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왜 운명의 여신 파르카(Parcae)를 이야기했을까?

『철학의 부스러기』 제5장을 읽다 보면 의외의 장면을 만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갑자기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 파르카(Parcae)를 언급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문학적 비유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비유는 『철학의 부스러기』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핵심을 담고 있다.

파르카는 누구인가?

파르카는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다.

첫 번째 여신은 생명의 실을 잣고, 두 번째 여신은 그 실의 길이를 정하며, 마지막 여신은 그 실을 끊는다.

고대인들에게 실을 잣는 행위는 곧 삶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반대로 실을 끊는 행위는 하나의 생이 끝나고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을 의미했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신화를 철학의 비유로 사용한다.

삶은 양(Quantity)이다

키르케고르는 먼저 삶을 양(Qvantitet)으로 설명한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경험이 쌓이고,

역사가 이어지고,

전통이 형성된다.

이 모든 것은 계속해서 실이 길어지는 것과 같다.

그는 이것을 “삶의 다양성(Livets Mangfoldighed)“이라고 부른다. 삶은 마치 한 명의 파르카가 끊임없이 실을 잣듯 계속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양은 질이 될 수 있는가?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헤겔 철학은 역사와 시간이 계속 축적되면 결국 새로운 질(Qvalitet)이 나타난다고 본다.

많은 양이 쌓이면 새로운 단계가 생기고,

역사가 발전하면 더 높은 정신이 나타나며,

인류는 점차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양의 축적이 질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헤겔 역사철학의 핵심 원리이다.

키르케고르는 “실을 끊으라”고 말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놀라운 말을 한다.

삶은 계속 실을 잣는다.

그러나 생각(Tanken)은 또 하나의 파르카가 되어 그 실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양이 질이 되려고 하는 순간, 그 연결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길어졌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실이 길어졌을 뿐이지, 실 자체가 다른 종류의 것이 된 것은 아니다.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비유는 제5장의 핵심 논쟁과 직접 연결된다.

반론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오신 지 벌써 1800년이 지났다. 기독교는 문화가 되었고 전통이 되었으며 사회 전체에 스며들었다.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은 믿음을 갖기가 훨씬 쉽지 않은가?”

키르케고르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아니다.

1800년이라는 시간은 단지 양(Qvantitet)이 늘어난 것일 뿐이다.

역사가 아무리 길어져도 그것만으로는 믿음(Tro)이라는 질(Qvalitet)이 생겨나지 않는다.

시간은 길어질 수 있다.

전통은 깊어질 수 있다.

교회는 커질 수 있다.

기독교 문화는 사회 전체에 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여전히 양의 증가일 뿐이다.

믿음은 그 연속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실을 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을 끊는다”는 것은 역사나 전통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연속성과 믿음의 본질을 구별하라는 뜻이다.

아무리 오랜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났더라도 믿음은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부모가 신자라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수백 년을 이어 왔다고 해서 믿음이 세대를 따라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간(Øieblikket)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질적인 사건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흔히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실을 믿음의 근거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묻는다.

“그것은 단지 시간이 지난 것인가, 아니면 정말 믿음이 생긴 것인가?”

시간은 길어질 수 있다.

경험은 많아질 수 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동으로 믿음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에게 또 하나의 파르카가 되라고 말한다.

양이 질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 실을 끊으라는 것이다.

맺음말

이 짧은 파르카의 비유는 사실 『철학의 부스러기』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시간의 연속성이 아니라 믿음의 비연속성이었다.

역사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문화도 발전할 수 있다.

교회도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역사의 연속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일어나는 질적인 도약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키르케고르는, 삶이라는 실을 끝없이 잣는 파르카 옆에서, 철학자는 또 하나의 파르카가 되어 그 실을 끊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독하시면 더 많른 정보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Categories: Christianity

0 Comments

Leave a Reply

Avatar placeholder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