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Pap. V B 13의 계속;
사람의 영혼을 경외심 어린 엄숙함으로 꿰뚫는 하나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함께 발음되면 사람은 절로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조차도 그를 보기 훨씬 전부터 모자를 벗고, 그를 보지도 못한 채 모자를 손에 든 채 서 있게 됩니다.
그것은 의미 있는 하나의 표현이며, 의미 있는 하나의 이름입니다. 곧 절대적 방법(die absolute Methode)[*] 과 헤겔(Hegel) 입니다.
오늘날 절대적 방법은 논리학(logik)에서만이 아니라 역사학(historiske Videnskaber)에서도 이미 제집을 찾았습니다.[**] 오, 세속적 영광이여, 결국 당신이란 무엇입니까! 아, 가장 아름다운 장미여, 당신의 가시는 어찌 그리도 날카로운가!
나는 세상에서 결코 절대적 방법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헤겔이 논리학 속에 마련해 준 집, 더구나 역사학 속에까지 마련해 준 집만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습니다. 말장난과 재치에 의존해야 하고, 구멍을 흡묵지(blotting paper)로 메워야 하며, 번쩍이는 장식만 늘어놓은 채 그것이 제대로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니—아, 절대적 방법이라는 이름을 얻기에는 너무도 비싼 대가입니다.
호국경(Cromwell the Protector)이 아무리 영광 가운데 있었다 하더라도, 절대적 방법만큼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나팔 소리가 그 위엄을 아무리 크게 선포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헤겔은 참으로 위대한 논리학자였습니다. 이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요란하게 선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논리적 잔재주(logiske Snurrepiberier)를 몹시 좋아했고, 그러한 것들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심리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바로 그런 점으로 인정받기를 열망했습니다.
마치 네로(Nero)가 자신을 반역한 빈덱스(Vindex)에게 분노했던 이유가 그가 자신을 형편없는 황제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형편없는 키타라 연주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의 말은 이렇습니다. “네로는 형편없는 키타라 연주자이지만, 그보다도 더 형편없는 황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논리학을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절대적 방법을 역사에 적용하는 문제만을 살펴보려 합니다.
헤겔에게 1843년이라는 세월이 더 주어졌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환상을 위해서였겠지만 말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세계 역사를 모두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절대적 방법이 과연 한 인간의 삶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볼 시간쯤은 가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이라면 세계 역사를 절대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단 한 사람의 인간은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지혜를 보고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대의 현자(vismand)는 자기의 사유를 그렇게 멀리까지 밀고 나가면서도,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 역시도 고대의 어떤 현자가 자기 방법을 절대적 방법(die absolute Methode) 이라고 불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 여백에서: 이 용어는 내용상 매우 무게 있는(einhaltsschwer) 말입니다. 그럼에도 시인의 표현처럼 “입에서 입으로(von Munde zu Munde)” 너무도 쉽게 사람들 사이를 떠돕니다.
[**] 여백에서: 그는 논리학 안에서 그것을 위해 다름 아닌 지옥(hell) 자체를 마련해 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모든 것을 거창한 규모로 다루려는 오만함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et enkelt Menneskes Liv) 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인류의 역사(Slægtens Historie)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그러한 한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Gud)을 볼 수 있다면, 그는 또한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가능하면서 후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을 관찰하면서, 시리우스(Sirius)가 지구에서 1,800억 마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여기는 짐승 같은 우둔함(brutish imbecility)에 역사에 대해서도 굴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인간(sensate man)은 이런 이야기에 경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양심이 깨끗하지 못할 때에는, 전체(the whole), 총체성(totality) 등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만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자기 자신인 동시에 인류 전체(sig selv og Slægten) 가 되는 하나의 개인(Individ)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세계사적 사건(world-historical events)이나 절대적 방법(die absolute Methode)에 대해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속기를 원합니다. 사실 자기 자신의 하찮은 인격 대신 세계사 전체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 거래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분명 사기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속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에서 속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미 온 세상을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제기한 문제는 가능한 한 단순하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다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단순하게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설령 이 특정한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얻는다 해도, 그것이 아무리 절대적으로 장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악한 방탕(wicked dissipation)에 빠지는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훨씬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러나 분명히 제기된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받지 못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손해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일은 특히 최신의 학문(science and scholarship)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최신 학문은 무엇보다도 곧바로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이 되고자 하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성(concretion)은 흔히 사유(thought)에서 평정심을 빼앗는 유혹적인 힘을 지닙니다. 다시 말해, 사유 자체(thought itself)에 만족할 줄 아는 학문적 만족(scientific-scholarly contentment)을 앗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학문이 구체적인 내용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수학자는 자신의 대수학(algebra)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계산(calculation) 자체 외에는 아무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감각적인 사람(sensate person)은 거기에서 만족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학자가 감각적인 사람의 열정(passion)을 자극하여 그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곧바로 문자 대신 달러(dollars), 마르크(marks), 실링(shillings)을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사유를 곧바로 구체화하려 하고, 먼저 순수한 추상(pure abstraction) 속에서 구체적인 것에 적용하려는 그 사유 자체를 분명히 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은 다양성(the manifold)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을 매혹하는 힘을 행사합니다.
가령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구체적인 것 속에서 드러내려는 사유(thought) [*]는 여전히 불분명한데도, 구체적인 것 자체는 너무나 풍부하고, 너무나 다채로워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이나 독자는 그 즐거움에 도취된 나머지 정작 사유를 잊어버리고, 실제로 자신을 속인[**] 사람에게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크게 빚을 졌다고까지 여기게 됩니다.
역사적인 것(the historical)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면 그 자체 안에 여러 가지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philosopher)가 참으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러한 매력을 마땅히 거부해야 합니다.
철학자에게 역사적인 것(the historical)은 오직 역사적인 것 자체일 뿐이지, 이 특정한 역사(this historical) 가 아닙니다. 따라서 단지 상상력(imagination)이나 호기심(curiosity)을 만족시키려는 사람은 그를 찾아와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자가 이념(idea)과 역사적인 것(the historical)의 관계를 보여 주고자 할 때, 역사적인 것은 순전히 추상적인 것이 되며, 본질적으로는 시간성(temporality) 이 될 뿐입니다.[+]
[*] 여백에서; 다시 말해, 처음에는 추상(abstraktion)의 간결함(conciseness)과 무관심함(unconcern) 속에서 그에게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 결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분명해질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가장 다양하고 온갖 것들을 보고 이해한 뒤의 일이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사유(thought)를 산만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1
[**] 여백에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영혼의 깊은 고요를 요구하는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것에 대해 디어르헤우스바켄(Dyrehaugsbakken) 같은 유원지에서 떠들어 대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그 사람의 내면을 침범한 것이다.2
[+] 여백에서;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악기가 전체 합주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전체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면서도, 정작 그 한 악기의 연주를 먼저 들려주지는 않고, 처음부터 오케스트라 전체를 연주해 버리는 것과 같다.
철학자(philosopher)에게는 시간성(Timelighed, temporality) 이 한 개인의 삶을 의미하든, 아니면 가장 경이로운 세계사적 업적(world-historical achievement)을 의미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감각적인 경탄(sensate astonishment)과 미신(superstition)에서 비롯되는 다음과 같은 오해에 빠질 수 없습니다. 곧 이념(Ideen) 이 한 개인의 삶보다 세계사(world history)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오해 말입니다.
철학자의 열정(passion)은 이러한 모든 구별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사가(historian)로서 학습자에게 어떤 사실을 가르쳐 놓고는 마치 철학자(qua philosopher)로서 무언가를 말한 것처럼 독자를 속이는 일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면 배우는 사람은 과연 그런 사람에게 감사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됩니다.
방법(method)이 처음부터 구체적(concrete)이라면, 그것은 두 경우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는 곧바로 역사적 자료(historical matter)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해석(interpretations)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해석들 속에서 이념(Ideen)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경우를 예로 들어 봅시다. 가령 그는 중국(China)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누가 중국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는 일을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방대한 학식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우리는 새롭게 배울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압도됩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이전에는 그 주제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 그리고 그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원래 자신들이 밝혀야 했던 문제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다른 독자는 우연히도 중국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 설명 속에서 하나의 오류를 발견합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호기심(curiosity)을 가지고 양쪽의 글을 모두 읽습니다.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정말로 알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더욱더 잊어버리게 됩니다.
두 번째 경우에는 그는 동양 철학(Oriental philosophy), 그리스 철학, 유대 철학 등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기가 찾고 있던 것, 곧 철학자(philosopher)로서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은 얻지 못합니다. 사람은 깊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는 하나님(Gud)이 역사(the historical) 속으로 어떻게 인도하시는 분으로 들어오시는지를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세계사적 결정적인 사건(world-historical decision)을 선택합니다. 그는 극적인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킵니다. 나라들과 왕국들의 이해관계, 수백만 사람의 운명이 그 갈등 속에 얽혀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이다.”
사람은 이전에는 그런 해석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에게 감사하고, 그가 준 지적인 즐거움을 만끽하며 그의 솜씨를 감탄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알고자 했던 것이 전혀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립니다.
또한 그는 다음 사실도 잊어버립니다. 곧 세계사적 결정 속에서만(거기에서는 실제로 하나님의 인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볼 수 있고, 가장 보잘것없는 한 사람의 삶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철학자의 열정(philosopher’s passion)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미신적인 사람(superstitious) 일 뿐입니다.
곧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거나, 혹은 그것을 그럴듯하게 말할 줄만 알면 누구나 철학자가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사람들의 정신을 다양성(multiplicity)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렇게 다양성 속에 빠진 사람들은 철학자의 본래 임무와 과업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 점을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철학은 오직 하나의 방식으로만 관련되는 것을 다룬다.[*]3
방법(method)이 처음부터 이렇게 구체적(concrete)이 되어 버렸으니, 당연히 어떠한 예비적 성찰(provisional reflection)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곧바로 본론(main dish)으로 넘어갑니다.
체계(system)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방법이 옳았음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에 말입니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심판자를 매수하기 위한 온갖 수단이 이미 다 동원된 뒤에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의 논리적 문제(logical problem)조차도 다루려고 하면, 곧바로 역사적 구체성(historical concretion)의 한 측면이 끼어듭니다. 곧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보고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의를 분산시키는 도구. 오직 주의를 분산시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 여백에서; 「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ἔχειν」(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 — 플라톤(Platon).4
— JP I 50; III 3301 (Pap. V B 14), 연대 미상(1844)
Pap. V B 14의 수정본.
최종 원고에서는 삭제된 것으로 보이는 별지.
영혼을 경외로운 엄숙함으로 꿰뚫는 하나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함께 발음되기만 하면 시대의 자식(Barn af Tiden) 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조차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 방법(die absolute Methode) 과 헤겔(Hegel) 입니다.
절대적 방법.
이 표현은 내용상 매우 무게 있는(einhaltsschwer) 말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표현처럼 입에서 입으로(von Munde zu Munde) 전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입에서 발음되든 여전히 내용상 무게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오늘날 절대적 방법은 논리학(logik)에서뿐 아니라 역사학(historiske Videnskaber)에서도 이미 제집을 찾았습니다.
오, 세속적 영광이여, 당신은 얼마나 큰 기만인가!
어느 거지가 부유한 귀족을 부러워하다가, 그 귀족이 목발(crutches)을 짚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절대적 방법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오, 세속적 영광이여, 당신은 과연 무엇을 열망할 만한 존재입니까? 절대적 방법이 되는 것을 열망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헤겔이 논리학 안에 마련해 준 그런 거처를 갖는 것을 말입니까? 역사학에서 마련해 준 거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말장난(wordplay)과 재치 있는 농담(witticisms), 그리고 얼버무림(evasions)에 의지해야 하고, 반쯤 거짓인 말(half-untruths)로 겨우겨우 자신을 지탱해야 하며, 평생을 구걸하듯 살아가면서 겨우 절대적인 것(the absolute)이 되려 해야 한다니—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애초부터 조금씩 나누어(by request, bittweise)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또한 체계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니.
아, 이것은 너무도 비싼 대가입니다!
호국경 크롬웰(Cromwell the Protector)도 온갖 영광 속에 있었지만, 하룻밤 쉴 곳을 헛되이 찾아 헤매던 그때보다 더 불행하고, 더 떠돌이(fugitive)였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겔은 위대한 논리학자였고, 탁월한 논리학자였습니다. 이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이해한 것, 만일 그의 설명이 거기에서 멈추기만 했더라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을 보장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또한 젊은 학생은 기쁨과 신뢰에 찬 헌신 속에서 헤겔이 참으로 스승임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방법은 주홍빛 옷을 입은 나쁜 양심(a bad conscience in scarlet) 이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 방법이라는 표제가 붙었습니다.
그러므로(ergo), 헤겔은 이것마저도 성취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적 잔재주(Snurrepiberier) 들은 경건한 우상 숭배(fetish-worship)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들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헤겔에 대한 최고의 철학적 대역죄(high treason)로 여겨졌습니다.
네로(Nero)가 빈덱스(Vindex)에게 분노했던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빈덱스가 반란을 선동했기 때문도 아니고, 네로를 형편없는 황제라고 말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네로는 형편없는 키타라 연주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역사학(historiske Videnskaber)에서까지 그렇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헤겔(Hegel)에게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사 전체를 다루려 한다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절대적 방법(die absolute Methode)이 과연 한 인간의 삶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볼 그 짧은 시간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고대라면, 세계사 전체를 절대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단 한 사람의 인간조차 변변히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방법을 보고 웃었을 것입니다. 고대의 현자(vismand)는 그렇게 시작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렇게 나아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끝내 평범한 사람조차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해하던 것마저 잃어버리는 방식으로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고대에는 존재(Tilværelsen) 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필요한 지식만 갖추고 있다면 역사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산해야 할 과제(regningens Opgave)는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에는 절대적 방법을 발명한 현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헤겔에게서 드러나는 잘못은 쉽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방법은 세계사 전체를 설명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을 설명해야 하는 학문은 윤리학(Etik) 입니다. 그런데 헤겔에게서는 한편으로 윤리학이 거의 완전히 소홀히 다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고 해도, 대개는 어떤 살아 있는 존재도(existere, 실존하다)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설령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더 나은 내용에 따라 실제로 살아간다면, 그는 즉시 절대적 방법 자체를 폭파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헤겔은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을 훨씬 더 잘 다룹니다. 죽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헤겔도 죽은 사람들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의 소원은 이것입니다. 곧 소크라테스(Sokrates)가—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저승에서 현자들에게 그들이 정말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지 묻고자 했던 그 사람이—헤겔을 만나 절대적 방법에 대해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상대적인 삶의 영역에서 이토록 절대적이었던 헤겔이, 오히려 영원한 삶(Evighedens Liv)의 절대성 안에서는 상당히 상대적인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가능한 한 단순하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도 다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단순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질문받은 것에 대답해야 하는 단순한 의무를 소홀히 하더라도 그것을 보상할 만큼 장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령 답 대신 얻게 되는 다른 무엇이 놀라울 만큼 장엄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본질적으로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방종(dissipation)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사소한 질문일지라도, 그러나 바로 자신이 묻고 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받는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손해입니다.
추상적인 질문에 대답하면서 곧바로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이 되려 하는 것은 위험한 고정관념(pet idea)입니다. 그 구체화가 어떤 이전 철학자의 사상을 요약하는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특수성(the particularity of the historical)을 제시하는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구체화는 흔히 사유(thought)에서, 사유 자체에 만족하는 평온함(serenity)과 단순함(simplicity) 을 유혹적으로 빼앗아 갑니다.
수학자는 자신의 대수학(algebra)을 즐거워합니다. 그는 감각적인 사람(sensate person)의 흥미를 끌기 위해 달러나 마르크나 실링을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것은 수학에서보다 철학에서는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사유를 곧바로 구체화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중에 구체적인 것 속에서 드러내려는 그 사유를 먼저 추상 속에서(in abstracto)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령 한 음악가가 어떤 사람에게 주선율을 담당하는 악기(lead instrument) 가 자신의 음색으로 다른 모든 악기를 꿰뚫으며 전체 음악의 기본 요소를 이룬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먼저 그 악기만으로 몇 개의 선율을 연주하여 배우는 사람이 그 소리에 익숙해지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백 개의 다른 악기가 동시에 연주되는 가운데서도 그 악기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오케스트라 전체가 연주하도록 하고, 그 악기의 음색이 작품 전체를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들어 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반대로, 처음부터 오케스트라 전체를 연주해 버린다면 그는 듣는 사람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구체적인 것(the concrete)은 다양성(the manifold)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혼을 매혹하는 힘을 행사합니다.
가령 구체적인 것 속에서 드러내려던 사유(thought) 는 끝내 분명해지지 않았는데, 구체적인 것 자체는 너무도 풍부하고 다채로워서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때로는 그 자체를 이해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과제가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배우는 사람이나 독자는 그 즐거움을 만끽하고, 또 그 수고에 지친 끝에, 마침내는 정작 사유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으로 자신이 이 스승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 그 스승은 추상의 무심한 간결함(passionless brevity of abstraction) 속에서 그 사유를 분명하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그런 방법을 빈약한 것이라고 깎아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유는 오직 전체가 끝나는 마지막에야 비로소 분명해질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배우는 사람이 수많은 것을 보고 들었고, 여러 가지 정신 상태를 거쳤으며, 스승의 놀라운 학식에 거듭 감탄했고, 이전 철학자들의 심오한 사상과 어리석은 사상까지 모두 접한 뒤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매우 추상적으로 말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홀리는 마법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독자를 얻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사람을 놀라게 할 줄 아는 세련된 부정직(polished dishonesty) 으로도 결코 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 JP II 1606 (Pap. V B 41), 연대 미상(1844)
-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철학적 사유는 처음에 추상 속에서 명료하게 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헤겔식 방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온갖 역사적 사례를 늘어놓고, 독자는 수많은 사실과 설명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분산되고, 마지막에 가서야 “이제 방법이 증명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비판합니다. 독자는 이미 “사유(thought)”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백 메모는 앞에서 반복한 비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사유는 먼저 추상 속에서 명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체적인 다양성이 오히려 사유를 방해하게 된다.
이것이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키르케고르가 끝까지 고수하는 방법론입니다. 구체적인 역사나 사례는 사유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명료해진 사유를 비추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 여기서 Dyrehaugsbakken(오늘날 흔히 Bakken이라고 부름)은 코펜하겐 북쪽의 유명한 유원지·놀이공원입니다. 키르케고르 시대에도 매우 시끄럽고 흥청거리는 오락 장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높고 거룩한 것은 본래 영혼의 고요(stillness of soul) 속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원지 한복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독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비판한 철학적 방법은 그보다도 더 심하게 독자의 내면을 침범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키르케고르의 반복되는 비판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진리는 소음 속에서 소비되는 정보가 아니라, 침묵과 내면성(Inderlighed) 속에서 전유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메모는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철학의 부스러기』 전체를 관통하는 내면성의 철학을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 1139b 참조: Immanuel Bekker 편, Aristoteles graece, I-II (Berlin, 1831), II, p. 1139; Christian Garve 독일어 번역, Die Ethik des Aristoteles, I-II (Breslau, 1798–1801), II, pp. 164–165; J. A. Smith와 W. D. Ross 편, The Works of Aristotle, I-XII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08–1952), IX권:
“학문적 인식(epistēmē, scientific knowledge)이 무엇인지는, 유사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엄밀하게 말한다면, 다음에서 분명해진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아는 것은 달리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달리 있을 수도 있는 것들은 우리의 관찰을 벗어나면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학문적 인식의 대상은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무조건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은 모두 영원하며, 영원한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JP II 2281 (Pap. IV C 23)도 참조.
해설
이 주석은 앞에서 인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철학은 오직 하나의 방식으로만 관련되는 것을 다룬다.”를 설명하기 위해 덧붙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적 인식(ἐπιστήμη, epistēmē)의 대상은
필연적(ἀναγκαῖον, necessary)이고, 영원한(ἀΐδιον, eternal) 것이며, 따라서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키르케고르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철학의 본래 과제가 사실을 많이 아는 것이나 역사적 자료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 곧 영원한 것(Evigheden)을 사유하는 데 있다는 고전 철학의 통찰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철학의 부스러기』에서는 여기에 결정적인 기독교적 전환을 더합니다. 즉, 영원한 것(Evigheden)은 단순히 시간 밖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Timelighed) 안으로 들어와 순간(Øieblikket)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아리스토텔레스 인용은 『철학의 부스러기』의 논증을 준비하는 중요한 철학사적 배경이 됩니다. ↩︎ - Plato, Sophist, 248 a; opera, II, p. 300; Collected Dialogues, p. 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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