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요한과 아이러니, 아이러니의 개념 263쪽

아이러니의 개념 263쪽 번역

여기에서 세계의 아이러니(Verdens-Ironien)가 정확하게 해석된다. 모든 개별적인 역사적 현실은 항상 이데아를 실현하는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  이것은 특히 유대교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유대교는 과도기적인 순간(Gjennemgangs moment)으로서의 중요성이 특히 두드러진다. 율법이 계명을 선포한 후 “네가 이것에 순종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i]라는 약속을 덧붙였을 때, 이미 세상에는 깊은 아이러니가 있었다. 인간이 율법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조건과 연결된 구원은 가설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가 스스로 멸망했다는 것은 기독교와의 역사적 관계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출현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지 않고 단순히 세계사의 전환점으로 간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도 아이러니한 형성을 놓칠 수 없다. 그것은 이제 침례(세례) 요한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앞으로 올 사람이 아니었다.[ii] 앞으로 올 일도 알지 못했지만 유대교를 파괴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것에 의해 유대교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 자체로 유대교를 파괴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교가 줄 수 있는 의로움(정의)을 유대교에 요구했지만 유대교는 이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유대교의 존재를 허용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멸망의 씨앗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서 그의 성격은 완전히 가려져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형태로 세상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으므로, 말하자면 그는 단지 그 손에 있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형성이 완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자신의 아이러니를 의식하고, 주어진 현실을 심판할 때 부정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끼고, 이 부정적인 자유를 즐겨야 한다.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관성이 발전된 단계에 있어야 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주관성이 자신을 주장할 때,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주어진 현실과 마주할 때, 주관성은 자신의 힘을, 자신의 타당성과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이것을 느끼면서 주관성은 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이 자신을 간직하고자 하는 상대성(relativity)에서 자신을 구한다. 이 아이러니가 이제 세계사에서 정당화되는 한, 아이러니한 주체가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주관성의 해방은 이데아에 봉사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이 정당화된 아이러니의 천재성이다. 영혼을 구하려는 자는 영혼을 잃어야 한다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은 아이러니에 해당한다.[iii] 그러나 아이러니가 정당화되었는지는 오직 역사만이 판단할 수 있다.


[i]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또한, 신명기 5:10 참고.

[ii] 누가복음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iii] 누가복음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읽는 자는 살리리라”


아이러니 해설

 

 

키르케고르에게 아이러니(Ironi)는 단순한 문학적 수사나 풍자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파괴(destruktion)”를 수행하는 변증법적 도구입니다. 즉, 아이러니는 “부정(negation)”의 역할을 하여 기존의 현실, 제도, 종교, 윤리, 관념을 해체함으로써 진리의 새로운 생성 가능성을 여는 기능을 합니다.

 


 

1. 아이러니는 “세계의 파괴자(Verdens-Ironien)”

 

인용한 문단에서 말하듯,

“세계의 아이러니(Verdens-Ironien)”는 이데아의 실현과 동시에 그 파멸의 씨앗이 함께 존재함을 드러냅니다.

 

“모든 개별적인 역사적 현실은 항상 이데아를 실현하는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

 

즉,

  • 역사 속 현실(예: 유대교, 철학, 국가, 제도)은 언제나 이데아(진리)의 일시적 매개에 불과하며,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동시에 자기파괴의 필연성을 내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사적 아이러니(Verdens-Ironien)입니다. 아이러니는 따라서 단순히 조롱이 아니라, 역사의 내적 부정성(negativitet)을 드러내는 정신의 도구입니다.

 


 

2. 세례 요한의 아이러니 — “유대교를 유대교로 파괴함”

 

세례 요한(Johannes Døber)은 “새로운 종교”를 세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교 안에서, 유대교적 도덕과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오히려 그 종교 자체의 불가능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새로운 것에 의해 유대교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 자체로 유대교를 파괴했다.”

 

이것이 아이러니의 작용입니다 —즉, 체제 안에서 체제를 해체시키는 자기모순의 드러남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이행할 수 없기에, 그 자체가 파괴의 조건을 품은 구조가 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아이러니의 “도구”로서, 유대교의 한계 — 곧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 — 을 폭로했습니다.

 


 

3. 아이러니의 본질: 부정 속의 자유

 

키르케고르에게 아이러니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부정적인 자유(negativ Frihed)”의 경험입니다.

  • 주관성(subjektivitet)이 현실의 상대성(relativitet)을 인식할 때,
  • 즉, “이 현실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자각할 때,
  • 주관성은 비로소 자신을 “해방”시키는 자유를 느낍니다.

 

이때의 자유는 “긍정적 창조”가 아니라,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 — 즉 파괴를 통한 해방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아이러니는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그 부정 안에서 자유를 즐긴다.”

 

이 부정의 순간에서 역사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넘어가며,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가 역사적 창조의 선행조건이 되는 이유입니다.

 


 

4. 정당화된 아이러니 vs. 정당화되지 않은 아이러니

 

키르케고르는 아이러니를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구분설명예시
정당화된 아이러니 (berettigede Ironi)이데아(진리)를 위해 현실을 부정하는 아이러니. 부정은 새로운 창조를 준비한다.소크라테스, 세례 요한
정당화되지 않은 아이러니 (uberettigede Ironi)부정을 그 자체로 즐기는 파괴적 아이러니. 자기 자신조차 잃는다.허무주의자, 냉소주의자

 

세례 요한의 아이러니는 전자에 속합니다. 그는 “율법의 완성 불가능성”을 폭로함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올 공간을 비워 놓았습니다. 반면, “자기 영혼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라는 구절(마 16:25)은 정당화되지 않은 아이러니를 가리킵니다 —

즉, 부정만을 추구하다가 자신마저 부정해버리는 자입니다.

 


 

5. 요약 ― 아이러니는 ‘파괴를 통한 생성’의 도구

항목설명
아이러니의 본질현실을 부정하여 진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정신의 도구
세계사적 기능모든 역사적 제도·종교·윤리가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내적 모순의 드러남
세례 요한의 역할유대교의 도덕적 완성을 요구함으로써, 유대교의 자기파괴를 초래함
아이러니의 목표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해체 — ‘파괴 속의 창조’
정당화 여부진리를 위한 부정이면 정당화, 자기중심적 부정이면 정당화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