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최고선

칸트에게 최고선은 단순한 행복이 아니다. 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최고선을 “덕(Virtue)과 행복(Glückseligkeit)의 일치”로 본다. 즉:

  • 인간은 도덕적으로 선해야 하고,
  • 동시에 그 선에 합당한 행복이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 선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지 않고,
  • 악한 사람이 오히려 성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칸트는:

  • 하나님,
  • 영혼의 불멸,
  • 미래의 완성

을 요청하게 된다. 즉 최고선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도덕적 완성 상태에 가깝다.


키르케고르의 최고선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간다. 그는 “최고선(det høieste Gode)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 행복과 덕의 조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 세계 질서의 완성을 기다리지 않는다.
  • 역사적 종합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최고선이다. 즉 최고선이:

  •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 현재의 관계가 된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칸트보다 훨씬 실존론적이다.

칸트:

  • 최고선 = 도덕 + 행복의 종합
  •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목적론적 상태

키르케고르:

  • 최고선 = 하나님 사랑(Kjerlighed til Gud)
  • 이미 현재적으로 가능한 실존 사건

그래서 키르케고르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 사랑을 잃지 않았다면 최고선을 잃지 않은 것이 된다. 이것은 칸트와 매우 다르다.

칸트에서는:

  • 최고선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과제지만,

키르케고르에서는:

  •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소유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한 사람은 실제로 모든 것을 잃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사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이 곧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로마서 8장 28절과 연결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키르케고르에게 이 “선(Gode)”은 단순한 외적 번영이 아니다.

그 “선”은:

  •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
  • 하나님 앞에서 존재(Tilværelse)가 생성되는 것

이다. 즉 최고선은 어떤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는 칸트의 최고선을:

  • 내면화하고,
  • 현재화하며,
  • 실존화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것은 내가 강조해 온:

  • “Credo ergo sum”
  • 존재 생성
  • 하나님 사랑 안의 존재
  • 내면의 교회

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하다. 칸트에서는 도덕 법칙이 인간을 규정하지만, 키르케고르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인간 존재를 생성한다. 그래서 키르케고르의 최고선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구독하시면 더 많른 정보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Categories: 사유

0 Comments

Leave a Reply

Avatar placeholder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