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이야기1

— 왕의 명령보다 무거웠던 한 사람의 선택
옛날 그리스의 도시 테베에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이들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권력을 두고 서로 칼을 들었고, 결국 성문 앞에서 서로를 찔러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테베의 왕이 된 사람은 크레온이었습니다. 그는 도시를 안정시키기 위해 단호한 명령을 내립니다.
“조국을 지킨 에테오클레스는 장엄한 장례로 기리되,
반역자로 싸운 폴리네이케스는 매장하지 말라.
그 시체는 들판에 버려 두어 짐승과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라.”
이 명령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는 사후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명령은 죽은 뒤까지 이어지는 처벌이었습니다. 도시는 침묵했습니다. 왕의 말은 곧 법이었고,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형제에게는 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바로 안티고네였습니다.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을 들었을 때, 분노하거나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아주 조용히 말합니다.
“이건 옳지 않아.”
그녀의 여동생 이스메네는 두려워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여자야.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어. 그러다 죽을 거야.”
안티고네는 대답합니다.
“그래도 나는 해야 해. 왕의 법보다 오래된 법이 있어. 신들의 법은, 죽은 자를 매장하라고 말해.”
그날 밤, 안티고네는 아무도 몰래 형의 시체가 버려진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녀는 큰 장례를 치르지 않습니다. 노래도 없고, 제사도 없습니다. 그녀는 단지 손으로 흙을 집어 형의 몸 위에 뿌립니다. 그 순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행동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결국 안티고네는 붙잡혀 왕 앞에 끌려옵니다.
왕 크레온은 묻습니다.
“이것이 네가 한 일이냐?”
안티고네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들의 법을 따랐습니다.”
왕은 분노합니다. 질서를 무너뜨린 자는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왕의 조카라 해도 예외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안티고네는 산 채로 무덤에 갇히는 형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의 아들—안티고네를 사랑하던 약혼자—도 절망 속에서 죽고, 왕비 역시 자결합니다. 도시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정의는 증명되었지만, 모든 것은 파괴로 끝났습니다.
연극은 이렇게 끝납니다.
왕은 살아남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무너진 왕으로 남습니다.
이 이야기가 남기는 질문
안티고네는 분명 옳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 한 생명을 살리지 못했고
- 새로운 역사를 열지 못했으며
- 오직 비극으로 완결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묻습니다.
“옳음은 증명되었지만, 그 옳음은 생명을 낳았는가?”
이 질문이 바로, 우리가 다음 단계에서 십브라와 부아와 안티고네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비극과 구원의 갈림길
— 안티고네와 십브라·부아, 같은 거부 다른 결말
겉으로 보면 안티고네와 십브라와 부아는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왕의 명령을 거부했고,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서 선택했습니다. 또한 둘 다 여성으로서 제국적 권력의 주변부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끝납니다.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닫히고,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구원의 역사로 열립니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라, 세계 이해의 근본적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1. 안티고네: 옳음은 증명되지만,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왕 크레온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 근거는 분명합니다. 그녀는 “신들의 불문율”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즉, 국가법보다 더 오래되고 보편적인 ‘옳은 법’이 있다는 주장이지요.
이 구조에서 안티고네의 저항은

- 법과 법의 충돌이며
- 정의의 편에 선 윤리적 결단입니다.
그러나 이 결단은 곧바로 자기 희생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안티고네는:
-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 새로운 역사를 열지 못하며
- 자신의 죽음으로 ‘옳음’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세계에서는 이런 말이 가능하다.
“정의는 증명되었으나, 세계는 여전히 폭력적이다.”
비극의 세계에서 옳음은 증언될 수는 있지만,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비극은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지만, 그 위대함은 늘 파괴와 함께 완결됩니다. 또한, 비극의 당사자인 안티고네는 그 세계 밖에 선 것도 아닙니다.
2. 십브라와 부아: 옳음을 주장하지 않고, 생명을 남긴다
출애굽기 1장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지만, 안티고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연설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정의’라는 말조차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왕명을 거부한 단 하나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이 표현은 법의 충돌이 아니라 관계의 우선성을 말합니다. 그들은 더 높은 법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멈춥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 그들의 불순종은 즉각 처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 오히려 아이들이 살아남고
- 그 아이들 가운데서 모세가 태어나며
- 역사는 출애굽을 향해 열립니다
즉, 십브라와 부아의 선택은 의미를 증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이어 주는 행위이지요.
3. 결정적 차이: ‘자기 완결’인가, ‘역사 개방’인가
이 두 이야기의 차이를 가장 정확히 말하면 이것입니다.
안티고네
- 선택의 무게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다
- 죽음으로 이야기가 닫힌다
- 비극은 완결된다
십브라와 부아
- 선택의 초점이 타자의 생명에 있다
- 그들의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 구원사는 열린다
비극은 언제나 한 인물의 위대함으로 완성되지만, 구원은 언제나 한 인물 너머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4. 왜 성경은 비극을 선택하지 않는가
성경은 인간의 도덕적 위대함을 증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여시는가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 “의로운 사람이 죽었다”
- “정의가 증명되었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 “백성이 번성하였다”
성경의 관심은 옳은 인간이 어떻게 죽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살려 역사를 이어 가시는가에 있습니다.
5.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 차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안티고네의 거부는 옳음을 증명하지만 비극으로 닫히고, 십브라와 부아의 거부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으로 시작되어 생명을 살리고 역사를 연다. 그래서 성경은 비극이 아니라 구원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옳음을 증명하려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이 역사를 여시도록 생명을 남기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결론
정리: 포로 상태 속에서 드러나는 참된 자유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포로 상태에 있으나 이미 다른 기준 아래 서기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기 전까지 줄곧 사망의 그늘 아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죽임당했고, 노동은 강제되었으며, 바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성경은 뜻밖의 인물들을 등장시킵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 그들은 체제를 무너뜨리지도, 혁명을 일으키지도, 영웅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이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
이 말은 포로 상태가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포로 상태가 더 이상 최종 권위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집트에 있었지만, 더 이상 바로 앞에만 서 있지 않았습니다. 사망의 그늘 안에 있었지만, 이미 빛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6절이 말하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친 큰 빛”은 그늘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늘 한가운데에 하나님의 현존이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은 바로 이 구조를 미리 보여 줍니다. 빛은 탈출이 아니라 침투이며, 구원은 회피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이 점에서 빅터 프랭클의 증언은 성경의 이 진리를 20세기의 언어로 다시 말해 줍니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단적 포로 상태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박탈된 상황에서도 인간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자유는 무엇을 경외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였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경험 끝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경외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다.”3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포로 상태에 있습니다. 수용소와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어도, 책임과 위기, 시스템과 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브라와 부아가, 그리고 프랭클이 보여 주듯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포로 상태가 자신의 마지막 정체성이 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는 위기를 제거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포로 상태를 면제해 주는 비상구도 아닙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질서를 재정렬하는 사건이며, 삶의 중심이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마지막 기준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망의 그늘 속을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그늘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할 수 있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무엇을 최종으로 두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존재 방식의 이동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늘 속에서 무엇을 두려워할지를 선택하게 하소서.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경외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포로 상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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