께서—그러나 결코 조롱당하지도 않으시고(lader sig ikke spotte), 변화되지도 않으시는—그분께서 말입니다. 과연 이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왜 그분이 그렇게 고요하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그분께서 스스로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영원히 확실하지 않다면—자신이 변치 않는 존재(Uforanderlige)라는 확신이 없다면—그는 그렇게 고요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능 가운데 일어나(reiste sig i sin Magt)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만이 그렇게 고요히 앉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시간을 주십니다(Tid).32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Evigheden)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변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시간을 주십니다—신중하게(with velberaad Hu). 그리고 마침내 영원의 결산(Evighedens Regnskab)33이 도래합니다. 그때에는 아무것도 잊히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부당한 말(utilbørlige Ord)조차도 잊히지 않습니다.34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evig uforanderlig).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긍휼(Barmhjertighed)일 수도 있습니다. 곧, 회개(Omvendelse)와 개선(Forbedring)을 위한 시간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시간이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때에는 우리 안의 어리석음(Daarlighed)과 경솔함(Letsindighed)이 오히려 이렇게 바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즉시 벌을 내리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지금처럼 시간을 주시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계시면서도, 여전히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것보다 말입니다.

교육자(Opdrager)에게 물어보십시오—사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두 어느 정도는 어린아이들(Børn)이 아닙니까!—혹은 길을 잃었던 사람들과 관계해 본 이에게 물어보십시오—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번은 길을 잃었던 사람(vildfarende)이었지 않습니까, 더 길게든 짧게든, 더 자주든 드물게든—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경솔함(Letsindighed)을 막기 위해서는, 또는 적어도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벌의 고통(Straffens Lidelse)이 가능하다면 바로 그 순간에 따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경솔한 사람의 기억(Hukommelse)이 죄책(Skylden)과 동시에 벌을 기억하도록 훈련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마치 두 발 장전된 총(dobbeltløbet Skydevaaben)35처럼, 하나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금지된 쾌락(forbudne Lystelige)을 취하거나36 잘못을 저지르는 바로 그 순간에 벌이 뒤따른다면—저는 경솔함이 스스로를 매우 조심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Skylden)와 벌(Straffen) 사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그 일의 진지함(Sagens Alvor)을 나타내는 척도(Maalestokken)입니다)—경솔함은 더욱 유혹을 받게 됩니다.

334

아마도 모든 것이 잊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정의(Retfærdigheden) 자체가 바뀌어, 그때에는 전혀 다른 기준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적어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일을 그대로 다시 드러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경솔함은 변합니다—그러나 더 나은 방향으로가 아닙니다. 경솔함은 점점 더 안심하게 됩니다(tryg). 그리고 안심하게 되면, 더욱 대담해집니다. 그래서 해가 지나고 또 지나도—형벌은 오지 않고(Straffen udebliver), 망각(Glemsel)이 들어옵니다. 다시 형벌은 오는 데 실패하지만 새로운 범죄(Forvildelse)는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의 범죄는 더 악화됩니다.

결국 끝이 옵니다. 죽음(Døden)이 모든 것을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그저 경솔함이었을 뿐이라고 여겨졌던 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대해 한 분의 증인이 계셨습니다. 곧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en evig Uforanderlig). 그렇다면 이것도 단지 경솔함이었습니까?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 앞에서, 당신은 그분과 함께 결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Timelighed)의 시계가 70년을 가리키고,37 그 사람이 죽는 순간에도—영원(Evighed)의 시계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neppe flyttet sig en Kjende). 그만큼 모든 것은 영원에게, 그리고 그 변치 않으시는 분(Uforanderlige)에게는 현재로서 존재합니다(nærværende).


그러므로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제가 제 자신에게 말하듯이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Gud) 앞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det Betydelige)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사소한 것(det Ubetydelige)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의미에서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는 사소할 수 있으며, 다른 의미에서는 가장 사소한 것조차도 하나님께는 무한히 중요한 것(uendelig Betydeligt)이 됩니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의 의지(Villie)가 하나님의 의지(하나님의 뜻)와 일치하지 않는다면(i Overeensstemmelse med hans), 이 점을 깊이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함(Mildhed)으로든, 엄격함(Strenghed)으로든 당신을 가르쳐 당신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와 일치시키신다면, 그분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ikke lader sig mærke med Noget)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한 인간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han er ikke til), 혹은 변하셨거나, 또는 우리가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시기에는 너무 크신 분이라고 거의 대담하게 주장하게 되는 데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시며(han er til),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이시고, 그분의 무한한 위대함(uendelige Storhed)이란 바로 가장 작은 것까지도 보시고, 가장 작은 것까지도 기억하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분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변함없이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사실(husker det uforandret en Evighed)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같은 경솔하고 변덕스러운 인간(letsindige og ustadige Mennesker)에게는, 하나님의 불변성(Guds Uforanderlighed)에 대한 이 생각 속에 오직 두려움과 떨림(Frygt og Bæven)만이 있습니다. 아,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시든지 간에(lader sig mærke med Noget eller ikke), 그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이십니다.

그분이 영원히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어떤 ‘미해결된 일’(noget Udstaaende med ham)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당신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했을 수도 있고, 거룩한 맹세(helligt Løfte)로 자신을 결단하여 묶었을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변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덜 생각하게 되었고(혹시 나이가 들면서 더 중요한 일들이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335) 혹은 하나님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당신 삶의 사소한 것들(Dit Livs Ubetydeligheder)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고, 그런 믿음은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당신은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약속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고, 마침내는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곧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e)은 아무것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 사소하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나이가 들며 거꾸로 나타나는 유치함(Aarenes bagvendte Barnagtighed)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e)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Forholdet mellem Menneske og Menneske)에서는 흔히 변덕스러움(Foranderlighed)에 대해 서로 불평합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변해버렸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때로는 한 사람의 변하지 않음(Uforandrethed)이 오히려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다소 유치하지만 용서받을 수 있는 말(barnagtig, tilgivelig Tale)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일이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고 허영된 마음(det daarlige, forfængelige Hjerte)이 유혹을 받아, 자신의 열정(Begeistring), 감정의 지속성(Følelses Varighed),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의지(Villen)에 대해 거창하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조용히 들었습니다. 그는 미소 짓지도 않았고, 그 말을 막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가 말하도록 두었고, 들었으며, 침묵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요구받은 대로 그 말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말했던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놀랍게도 그는 단지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 사람이 어떤 감정의 순간(Stemningens Øieblik)에 말하고는 마치 흘려보내듯 내던졌던 그 생각들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성실한 노력(redelig Stræben) 속에서, 그 말에 따라 자신의 삶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아, 그의 기억의 변하지 않음(Hukommelses Uforandrethed)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그는 그 순간에 말해졌던 것을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den evig Uforanderlige)과 이 인간의 마음(det menneskelige Hjerte)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 이 인간의 마음이여, 당신은 당신의 신비로운 내면의 방(hemmelighedsfulde Indelukke)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감추고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이것은 최악의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당사자 자신에게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확실히, 인간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기만 하면, 이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무덤(Gravsted)과도 같아집니다. 그곳에는 잊혀짐 속에 묻혀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곧 약속들(Løfter), 결심들(Forsætter), 결단들(Beslutninger), 온갖 계획들과 그 계획의 파편들, 그리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들이 그 안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만이 아신다(Gud veed hvad)”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반쯤은 경솔하게(letsindigt), 반쯤은 삶에 지쳐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두렵도록 진실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가장 작은 것까지도 아십니다. 당신이 이미 잊어버린 것, 당신의 기억(Hukommelse) 속에서 변해버린 것, 그것을 하나님은 변함없이 아십니다.

336

그분은 그것을 마치 오래전의 일처럼 ‘기억하시는(상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일처럼 그대로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그 모든 소원(Ønsker), 결심들, 결단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 말해졌는지까지도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evig uforanderlig)이시며,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른 사람의 기억조차도 한 인간에게는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결코 완전히 신뢰할 만하지도 않고, 또 어쨌든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 사람과 그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분(Alvidende)38의 기억, 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억으로부터는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특히 영원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아니,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영원히 현재적이며(evigt nærværende), 언제나 동일하게 현재적입니다(evigt lige nærværende). 아침과 저녁, 젊음과 늙음, 망각과 변명과 같은 어떤 변화의 그림자도 그분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분에게는 어떠한 그림자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우리가 그림자(Skygger)라면,39 그분은 자신의 영원한 불변성 속에서 영원한 빛(evig Klarhed, eternal clarity)이십니다. 우리가 흘러가는 그림자라면, 내 영혼이여(min Sjel), 깊이 주의하십시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은 영원(Evigheden)을 향해,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한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지 결산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40 그분 자신이 바로 그 결산(Regnskabet)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언젠가 결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때까지는 긴 시간이 남아 있고, 또 수많은 복잡한 것들을 정리해야 비로소 결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여, 그것은 매 순간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빛(uforanderlige Klarhed, 변하지 않는 명확성) 자체가 바로 결산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산은 가장 작은 것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져 있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den evig Uforanderlige)에 의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잊어버린 어떤 것도 잊지 않으시며, 또한 내가 하듯이 어떤 것도 다르게 기억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것이 실제로 그러했던 그대로 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불변성(Guds Uforanderlighed)에 대한 이 생각 속에는 오직 두려움과 떨림(Frygt og Bæven)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한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것처럼 느껴지며, 이러한 불변성과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을 불안과 동요(Angest og Uro) 속으로 몰아넣어 마침내 절망(fortvivle)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생각 속에는 평안(Beroligelse)과 복됨(Salighed) 또한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당신이 이 모든 인간적인 것, 이 모든 시간적이고 세상적인 변화와 변동(Foranderlighed og Omvexling)에 지치고, 자신의 변덕스러움(Ustadighed)에 지쳐, 당신의 지친 머리와 지친 생각, 지친 마음을 쉴 수 있는 한 장소를 찾고자 할 때—오, 하나님의 불변성 속에는 참된 안식(Hvile)이 있습니다!

337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이 불변성을, 그분께서 뜻하시는 대로 당신을 위하여, 곧 당신의 선과 당신의 영원한 선(Dit evige Bedste)을 위하여 받아들이고, 자신을 훈련받도록(lader dig opdrage) 내어드린다면, 당신의 자기 의지(Egenvillie, 아집)—사실 변화의 근원은 외부보다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가 가능한 한 빨리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당신은 선으로든 악으로든 이 불변성과 관계를 맺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과 불일치하려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십시오. 어린아이는 자기 앞에 있는 의지(Villie)에 대하여, 오직 하나, 곧 순종(at lystre)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느낍니다. 이처럼 당신이 하나님의 불변성에 의해 훈련받아, 변덕(Ustadighed), 변화(Foranderlighed), 기분의 변덕(Lune), 고집(Egenraadighed)을 버리게 된다면, 당신은 점점 더 확고하게, 그리고 더욱 복되게, 이 하나님의 불변성 안에서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생각이 복되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당신이 바로 이 불변성 안에서 복되게 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형성해야 합니다! 마치 행복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 말하듯이,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집은 영원히 안전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불변성 안에서 안식합니다.”

이 안식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고, 오직 당신 자신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변함없는 순종(uforandret Lydighed) 가운데 완전히 순종하게 된다면, 무거운 물체가 반드시 땅으로 떨어지듯이, 혹은 가벼운 것이 반드시 위로 떠오르듯이, 당신은 매 순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게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모든 것이 변하게 두십시오. 실제로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당신이 더 넓은 무대(en større Skueplads)에서 자신의 활동을 발견하게 된다면, 더 큰 척도(større Maalestok) 속에서 모든 것의 변화성(Alts Foranderlighed)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작은 무대에서, 가장 작은 자리에서도, 당신은 동일한 것을—어쩌면 똑같이 고통스럽게—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또한 당신 자신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조차 변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훈련(Opdragelsen)에 속한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성에 대하여는,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이 더 잘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매우 젊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더 길게 전개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정해진 대로 삶의 다양성(Livets Mangfoldighed)이 스스로 펼쳐지도록 맡겨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각 사람이, 자신보다 앞선 모든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바를 직접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변화가 그러한 방식으로 다가와서, 당신은 “변화는 즐겁다(Forandring behager)”41라는 말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말할 수 없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또한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언어가 아직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말을 스스로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는 즐겁지 않다(Forandring behager ikke). 내가 어떻게 ‘변화는 즐겁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때가 오면, 당신은 특별히—비록 처음의 경우에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그분, 곧 변하지 않으시는 분(den Uforanderlige)께로 나아가도록 이끌리게 될 것입니다.


338

사랑하는 여러분(M. T.)! 이 시간은 이제 곧 지나가고, 이 강화(Talen)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달리 하지 않는다면, 이 시간도 곧 잊히게 될 것이며, 이 강화 또한 잊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스스로 달리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불변성(Guds Uforanderlighed)에 대한 생각 역시 변화 속에서(i Foranderligheden) 곧 잊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하여는 변하지 않으시는 그분(den Uforanderlige)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당신 스스로 그것을 잊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면, 이 생각 속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위하여, 그리고 영원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게 될 것입니다(forsørget for Dit Liv, for en Evighed).


광야(Ørkenen)에서 한 고독한 사람(en Eensom)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태양의 열기에 거의 타버릴 듯하고, 지쳐 쓰러질 지경에서 한 샘(Kilde)을 발견합니다. 아, 그 상쾌한 시원함(liflige Kølighed)! 이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Gud være lovet), 살게 되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하나의 샘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얼마나 더 크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역시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는 하나님을 발견했다!”—이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공급받게 되었다(forsørget)!

왜냐하면 사랑하는 샘이여, 당신의 신실한 시원함(trofaste Kølighed)은 변화(Forandring)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추위가 이곳에 이른다 해도, 당신은 더 차가워지지 않고 동일한 시원함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샘물은 얼지 않습니다! 여름 한낮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당신은 동일한 시원함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샘물은 미지근해지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습니다. (그는 내 생각 속에서 결코 부적절한 대상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샘이란, 광야와 고독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찬양에는 어떠한 과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잃었고, 결국 넓은 세상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의 첫 번째 생각은 그 샘이었습니다—그러나 그 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샘은 말라버렸습니다(udtørret).

그는 한순간 슬픔 속에 잠겨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했던 그 말들 가운데 단 한 마디도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모두 진실이었습니다. 당신이 존재했을 때, 사랑하는 샘이여, 나는 당신의 상쾌한 시원함을 찬양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사라진 지금에도, 나는 그것을 찬양하겠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인간의 가슴 속에 불변성(Uforandrethed)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는 당신이 나를 속였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다시 당신을 발견한다면, 나는 확신합니다. 당신의 시원함은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이상을 약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339

그러나 주 하나님이여,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여(Du Uforanderlige),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발견되시는 분이시며,
또한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발견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삶 속에서든 죽음 속에서든,
그토록 멀리 떠나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을 만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샘들은 오직 몇몇 장소에만 있을 뿐입니다.

더욱이—참으로 압도적인 확신이여!—
주님은 그 샘처럼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가십니다.

아,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토록 멀리 길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다시 주님께로 돌아올 수 없을 만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단지
발견될 수 있는 샘과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설명입니까,
주님의 본질을 말하기에는!

주님은 오히려
목마른 자를, 길 잃은 자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샘과 같으십니다.42

이런 샘에 대해서는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변함없이 발견되시는 분이십니다.

오, 그리고 사람이 언제 주님께 나아오든—
어떤 나이에, 어떤 시간에, 어떤 상태에서든—
그가 진실하게 나아오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샘의 변함없는 시원함과 같이,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게 따뜻하다는 것을,

오,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시여!

아멘.

주석

  1. 하나님의 불변성(Guds Uforanderlighed) ― 한 편의 강화(En Tale)
    비교하라. 초고 표지(kladden, ms. 1.3)에서 키르케고르(SK)가 다음과 같이 적어 놓은 것을: “하나님의 불변성 (Guds Uforanderlighed) / 설교 (Prædiken)”
    그리고 정서본(renskriften, ms. 3.3)에서는 그가 ‘설교 (Prædiken)’라는 표현을 삭제하였다. 또한 제목 페이지 정서본(renskriften til titelbladet, ms. 3.4)을 비교하라. 그곳에서 키르케고르는 “한 편의 강화(En Tale)”라는 표기 아래에 적혀 있던 다음 문구를 삭제하였다.
    “1851년 5월 18일 주일, 시타델 교회 (Citadellets Kirke)에서 행해진 강화(Tale holden …)”

    핵심 의미(간단 해설)
    키르케고르는 처음에는 이 글을 설교(Prædiken)로 썼지만 나중에 강화(En Tale)로 바꾸었습니다.그리고 더 나아가 “어디에서 설교했다”는 교회 설교 기록 자체를 삭제했습니다. 즉 그는 의도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수정합니다.
    설교(Prædiken) → 강화(En Tale), 교회 설교 기록 삭제

    이는 키르케고르가 후기 저작에서 반복하는 전략과 연결됩니다.
    교회 제도 설교 → 개인을 향한 강화
    제도적 교회 → 단독자(den Enkelte)

    즉 “하나님의 불변성(Guds Uforanderlighed)”이라는 주제는 교회 제도 안의 설교가 아니라 개인에게 향한 실존적 강화로 재구성됩니다. ↩︎
  2. 미하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 (Michael Pedersen Kierkegaard)는 1756년에 태어났으며, 1768년에 외삼촌인 양말·직물 상인(hosekræmmer) 닐스 안데르센(Niels Andersen)에게 도제로 들어갔다. 그는 그 직업 교육을 마친 뒤, 1780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양말·직물 상인(hosekræmmer)으로 시민권(borgerskab)을 취득하였다. 그는 40세의 나이에 상당한 재산(formue)을 가지고 사업에서 은퇴했으며, 이후에도 그 재산을 계속 증식하였다. 1797년에 아네 룬드 (Ane Lund)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쇠렌 키르케고르(SK)가 막내였다. 1808년에 그는 Nytorv 2번지(오늘날 Frederiksberggade)의 집을 구입하였으며, 그곳에서 1838년 8월 9일, 향년 81세로 사망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이와 동일한 헌정문을 다음 저작들에서도 비교하라.
    《두 편의 건덕적 담화 (To opbyggelige Taler, 1843)》
    《세 편의 건덕적 담화 (Tre opbyggelige Taler, 1843)》
    《네 편의 건덕적 담화 (Fire opbyggelige Taler, 1843)》
    《세 편의 건덕적 담화 (Tre opbyggelige Taler, 1844)》
    《네 편의 건덕적 담화 (Fire opbyggelige Taler, 1844)》

    이 저작들에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헌정문이 등장한다.
    “고인이신(Afdøde)
    미하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 (Michael Pedersen Kierkegaard),
    이전에 이 도시에서 양말 상인(hosekræmmer)이었던,
    나의 아버지 (min Fader)께
    이 강화를 바칩니다(helliges disse Taler).”

    또한 다음의 헌정문도 비교하라.
    《상상된 상황에서의 세 편의 강화 (Tre Taler ved tænkte Leiligheder, 1845)》
    “나의 고인이 된 아버지
    미하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를 기억하며
    바칩니다(helliget).”

    마지막으로 다음의 헌정문도 비교하라.
    《한 편의 건덕적 담화 (En opbyggelig Tale, 1850)》
    “고인이 된
    미하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
    나의 아버지를 기억하며
    이 작은 글을 바칩니다(helliges dette lille Skrift).”

    또한, 다음 일기를 참고하라. Not6:24
    나는 여기 아주 혼자 앉아(나는 많은 시간 종종 혼자였지만 그렇게 의식한 적은 없었다), 새딩(Sæding)을 볼 때까지 시간을 세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어떤 변화도 기억할 수 없으며, 이제 그가 가난한 소년이었을 때 양을 몰던 곳, 그의 묘사 때문에 향수병에 시달렸던 곳을 보러 갈 것이다. 내가 병에 걸려 새딩 공동묘지(Sæding Kirkegaard)에 묻힌다고 가정해 보라! 얼마나 이상한 생각인가! 나에 대한 그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게 내 삶의 전부이자 실체가 될까? 하나님이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께 빚진 것에 관련하여, 그 과제는 그렇게 작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고, 그로 인해 인생에서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 진정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인 거룩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개념을 얻었다. ―JP V 5468 (Pap. III A 73) n.d., 1840 ↩︎
  3. 1851년 5월 17일자 《Adresseavisen》 제115호의 설교자 목록(prædikantlisten)을 보라.
    “시타델 교회 (Citadellets), 마기스터 S. Kierkegaard, 오전 9시 30분.”
    5월 21일, 키르케고르(SK)는 여성 청중 두 사람(kvindelige tilhørere)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첫 번째 편지의 필자는 자신을 ‘e – e’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쓴다.
    “지난 주일에 당신이 시타델 교회 설교자(Prædikant)로 공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곳에 가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종종 듣고는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잊어버리곤 했던 그런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풍성하고 따뜻한 마음(det rige, varme Hjerte)에서 강화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두렵게 하면서도(forfærdende) 동시에 건덕적이며(opbyggelig)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beroligende) 것이었습니다. 그 강화는 마음 깊이 스며들어 결코 잊히지 않고, 영원하고 복된 열매(evige, velsignelsesrige Frugter)를 맺게 할 것입니다.”

    두 번째 편지의 필자는 자신을 ‘S: F:’라고 부르며 키르케고르의 시타델 교회 설교(prædiken)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저에게 그 날은 건덕을 위한 축제의 날(en Festdag til Opbyggelse)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저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일기 기록 (journaloptegnelsen) NB24:74를 비교하라. 이 기록은 1851년 5월 말 또는 6월 초에 작성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5월 18일 주일, 나는 시타델 교회 (Citadellet)에서 설교했다. 그것은 나의 첫 번째, 나에게 사랑스러운 본문(min kjere Text) 야고보서 1장이었다. 또한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생각하며 설교했다(나의 이전 약혼자 레기네 올센 (Regine Olsen), 현재 슐레겔 부인). 혹시 그녀가 나의 설교를 듣는 것이 기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미리부터 육체적 인격(min legemlige Personlighed)을 사용해야 할 때마다 항상 그러하듯 온갖 긴장 때문에 매우 고통을 겪었다.
    나는 설교를 했다. 전반적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나 나는 너무 약하게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고, 고무된 상태였다. 나의 생각은 여름 동안 이런 설교들을 몇 번 더 하되 물론 충분히 준비한 후에(efter Udarbeidelsen)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이것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며 (abnorm Tid) 또한 나에게 너무 큰 부담 (for meget paa mig)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즉흥 설교 (ex tempore, 라틴어: 준비 없이 즉석에서)’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생각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나는 극단적인 것 (det Yderste)을 감히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월요일, 나는 너무 기진맥진하고 쇠약해져서 그것은 끔찍할 정도였다. 여러 날이 지나갔다. 즉흥 설교(ex tempore)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기독교적인 것을 실존적으로(existentielt) 가능한 한 멀리까지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나의 전 존재(mit hele Væsen)에 반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점점 더 쇠약해졌다. 그러나 그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다음 설교를 위해서는 그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병이 들었다. 나의 인격의 한계(min Personligheds Grændse)인 그 고통스럽고 비참한 통증이 다시 무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나는 한순간 이것을 벌(Straf)로 이해했다. 내가 충분히 신속하게 결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점점 더 비참해졌다. (…) 그러나 나는 다시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나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다음 말씀 안에서 쉰다.

    “나의 은혜로 족하다 (lad Dig nøies med min Naade)”.

    내면화(Inderliggjørelse)가 나의 과제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면에서 시인(Digter)이다. 5월 18일 아침,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 안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태어나게 해 달라 (noget Nyt i mig)고. (나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나에게 강하게 떠올랐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여 결국 견신례(Confirmation)로 인도하듯 하나님이 나를 나의 견신례(min Confirmation)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내 안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의 저자적 사명(min Forfatter-Opgave)을 다르게 이해한다. 이제 그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종교성을 직접 전파하는 것(ligefrem at udbrede Religieusitet)으로 봉헌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견신 (Confirmation)도 받았다. 나에게는 바로 이것이 그 의미이다.” ↩︎
  4. “이 본문 (Texten)은 내가 처음 사용했던 것(den første jeg har benyttet)이다”라는 말은 다음을 가리킨다. 즉 야고보서 1장 17–21절이 《두 편의 건덕적 강화 (To opbyggelige Taler, 1843)》에 실린 두 번째 강화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Al god og al fuldkommen Gave er ovenfra)”의 성경적 본문 기초 (bibelske tekstgrundlag)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5. 즉 야고보서 1장 17–21절이 《네 편의 건덕적 강화 (Fire opbyggelige Taler, 1843)》에 실린 두 번째 강화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Al god Gave og al fuldkommen Gave er ovenfra)”와 세 번째 강화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Al god Gave og al fuldkommen Gave er ovenfra)”의 성경적 본문 기초 (bibelske tekstgrundlag)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6. 1851년 5월에 기록된 일기 NB24:56에서, 키르케고르(SK)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관한 설교를 위한 새로운 주제들(Nye Themaer til Prædikener over Guds Uforanderlighed)”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것이 그를 움직인다(Alt bevæger ham) –
    그러나 아무것도 그를 변화시키지 못한다(Intet forandrer ham).” ↩︎
  7. 이 표현은 다음 성경 구절을 암시한다. 먼저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하나도 너희 아버지의 뜻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또한 누가복음 12장 6절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잊히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6장 26절에서도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한 다음의 구절과도 비교하라. 이는 《기독교 강화 (Christelige Taler, 1848)》의 네 번째 부 “금요일 성찬에 관한 강화 (Taler ved Altergang om Fredagen)” 중 여섯 번째 강화의 기도 (nr. VI)에 나타난다.
    “제가 하늘의 궁창 아래 서서 창조의 경이로움에 둘러싸일 때, 저는 감동과 경배로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무한 속에서 별들을 가볍게 붙들고 계시면서도, 아버지처럼 참새를 돌보십니다.” ↩︎
  8. 전도서 1:2를 암시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9. “인간의 변덕”에 대하여는 1844년에 세 개의 건덕적 강화의 두 번째 강화인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에서 나타난다. 또한, 야고보서 1:6-8을 참고하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10. “사도(Apostelens)”: 초대 교회의 전통(oldkirkelige tradition)에 따르면, 야고보서(Jakobsbrevet)의 저자는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키르케고르(SK)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던 견해는 이 사도가 “작은 야고보(Jakob den Yngre) 또는 “적은 야고보(Jakob den Mindre)”라는 것이었다(마가복음 15:40, Mark 15,40 참조). 또한 그는 알패오의 아들(Alfæus’ søn)로 여겨졌다(마태복음 10:3, Matt 10,3 참조). 예를 들어 다음 책을 참조하라.
    M. Gottfried Büchner, 《성경 실재 및 어휘 대조 사전(biblische Real- und Verbal-Hand-Concordanz) 또는 주해적·설교학적 사전(Exegetisch-homiletisches Lexicon)》 제6판, H. L. Heubner 증보 편집, 할레(Halle), 1840 [1740], 도서목록 번호 ktl. 79, 781쪽, §5, d, “Jacob, Jacobus” 항목.
    그러나 교부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부(rom.-katolske kirkelærere) 중 한 사람 — 에 따르면, 이 야고보(Jakob)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Jakob, Jesu bror), 곧 “주님의 형제 야고보(Jakob Herrens bror)”와 동일 인물(identisk)이라고 보았다. 이 견해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동시에 사도였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키르케고르의 시대에도 활발하게 논의(livligt diskuteret)되고 있었다. 다음을 참조하라.
    G. B. Winer, 《성경 실재 사전(Biblisches Realwörterbuch)》 제2판, 1–2권, 라이프치히(Leipzig), 1833–1838 [1820], 도서목록 번호 ktl. 70–71, 1권 620–623쪽.
    W. M. L. de Wette, 《구약과 신약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입문 교과서(Lehrbuch der historisch-kritischen Einleitung in die Bibel Alten und Neuen Testamentes)》 제4판, 베를린(Berlin), 1833–1842 [1817–1826], 도서목록 번호 ktl. 80, 2권 《신약 정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입문(Einleitung in die kanonischen Bücher des Neuen Testaments)》 §167, 302–306쪽 Ph. Schaf,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관계(Das Verhältniss des Jakobus, Bruders des Herrn, zu Jakobus Alphäi)》 베를린(Berlin), 1842, 도서목록 번호 ktl. U 94. ↩︎
  11. 소크라테스를 뜻한다. ↩︎
  12. 이 부분은 다음을 참고하라. 플라톤, 《플라톤전집 V》, 천병희 역 (파주: 숲, 2019), 《테아이테토스(Theaitetos)》38(151b-d):
    “여보게, 내가 왜 자네에게 이토록 긴말을 늘어놓느냐고? 그것은 자네도 그렇다고 생각하듯, 자네가 속에 무엇인가를 임신해서 진통을 겪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세. 그러니 내가 산파의 아들이고 나 자신도 산파술의 전문가라는 점을 명심하고 자네를 내게 맡기고, 내가 묻는 말에 최선을 다해 대답해주게. 그리고 내가 자네 생각을 검토해보고서 그중 어떤 것을 참이 아닌 모상이라 판단하고는 유산시키고 내다 버린다 해도 첫아이를 빼앗긴 여자처럼 내게 사납게 덤비지는 말게. 여보게, 내가 그들이 임신하고 있던 어리석은 생각을 제거하면 이미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 그대로 물어뜯고 싶은 불타는 적개심을 갖곤 했네. 그들은 내가 선의로 그런다는 것을 모른다네. 그들은 어떤 신도 인간에게 악의를 품지 않으며, 나도 ㅇ악의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못하는 게지. 내가 그러는 까닭은 거짓을 묵인하고 진리를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일세.”
    그리고 다음을 참고하라. Fragments, pp. 20-21, KW VII (SV IV 190); Works of Love, p, 277, KW XVI (SV IX 263). ↩︎
  13. 이것은 그 당시에 구약을 토대로 하여, 관습적으로 계산했던 방법이다. ↩︎
  14. 마태복음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
  15.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이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16. 이는 예를 들어 사도신경의 첫 번째 조항(Den apostolske Trosbekendelse)을 가리킨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 인용문은 《제단서 (Forordnet Alter-Bog)》의“교리문답 (Catechismus)” 부분에서 가져온 것이다. ↩︎
  17.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는 분 (usynlig)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 성경 구절들을 참조하라.
    로마서 1장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den usynlige Gud)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디모데전서 1장 17절, “영원하신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전능과 창조에 대하여는 다음 일기를 참고하라. NB:69, Pap.VII1 A181, 1846년
    하나님의 전능과 선함과 악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문제(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고 다만 악을 허용하신다는 이 구별 대신)*는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결국, 존재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그 누가 행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행하기 위해, 전능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이른바, 존재를 의존하게 만든 것이 전능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자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면, 바로 이런 이유로 전능에 빚진 존재가 독립적일 수 있도록, 전능이 나타난 것처럼 다시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능력을 가진 자는 그 속에 갇혀 스스로 포로가 되고 따라서 그가 자유롭게 만들고자 한 자와 잘못된 관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유한한 능력(재능 등)에는 유한한 자기 사랑(self-love)이 포함되어 있다. 오직 전능자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동시에 스스로 물러날 수 있다. 이 관계가 받는 자의 독립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이 그분의 선함이다. 선함이란 완전히 거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하게 자신을 다시 취함으로써 받은 사람이 독립적으로 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모든 유한한 능력은 존재를 의존적으로 만든다. 오직 전능자만 존재의 독립을 창조할 수 있다.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끊임없이 전능하게 물러남으로써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전능자는 타자와의 관계에 내재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전능자는 비교될 만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전능자는 그 능력의 눈곱만큼도 포기하지 않고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존재를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다. 전능자가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을 창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전체 눈에 보이는 세계),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을 창조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즉, 저 전능자에서 독립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다. 자신의 강력한 손으로 이 세상을 그토록 강력하게 잡을 수 있는 전능자는 자신이 존재하게 했던 것이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손을 가볍게 할 수도 있다. 단지 능력의 변증법에 대한 비참하고 세속적인 개념만 강제하고 의존성을 만드는 능력과 비례하여 그 능력은 점점 더 커진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해 더 잘 이해했다.** 그는 능력의 기술은 정확히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이 최고의 것임을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해도,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이것은 수행될 수 없다. 오직 전능자만 이것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하나님께 맞서 눈곱만한 독립적 존재를 지녔다면(실체[materia, substance]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다시 한 번 존재를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는 전능자의 표현이다. 내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그분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해도, 사실 나를 독립적으로 만들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약간의 능력을 상실했다면, 명확히 그분이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을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
  18. 히브리서 1: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시편 104편 2절, “주께서 빛을 옷처럼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처럼 펼치셨나이다.” ↩︎
  19. 이는 히브리서 1장 10–12절을 가리킨다. “또 이르시되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그것들을 말아 버리시면 그것들이 바뀌려니와 주는 여전하여 주의 연대는 끝이 없으리라.’”
    또한 시편 102편 26–28절도 참조하라.

    짧은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강화에서 사용한 표현 “세계를 옷처럼 바꾸신다(omskifter en Klædning)”가 히브리서의 성경적 이미지에서 온 것임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서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 낡아짐, 사라짐, 바뀜
    하나님: 동일하심, 변하지 않으심, 영원하심

    즉
    세계 → 변화 (Foranderlighed)
    하나님 → 불변 (Uforanderlighed)

    이 대비가 형성됩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계를 옷처럼 바꾸시는 하나님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역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지만 그분 자신은 변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바로 이 강화 전체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불변성(Guds Uforanderlighed)입니다. ↩︎
  20. 이는 감각들 (sanserne)을 통해 지각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den sandselige Verden은 문자 그대로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경험적 세계를 뜻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강화에서 다음 두 세계를 구분한다.
    ① 감각적 세계(den sandselige Verden)로, 자연 세계, 물질 세계를 뜻한다.
    ② 사건의 세계(Begivenhedernes Verden)로, 역사, 인간 사건의 세계를 뜻한다.
    그리고 이 두 세계 모두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 ↩︎
  21. 이는 다음 문헌을 참조한 표현이다. 《복음적 기독교 종교 교과서(Lærebog i den Evangelisk-christelige Religion)》 제1장 III “성경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Hvad Skriften lærer om Guds Væsen og Egenskaber)” §6 이 책은 N. E. Balle와 C. B. Bastholm이 작성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발레의 교과서 (Balles Lærebog)”라고 불린다. 코펜하겐(Kbh.) 1824 [1791], 도서목록 번호 ktl. 183, 14쪽.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임재하신다(Gud er allestedsnærværende), 그리고 그의 능력으로 모든 것 가운데서 모든 곳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들로부터 어느 곳에도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 ↩︎
  22. “인류의 구주께서 태어나실 때(naar Menneske-Slægtens Frelser fødes)”: 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가리킨다. 다음을 참고하라. 누가복음 2장 1–20절→ 예수의 탄생에 대한 서술
    또한 다음 구절도 참조하라. 갈라디아서 4장 4–5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짧은 해설
    키르케고르는 강화에서 두 사건을 나란히 놓습니다.

    ① 참새가 죽는 사건(naar en Spurv døer)
    ② 인류의 구주가 태어나는 사건(naar Menneske-Slægtens Frelser fødes)

    이 대비는 매우 의도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작은 사건에도 계시고 가장 큰 사건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참새의 죽음은 가장 작은 사건인 반면, 구주의 탄생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둘 다 동일하게 하나의 “사건 (Begivenhed)”입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것에도 함께하시고 가장 위대한 구원의 사건에도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편재(Allestedsnærværelse)와 하나님의 섭리(Forsyn)를 동시에 말하는 문장입니다. ↩︎
  23. “모든 현실적인 것을 가능성으로서(alt Virkeligt som Mulighed)”: 이는 아마도 마태복음 19장 26절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또한 다음 구절도 참조하라. 누가복음 1장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짧은 해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모든 현실적인 것을 가능성으로서 붙들고 계신다(alt Virkeligt som Mulighed)”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사유입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현실성(Virkelighed)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현실성(Virkelighed)은 여전히 가능성(Mulighed)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 (Almægtighed)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성으로 붙들고 계시며 언제든지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현실 속에 갇혀 있으나, 하나님은 현실을 가능성으로 붙듭니다.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Almægtighed)과 하나님의 불변성(Uforanderlighed)이 함께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
  24. “그의 전능하신 손(sin almægtige Haand)”: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 (almægtig)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을 참조하라. 제1장 III “성경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 §3 《복음적 기독교 종교 교과서
    (Lærebog i den Evangelisk-christelige Religion)》, 일반적으로 “발레의 교과서 (Balles Lærebog)”라고 불리는 책. 코펜하겐(Kbh.) 1824 [1791], 13쪽.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Gud er almægtig),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무 어려움 없이 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지혜롭고 선한 것만 행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짧은 해설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사용한 표현 “전능하신 손 (almægtige Haand)” 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당시 덴마크 교회 교육에서 가르치던 교리적 표현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전능(Almægtighed)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모두 행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한 것(det gode)과 지혜로운 것(det viise)만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의 전능은 임의적인 힘이 아니라 선한 의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가 말한 “전능하신 손 안에 모든 현실을 가능성으로 붙들고 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전능(Almægtighed), 하나님의 선하심(Godhed), 하나님의 불변성(Uforanderlighed)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전제하는 말입니다. ↩︎
  25. 이는 누가복음 1장 52절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가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도다.” ↩︎
  26.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27. 이 표현은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가리킨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또한 시편 90편 4절도 참조할 수 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입니다.”

    해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시간(Tid)과 영원(Evighed)의 대비다. 인간에게 천 년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단지 하루(en Dag)와 같다. 키르케고르는 이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성 (Evighed)과 불변성(Uforanderlighed)을 강조한다. 인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 인간은 변하고(forandres), 세대는 지나가고(Slægt), 결국 인간은 죽는다(døer).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den evig Uforanderlige)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Guds Villie)과 다른 길(en anden Vei)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시간 속의 갈등이 아니라 영원과의 충돌이 된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시간을 살지만 하나님은 영원 속에 계신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다면 그 문제는 결국 영원의 차원(Evighed)에서 드러나게 된다. ↩︎
  28. hvis der var en Retfærdig : 창세기 18장 16–33절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긴 대화를 암시한다.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여러 차례 중보기도를 드린다. 그는 만일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고, 이어서 45명, 40명, 30명으로 계속 줄여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단지 10명의 의인만 있어도 그 성을 살려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대화가 끝난 후 하나님은 떠나시고, 아브라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 도시에 죄가 매우 컸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국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셨다(창 19:23–25 참조). ↩︎
  29. en Verden, der, som Skriften siger, ligger i det Onde : 요한일서 5장 19절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줄을 아노라” ↩︎
  30. tales om, at Gud ikke lader sig spotte : 갈라디아서 6장 7절을 가리킨다.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개역개정)라고 말한다. (NT-1819) ↩︎
  31. 아마도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큰 홍수 이야기,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이 심히 큰 것을 보시고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사건을 가리킨다. 흔히 ‘노아의 홍수(대홍수)’라고 불리는 이야기이다. ↩︎
  32. 덴마크어 “Han giver Tid”는 문자적으로 “그분은 시간을 주신다” 혹은 신학적으로는 “그분은 시간을 허락하신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영역본에서 사용되는 “he takes his time”은 단순히 지연하거나 천천히 행동한다는 의미를 전달할 뿐이며, 키르케고르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키르케고르에게서 시간(Tid)은 하나님이 단순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부여”는 회개(Omvendelse)와 변화(Forbedring)를 위한 가능성의 공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원(Evighed)과 불변성(Uforanderlighed)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지연이 아니라, 인간이 결단(Afgørelse)하고 존재(Tilværelse)로 형성되는 조건으로서 시간이 주어진다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
  33. et Evighedens Regnskab :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결산을 하시고, 인간이 심판의 날에 그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된다는 생각은 신약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장 36절(다음 주석 참조), 로마서 9장 28절, 베드로전서 4장 5절 등이 있으며, 또한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묘사도 이에 해당한다. ↩︎
  34. [마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
  35. et dobbeltløbet Skydevaaben : 두 개의 총열을 가진 사냥용 총을 가리킨다. 이 총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하나는 두 개의 매끈한 총열을 통해 산탄을 발사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매끈한 총열은 산탄용, 다른 하나는 강선이 있는 총열로 탄환을 발사하도록 되어 있는 형태를 의미한다. ↩︎
  36. greb det forbudne Lystelige :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인간의 첫 죄)를 가리킨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 후, 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37. 70 Aar er da ingen Evighed : 인간의 일반적인 수명이 70년이라는 전통적 이해를 가리킨다. 이는 시편 90편 10절에 근거한 것으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개역개정)라는 말씀에서 비롯된 관점이다. ↩︎
  38. en Alvidende : 하나님을 ‘전지하신 분’으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하여, 발레의 교리서(Balles Lærebog) 제1장 III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4를 참고하라. (330,22), p.13f. 거기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며, 과거에 일어난 것,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그리고 장차 모든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동시에 아신다. 우리의 가장 은밀한 생각조차도 하나님께 숨겨져 있지 않다.” ↩︎
  39. ere vi, som det hedder, Skygger : 아마도 다음 성경 구절들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욥기 8장 9절 “우리의 날은 땅 위의 그림자와 같으며”, 14장 2절 “사람은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머무르지 못한다”; 시편 102편 12절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나는 풀과 같이 시들었나이다”(참조: 시 109:23); 시편 144편 4절 “사람은 허무함과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개역개정). 또한 역대상 29장 15절, 전도서 6장 12절, 지혜서 2장 5절과 5장 9절도 참조하라. ↩︎
  40. et Evighedens Regnskab : 하나님께서 결산을 이루시며, 인간이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상은 신약 여러 곳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장 36절(다음 주석 참조), 로마서 9장 28절, 베드로전서 4장 5절 등이 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타난 예수의 최후 심판에 대한 묘사도 참고하라. ↩︎
  41. Ordet: Forandring behager : “변화는 즐겁다”라는 격언 또는 금언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여러 변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 문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오레스테스》 234행에 나타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 14장(1154b28–29)에서 이를 인용한다. 거기서는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인간에게 변화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는데, 이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C. Garve의 독일어 번역과 주석(1798–1801)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1852년 10월의 저널(NB27:32, SKS 25, 148,15–16)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시인의 말대로 인간에게 변화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는데,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이 표현은 특히 이솝 우화의 라틴어 번역을 통해 널리 퍼졌는데, 페드루스(Phaedrus)의 서문 2권 10행에서 “varietas delectat”(‘변화는 즐겁다’)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덴마크 속담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전해지는데, 예를 들어 “변화는 즐겁다, 마귀가 유리 바지를 입었다고 말했다” 또는 “변화는 즐겁다, 마귀가 눈덩이를 물며 말했다”와 같은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E. Mau, 《덴마크 속담집》, 1879, 1권, 238쪽). ↩︎
  42. 이는 아마도 마태복음 18장 12–1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곧 길 잃은 양의 비유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만일 그것을 찾으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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