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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려는 지배자의 심리

지배자는 이미 승리한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정을 갈구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에서는 주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주인은 이미 패배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승리를 확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크세르크세스를 생각해 봅시다.

왜 그는

  • 자신의 군대를 모두 기록하게 합니까?
  • 자신의 제국을 과시합니까?
  • 자신의 영광을 남기려고 합니까?

만약 이미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면,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록하려는 행위 자체가“나를 기억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기록은 단순한 역사 기술이 아니라 인정을 요구하는 행위입니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예화는 헤겔과 예상보다 훨씬 깊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지배자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노예만 자유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주인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 인정을 유지해야 하고,
  • 권력을 증명해야 하고,
  • 승리를 반복해야 하고,
  • 자신의 이름을 계속 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영광의 주인이 아니라 영광의 노예입니다.


기록은 불안의 증거다.

보통 기록은 성취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기록은 이미 불안의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잊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잊히지 않는 존재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록하려는 욕망은 이미 망각을 두려워하는 존재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신을 기억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은 기억되어야 할 필요 자체에서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는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하만은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왕의 영광 속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싶어 합니다. 모르드개는 기억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십니다.

따라서 하만은 자신을 기록하려 하지만 결국 사라집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을 잊지만 하나님께 기억됩니다.


이것을 헤겔과 연결하면

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의 인정투쟁은 주인과 노예의 비대칭성을 상호 인정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배자가 자신의 영광을 기록하고 끊임없이 기억되기를 원하는 모습은, 그가 이미 인정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인정을 갈망하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지배는 인정의 완성이 아니라 인정 결핍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지배 이념은 처음부터 인정의 불안 위에 서 있으며, 상호 인정 역시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키르케고르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사랑은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행위를 기록하지도, 증명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 안에 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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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ies: Christi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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