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왜 ‘위로자(Trøsteren)’인가
― 고난 없는 축복을 추구하는 시대 속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소비되는 언어 중 하나는 “축복”이다.
잘되는 삶, 형통한 삶, 건강한 삶, 안정된 삶, 성공하는 삶. 우리는 종종 이것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기도가 응답되고, 일이 잘 풀리고, 문제가 해결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느낀다.
물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그의 일기(NB26:40)에서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만일 하나님께 사랑받는 표지가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라면, 왜 성령(Hellig-Aand)은 ‘위로자(Trøsteren, 보혜사)’라고 불려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왜 ‘영(Aand)’이신가
키르케고르는 요한복음 4장을 떠올린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이 영(Aand)이시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순히 외적 성공의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상적 성공으로만 측정된다면, 그것은 아직 영의 관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도 성공을 원하기 때문이다.
세상도 건강을 원한다.
세상도 안정과 번영을 원한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에는 다른 일이 일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기 확신이 흔들린다.
자기 의가 깨어진다.
그리고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영적 존재(Aand)”가 되어 간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죽어감(at afdøe)” 혹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라고 불렀다.
죽어감(at afdøe)의 고통
현대 교회는 종종 “거듭남(at gjenfødes)”을 강조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묻는다.
“죽어감 없이 거듭남이 가능한가?”
그에게 죽어감은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지가 고난(Lidelse)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고난이 끝나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오히려 신약성경은 반대로 말한다고 본다.
예수는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보이리라.”
즉, 고난은 버림받음의 증거가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깊이를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물론 이것은 고난 자체를 미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키르케고르 역시 인간이 고난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래서 성령이 “위로자(Trøsteren)”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길을 스스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왜 위로자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능력의 영으로만 이해한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영.
기적을 일으키는 영.
삶을 형통하게 만드는 영.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더 깊은 차원을 본다.
성령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는 영이다.
성령은 단지 외적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죽어 가는 과정을 견디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은 위로자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할 때 가장 깊은 위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안에서 실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믿음 이후에도 실패가 있다. 기도 이후에도 눈물이 있다. 헌신 이후에도 고난이 있다.
바로 그때 인간은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
혹은
“하나님은 지금 나를 영(Aand)으로 빚고 계신다.”
키르케고르는 두 번째 길을 말한다.
가장 무서운 이기주의
이 일기의 마지막에서 키르케고르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한다.
“가장 극단적인 이기주의(Egoisme)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믿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 한국 교회에 매우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내 삶을 잘되게 해주기를 사랑하는가?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고, 후자는 자기 중심의 종교다.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지가 고난일 때조차도 그 관계를 붙드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그것을 슬픔이 아니라 “복된 기쁨(salig Glæde)”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 사랑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성령론
오늘 한국 교회는 다시 성령(Hellig-Aand)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열광과 감정의 차원에서가 아니다.
성령은 단지 인간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영이 아니다.
성령은 인간을 새롭게 존재(Tilværelsen)하게 하는 영이다.
그 영은 우리를 죽어감(at afdøe)으로 이끄신다.
그러나 동시에 거듭남(at gjenfødes)으로 이끄신다.
그리고 바로 그 길 위에서, 성령은 위로자(Trøsteren)가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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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Bradley · May 19, 2026 at 5:27 pm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