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변증법
키르케고르의 모든 사상은 변증법적입니다. 그런데, 이 변증법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역설의 변증법”이라 불러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말을 헤겔적 의미로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키르케고르에게 변증법은
정(正) → 반(反) → 합(合)
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진리가 끝까지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의 변증법은 이런 며에서 사실상 역설의 변증법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죄와 은혜
현대 신학은 종종 죄를 강조하면 은혜가 약해지고, 은혜를 강조하면 죄가 약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정반대입니다.
죄가 깊어질수록 은혜도 깊어진다.
그래서 죄 ↔ 은혜는 서로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회개와 위로
예를 들어, 욥기 42:6에서 욥의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학자는 이 부분이 “회개인가? 위로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참된 회개는 위로이다. 참된 위로는 회개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음과 생명
《죽음에 이르는 병》 전체가 그렇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죽음 ↔ 생명
이 역설적으로 만납니다.
절망과 희망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절망은 희망으로 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구원
제가 최근 유튜브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의 해답은 성령이다”라는 유튜브에서 말한 성령이 가져오는 형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심판 ↔ 구원을 대립시킵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성령의 심판은 구원을 위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죄의 발견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 죄를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수록 죄가 더 깊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예수의 사랑을 만났기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화로다 나여라고 말합니다. 욥도 하나님을 보았기에 에마스와 나함이 발생합니다(욥 42:6 참고).
제가 보기에는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의 거의 모든 핵심 개념은 이런 구조를 가집니다.
| 현대적 사고 | 키르케고르적 사고 |
|---|---|
| 회개 또는 위로 | 회개 안의 위로 |
| 심판 또는 구원 | 구원을 위한 심판 |
| 죄 또는 사랑 |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죄 |
| 죽음 또는 생명 | 생명을 위한 죽음 |
| 절망 또는 희망 | 희망을 위한 절망 |
| 자기 상실 또는 자기 발견 | 상실을 통한 발견 |
그래서 제가 앞으로 욥기뿐 아니라 교회론, 종말론, 성령론까지 확장한다면, “기독교 진리는 역설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역설은 논리의 실패가 아니라 계시의 형식이다.“라는 명제가 하나의 큰 연구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의 “변증법적 현상학” 자체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영원과 시간, 죽음과 생성, 회개와 위로, 심판과 구원은 서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시 사건 안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기 42:6의 에마스와 나함은 그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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