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키르케고르의 채무 의식 비교(같은 말 무한한 차이!)
니체의 채무는 수혜자 쪽에 발생하는 회고적 채무입니다. 『계보』 제2논문의 구조에서 빚은 언제나 받은 자에게 귀속됩니다.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개인은 공동체에, 현세대는 조상에게,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신에게 — 받은 혜택(존재, 보호, 은택)이 소급적으로 빚을 발생시키고, 그 빚은 등가 상환의 의무를 낳으며, 상환의 보증은 형벌의 공포입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기억술(Mnemotechnik)이 결정적입니다. 고통을 새겨서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 즉 장부의 유지가 채무 관계의 존립 조건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회고적이고, 타율적이며, 청산을 지향하는 구조입니다 — 청산이 불가능해질 때(신 앞의 무한 채무) 그것은 가책이라는 자기 학대로 내파합니다.
반면, 키르케고르의 채무는 사랑하는 자 쪽에 발생합니다. 제가 번역한 『사랑의 실천』 제1부의 해당— 「서로 사랑의 빚 안에 머무는 것이 우리의 의무」(Vor Pligt at blive i Kjærlighedens Gjæld til hverandre) — 의 논증은 로마서 13: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에서 출발하는데, 키르케고르는 이 구절을 통념과 정반대로 읽습니다. 통념은 사랑을 *받은* 자가 보답의 빚을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사랑하는 자를 무한한 빚 속으로 데려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무한한 빚 안에 있다는 것(at elske er at være i uendelig Gjæld)이며, 이 빚은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의 무한성의 표현입니다. 유한한 것은 다 주고 나면 끝나지만, 무한한 것을 주는 자는 주면 줄수록 더 주어야 할 것이 남습니다 — 그래서 빚은 사랑이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경험하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귀결이 나옵니다. 첫째, 이 빚의 의무는 청산이 아니라 머묾(at blive i Gjælden)입니다. 니체적 채무의 의무가 갚음이라면, 키르케고르적 채무의 의무는 갚지 않음, 정확히는 갚아서 끝내려는 시도 자체의 거부입니다. 보답으로 셈을 맞추려는 순간, 비교(Sammenligning)와 결산(Regnskab)이 개입하는 순간, 사랑은 끝납니다. 둘째, 그래서 기억술의 자리에 부기(簿記)의 거부가 옵니다. 니체의 채무가 장부와 기억(고통으로 새긴)을 요구한다면, 키르케고르의 사랑은 셈하지 않음을 요구합니다 — 사랑은 자기의 줌을 계산하지 않고, 허다한 죄를 덮으며(벧전 4:8), 원한의 장부를 만들지 않습니다. 니체가 채무의 계보에서 기억의 탄생을 본 곳에서,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조건으로 일종의 거룩한 망각을 요구하는 셈입니다.

이 역전이 1847년 강화의 죄책 이해를 다시 조명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제가 번역한 책인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제4장을 참고하십시오. 표면적으로 보면 강화의 Skyld(죄책)는 여전히 수혜자-피조물 쪽의 빚, 즉 니체적 형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의 벡터를 가져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니체적 채무의 동력은 형벌의 공포이고 그 정서적 색조는 가책입니다. 그런데 강화의 죄책은 공포가 아니라 *기쁨*의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죄책이 형벌-경제 관계 안의 빚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 안의 빚”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채권자로서 상환을 독촉하는 분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는 분이고 — 요한일서 4:19의 구조,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 — 그렇다면 신-인 관계의 원(原)채무자는, 감히 말하자면 사랑의 문법상,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 쪽에서 성립하는 무한한 줌입니다. 인간의 죄책 의식은 이 무한한 줌 앞에서 결코 채권자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의식이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은 짓누르는 가책이 아니라 관계의 깨질 수 없음에 대한 확신, 곧 기쁨이 됩니다. 인간이 항상 잘못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사랑이라는 것의 인간 쪽 그림자입니다.
역설의 최종 형태는 이렇게 정식화할 수 있습니다. 니체에게 무한 채무는 경제의 병리적 극한이고(갚을 수 없는 빚 = 영원한 가책), 키르케고르에게 무한 채무는 경제의 폐기이자 사랑의 정상 상태입니다(갚을 수 없는 빚 = 영원한 관계). 니체의 채무자는 갚지 못해 병들고, 키르케고르의 사랑하는 자는 갚지 않음으로써 건강합니다. 전자의 무한성은 형벌의 무한성이고, 후자의 무한성은 줌의 무한성입니다. 그러므로 두 사상가가 Schuld/Skyld의 죄책-부채 이중성이라는 같은 어휘를 다룬다는 사실은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한 개념적 재료로 정확히 반대 방향의 건축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니체는 채무에서 도덕의 계보(원한의 역사)를 읽었고, 키르케고르는 채무에서 사랑의 문법(은혜의 구조)을 읽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제가 쓴 논문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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