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마음의 청결, 277~8쪽 본문은 사실상 AI 시대의 직업 윤리를 가장 급진적으로 재정의할 수 있는 텍스트입니다. 아래에서는 키르케고르의 논지를 유지한 채, 현대 직업·노동·AI 시대의 ‘부끄럽지 않은 과업’이라는 문제로 단계적으로 확장해 보겠습니다.
1. 문제 설정: AI 시대에 “과업(Gjerning)”은 왜 흔들리는가
AI의 발전은 두 가지를 동시에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 지식의 희소성 붕괴
- 더 이상 “아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강점이 아님
- 전문지식·번역·분석·기획조차 자동화 가능
- 노동의 교환가치 붕괴
- 생산성 중심 노동 → 알고리즘 대체
- “얼마나 벌었는가 / 얼마나 효율적인가”라는 평가 기준의 공허화
이때 등장하는 질문이 바로 키르케고르적 질문입니다.
“이 과업을 나는 영원의 책임(Evighedens Ansvar)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가?”
AI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 키르케고르의 기준: ‘부끄럽지 않은 과업’이란 무엇인가
키르케고르는 명확히 말합니다.
- 왕이냐 노동자냐는 중요하지 않다
- 크냐 작으냐는 중요하지 않다
- 성공·명성·소득은 질문 대상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질문만이 남습니다.
“이 직업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의 세대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가?”
여기서 부끄러움(Skam) 은 심리적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불일치입니다.
- 내가 하는 일 ↔ 내가 존재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 이 둘이 어긋날 때, 인간은 부끄럽습니다.
3. AI 시대의 결정적 전환: “무엇을 하느냐” → “어떻게 존재하느냐”
AI 시대에 인간의 과업은 더 이상 이렇게 정의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생산하는가”
“얼마나 효율적인가”
“대체 불가능한 기술을 가졌는가”
키르케고르적 전환은 이것입니다.
직업(Gjerning, 과업)은 ‘기능’이 아니라 ‘영원 앞에서의 나의 서 있음’이다.
즉,
- AI가 더 잘할 수 있느냐 → 무의미
- 사회적 수요가 크냐 → 부차적
- 시장 가치가 높으냐 → 결정적 아님
결정적인 것은
👉 “이 일을 하는 내가, 이 일을 통해 어떤 인간이 되고 있는가?”
4. ‘부끄럽지 않은 과업’의 세 가지 기준 (AI 시대 버전)
① 대체 가능해도 부끄럽지 않은가
AI가 나를 완전히 대체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업을 내가 살아냈다는 사실이 내 존재를 거짓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효율이 아니라 정직성(Hæderlighed)의 문제
- AI는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책임질 수는 없음
② 군중(Mængden)이 사라져도 유지되는가
- 박수
- 좋아요
- 성과 평가
- KPI 이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키르케고르에게 군중은 항상 위험 요소입니다. AI 시대의 군중은 “데이터와 트렌드”의 형태로 나타날 뿐입니다.
③ 영원의 관점에서 설명 가능한가
키르케고르의 급진적 상상:
“만약 훗날의 세대가 지금 우리의 시대를 평가한다면, 나는 이 과업 앞에 서서 변명 없이 설명할 수 있는가?”
AI는 과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인간만이 자기 삶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5. AI 시대 노동 윤리의 역설: 하찮은 일이 더 고귀해질 수 있다
키르케고르의 통찰은 오늘날 더 급진적입니다.
- 자동화될수록
- 비가시적일수록
- 성과가 드러나지 않을수록
그 과업은 오히려 영원의 시험대에 더 직접적으로 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선택한다.”
이때 과업은 더 이상 생계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고백이 됩니다.
6. 결론: AI 시대의 ‘부끄럽지 않은 과업’ 정의
키르케고르적으로 정식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과업이란, AI가 대신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무관하게, 내가 그 과업 안에서 한 사람(Enkelt)으로서 영원의 책임 앞에 서 있음을 스스로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형식이다.
AI는 점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 일을 감당하는가”라는 질문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집니다.
0개의 댓글